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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ryme Feb 27. 2019

90년대생은 절대 모르는 물건  

때로는 물건에 담긴 시간을 사고 싶다 

일주일 도쿄 여행에서 하루를 꼬박 내 아키하바라를 뒤졌다. 한때 전자상가로 유명했던 아키하바라는 지금은 중고 휴대폰과 게임과 피규어 등을 주로 판다. 내 목표는 오로지 '아이와 카세트를 찾자'였다. 


질문1, 아이와는 무엇인가? (카세트란 무엇인가도 질문에 추가해야할까?) 


아키하바라를 가기 전 구글에 '아키하바라 워크맨'을 검색했다. 아키하바라에서 워크맨을 살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몇 년 전 나와 비슷한 질문을 누군가 했고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질문 2, 워크맨은 무엇인가? 

아키하바라는 '아키바'라고 줄여 부른다. @marryme.kam

1990년대생이라면 두 가지 (혹은 세가지) 질문에 답하지 못할 수 있다. 아이와(aiwa)는 일본 음향기기 브랜드고, 워크맨(walkman)은 일본 소니사에서 만든 음향기기를 통칭한다. 카세트는 테이프를 재생하는 기기다. 


1951년 설립된 아이와는 1960년대 소니와 기술 제휴를 했고, 2000년대 중반에는 아예 소니 자회사가 됐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제품을 내놓지 못해 파산 직전까지 갔고 소니에 인수됐다. 아름다운 스토리는 아니다. 이후 미국 회사에서 상표를 인수했다가 다시 일본 회사가 아이와 제품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작동하는 파나소닉 휴대용 씨디플레이어. CDP라고 불렀다. @marryme.kam

아이와는 한국에서는 저가 브랜드로 알려졌다. 내 성장과정을 기준으로 보면 제품 가격은 소니>파나소닉>아이와 순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학창시절 소니=워크맨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 첫 휴대용 카세트는 아이와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에서 3만원을 주고 샀다. 아키하바라에서 찾고자 했던 게 그 모델이다. 사실 모델명이 딱히 기억나지 않았다. 보급형으로 중국에서 저렴하게 만든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marryme