포르투갈, 서점 그리고 포트와인
퇴근길에 집근처 단골바에 들러 독주 한잔 기울이며 바텐더와 수다를 떠는 거. 직장인으로서 누리고 싶은 소소한 사치였고, 이것을 이룰 수 있게 해 준 공간이 책바였다. 책과 술의 공감각을 구현하는 바이자 심야서점인 이곳에서 난 책을 본 적은 거의 없다. 대신 책보는 이들의 기운을 안주삼아 위스키만 홀짝이며 이곳의 주인장인 정인성 바텐더(이하 호스트)와 이야기 나누길 즐겼다. 이야기가 고조되어 내 목소리가 높아지면 그는 손짓으로 나의 볼륨을 조절하곤 했다.
남의집 1호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이 곳에서의 마지막 작품을 정인성 호스트와 함께 만들고 싶었다. 그를 이 거실에 모셔다 그의 취향을 나누고 싶은 낯선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마음먹었다. 호스트가 사는 공간에서 호스트의 취향을 전한다는 남의집의 본래 컨셉과는 사뭇 다르지만 뭐 모든 일엔 예외라는 게 있으니.
때마침 정인성 호스트는 포르투갈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고 그곳에서 인상깊었던 서점과 포트와인에 대한 포스팅을 SNS에 올리고 있었더랬다. 올커니. 포르투갈의 서점과 포트와인을 남의집 주제로 잡자 마음 먹었다. 그는 이미 여러 매체나 강연을 통해서 책바를 열고 운영하는 것에 대한 스토리를 전달해 왔으니 이와 다른 그의 개인적인 취향을 남의집에 담고 싶었다. 여행을 통해 곱씹은 호스트의 취향은 참으로 남의집스러운 콘텐츠라며 나의 기획을 스스로 칭찬했다. 김성용, 넌 정말!
책바에 들러 정인성 호스트가 포르투갈에서 공수해 온 포트와인을 한잔하며 그에게 남의집 호스트를 제안했다. 남의집 1호에서 마지막으로 모시고 싶다는 부분에 혹했는지, 포르투갈이라는 주제에 끌렸는지 모르겠으나 (나중에 물어봐야지) 그는 흥쾌히 응해 주었다. 그리하야 아래와 같이 '남의집 바텐더'라는 타이틀의 홍보 페이지가 완성되었고, 오픈과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며 정원의 6배가 넘는 낯선이들이 신청을 했다. 그의 책바 운영시간을 피해 월요일 저녁이라는 열악한(?) 타이밍에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반응을 불러 일으키다니! 이미 인플런서의 반열에 오른 그 덕분에 남의집이 널리 알려지고 팔로어가 늘어나는 호사도 누렸다.
바텐더가 열리던 날, 오랜만에 남의집 1호 거실에서 손님맞이를 준비했다. (자주) 안하는 청소도 하고 여러 명을 수용할 수 있게 거실 테이블 구조도 재정비했다. 하도 여러번 손님을 맞이 하다보니 나름의 메뉴얼이 생겨서 착착착 혼자서도 잘한다. 이 집에서 호스팅을 할 날도 몇번 안남았다는 생각에 그 과정을 타임랩스로 담아봤다. (아래) 이래 보니 내가 로봇 청소기같다는 생각이 든다.
포트와인 테이스팅도 곁들일 예정이여서 술맛을 더욱 돋울 수 있게 와인잔도 구비하고, 테이블 세팅에 끼를 부려 봤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집안에 있는 소품들을 올려본거지. 마침 홍씨로 익어가는 감이 몇개 있어서 올려두니 가을가을한 느낌이 나서 가을 오브젝트들은 죄다 모았다. 근데 감은 좀더 익혀서 나랑 은재형이 홍씨로 먹을 예정이라 관상용으로만 쓰기로 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감은 어림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테이블의 컨셉은 '그림의 감'으로 정했다.
6:1의 경쟁률을 뚫고 호스트에게 선택된 손님들은 어떤 분들일까? 나 역시 궁금했다. 남의집 초기에는 호스트분들이 손님 선별과정을 중개자인 나에게 위임했는데 어느샌가 대부분의 호스트분들께서 직접 선택하기를 선호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의 집으로 초대하는 자리니만큼 관심이 가고 이야기가 통하겠다 싶은 분들을 모시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이렇게 호스트들이 선별과정에서 갖게 되는 손님들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남의집 호스팅의 특권으로 전해 드린다.
손님들이 모두 도착했고, 먼저 문지기부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예전에 나를 소개할 때는 손님들로부터 '어떤 놈이 남의집을 운영하나' 싶은 반신반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면, 요새는 SNS를 통해 어느 정도의 친밀감 혹은 유대감이 생겼는지 날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초반의 어색함이 예전만 못한 단점도 있다. 참고로 남의집의 모토는 '어색천만'한 이벤트다.
손님이 익숙해 진 또하나의 이유는 재방문. 희안하게도 또한 감사하게도 한번 남의집에 놀러오신 손님은 이후에 지속적으로 관심갖고 신청해 주시는 편이다. 참석 여부는 호스트의 손에 달려 있어서 최종 방문 여부는 확정할 수 없으나 남의집에 3번이나 방문한 손님이 있다. 남의집 이력서, 도서관 그리고 바텐더까지 각각 다른 남의집을 경험한 이건우님. 그가 손님석에 앉아 있으니 거실에 어색함보다는 친근함이 감돈다. 남의집 최다 방문 게스트인 그의 신청동기를 들어보자.
또한분의 특별한 손님. 남의집 인스타에 가장 활발하게 댓글과 좋아요를 남겨주시고, 만난 적도 없는 나에게 기프티콘으로 던킨 도너츠도 선물해 주신 친절한 홍자영님. (먹을 걸 주면 내게는 친절한 사람이다.) 이전에 신청하셨을 때는 부득이 모시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함께 할 수 있어서 직접 얼굴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의 신청동기를 들어보자.
드디어 오늘의 호스트 정인성 바텐더 등장! 만날 책바에서 소근소근거리며 뵙다가 남의집 거실에서 진성으로 얘기하는 그를 보니 어색함과 신기함이 공존. 그가 오늘을 위해 특별히 공수해 온 포트와인과 함께 남의집 바텐더가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이야기는 서점으로 시작되었다. 작가 조앤롤링이 해리포터를 집필할 때 기숙사의 형상에 영감을 주었다던 렐루서점부터 기네스에 등재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버트랜드 서점까지 심야서점을 운영하는 정인성 호스트에게 포르투갈은 영감 덩어리, 그 자체였다 한다.
바닥에 앉아서 볼까요?
그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준비해 온 자료 중에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좋을 내용이 있다며 손님들을 TV 가까이로 유도했고, 자연스레 모두들 거실 바닥에 둘러 앉는 그림이 연출되었다. 본디 한국집은 거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게 자연스럽지만 남의집 1호는 좌식이 어색한 공간이다. 해서 그동안 의자식으로 진행해 온 남의집에서 처음으로 좌식이 거행되었다. 그림이 꾀나 예뻤다. (청소할 때 걸레질을 하지 않아서 불안불안했다만)
나를 포함한 참석자들 대부분이 포르투갈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만 갖고 있던터라, 도시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타일이나 길거리 버스킹으로 듣는 전통음악 파두 등에 대한 이야기는 여행지 리스트에 포르투갈을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포트와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포트와인의 PORT는 포르투갈의 줄임말로 포르투갈에서 탄생한 와인을 뜻한다. 주정강화 와인으로 보통의 와인이 10도인데 비해 포트와인은 20도로 도수가 높은 편. 포트와인은 재밌게도 영국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중 프랑스에서 와인을 수입하지 못하게 된 영국이 포르투갈에서 와인을 수입하면서 늘어난 운송시간으로 인한 와인의 변질을 막기 위해 와인에 브랜디를 넣었던 것이 포트와인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어떻게든 와인을 마시겠다는 영국인의 집념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포트와인라니.
포트와인에 대한 알쓸신잡을 마친 후 본격적인 포트와인 테이스팅을 위한 오늘의 선수 소개가 이어졌다. 비기너를 위한 포트와인, 토니포트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아래 동영상을 통해 들어보시죠!
자~ 이제 드디어 이밤의 하이라이트, 포트와인 테이스팅의 시간이 다가왔다. 포르투갈 여행기와 포트와인에 대한 소개로 음주욕구가 오를대로 오른 상태에서 총 4병의 포트와인이 남의집 거실에서 봉인해제되었다.
꽐꽐꽐~ 와인잔에 포트와인이 담기는 소리를 들으며 손님들은 초집중 모드가 되었고 두눈에는 하트가 뿅뿅 새겨졌다. 책바를 운영하며 손님들의 술촬영 욕구를 체득한 그는 술을 전부 따른 후에 포토타임을 내어주는 센스도 발휘했다.
총 세가지 포트와인을 마셨다. 정인성 호스트가 친절하게 하나씩 설명해 주고 손님들은 홀짝홀짝. 확실히 여느 와인보다 달고 묵직했다. 음식으로 치자면 단짠단짠. 포트와인은 먼저 후각을 강타한다. 브랜디향이 훅~ 콧속을 치고 들어와 뒷통수까지 치닿는다. 그리론 입술과 혀를 타고 들어간 달달함이 식도를 간질이며 내려간다. 이 단짠한함이 처음으로 포트와인을 마셨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베트남행 비즈니스석을 탔던 적이 있다. 처음 앉아본 비즈니스석이라 각종 술을 신나게 퍼마셨더랬다. 그 때 처음으로 포트와인을 접했는데 어쩜 이렇게 달짝지근한지 이건 한국에 가서 꼭 다시 먹어보겠다며 승무원에게 무슨 와인인지 다시 물어봤다. 그녀의 발음탓인지 나의 청력탓인지 '포투'와인으로 들렸고 내게는 '42'와인으로 기억되었다. 강한 도수에 스스륵 잠들며 도수가 42도라 42와인인갑다... 그 뒤로 한국에서는 쉽사리 접해보지 못했고 이제사 42와인은 포트와인이 되어 내 입안을 감싸돌고 있었다.
술이 돌면서 자연스레 뒷풀이 모드로 전환되었다. 밤도 깊어가고, 식탁 위엔 먹지 못할 감도 익어가고, 단짠한 포트와인도 한두잔 들이키니 슬슬 손님들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이야기를 들었으니 주로 포르투갈에 대한 질문과 호기심을 주고 받았을까? 에이 설마~ 이제는 편하게 각자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호스트 입장에서도 이게 편하다. 앞서 강연을 이끌어 가는 것도 적잖이 에너지를 쓰는데 뒷풀이까지 계속 콘텐츠를 전달하면 지치기 마련. 손님들끼리 알아서 잘 어울릴 수 있게 하는 게 뒷풀이의 포인트.
호스트의 취향과 공간은 마중물이고, 이에 끌린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한데 모아주는 것이 남의집 프로젝트가 전하는 핵심가치로 보고 있다. 때문에 남의집의 정수는 뒷풀이에서 발현되곤 한다. 호스트가 이끌어준 1~2시간동안 시나브로 같은 테이블 내에서 생긴 낯선이들 간의 얕고 느슨한 연대감이 술과 음식을 만나면서 표면 위로 올라오는 식이다.
이때부터 나는 손님들을 좀더 유심히 관찰한다. '이중에도 분명 남의집 호스트감이 있다.' 는 자기 최면을 걸며 남의집 레이다를 작동해 손님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남의집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우리집이 아닌 다른 집에서 하게 된 것도 이 테이블에서 웃고 떠들며 던진 손님의 한마디를 붙잡고 늘어진 결과물였다.
그렇게 남의집 레이다에 두명의 손님이 포착되었다. 이들을 끄집어 낸 것은 은재형의 등장 덕분였다. 야근하고 느즈막히 집에 돌아온 은재형이 뒷풀이에 참석했고 그를 손님들께 소개하며 "이 거실에 꽂힌 책들의 99%는 형책이에요."라고 하자 손님 중 한분이 "저기 제가 디자인한 책도 있어서 반가웠어요." 라며 책장 한구석에 놓여진 주황색 책을 가리켰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잡문집'였다. 이에 은재형은 깜짝 놀라며 '하루키 책을 디자인하셨다구요? 사인해 주세요.' 라며 금새 격앙되었고 갑자기 주제가 하루키로 넘어갔다. 이렇게 한명의 호스트 후보를 찜.
하루키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참으로 비논리적인 맥락으로 찌라시로 주제가 전환되었다. (어떤 맥락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들 포트와인에 취해 있었으니) 여행지에 가면 으레 그 동네 찌라시를 모아오는 것이 취미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은재형이 본인 방에 들어가더니 커다란 파일에 담긴 찌라시 더미를 두개 들고 와서는 "저두요" 라며 원하시면 전부 가져 가시라 권했다. 이에 격하게 반응하며 찌라시에 반영되어 있는 그 시대와 사회상에 대한 디자인 사조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두명의 손님이 남의집 레이다에 걸렸고 이중 한명을 호스트로 찜했다.
음, 남의집 바텐더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마지막에 엉뚱한 방향으로 마무리된 느낌이다. 실제로 이날 남의집도 이랬다. 아무렴 어떤까? 웃고 떠들며 현재의 내가 가진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낯선 사람을 만났다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남의집은 충분히 가치가 있을지니. 이날의 손님이 훗날 어떤 호스트로 돌아올런지 기대하시라!
뒷풀이를 모두 마치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0분. 월요일부터 새벽까지 달린 낯선 이들의 한주가 궁금했다. 다음에 책바에 가서는 꼭 진득하게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으로 남의집 바텐더를 마무리한다. 정인성 호스트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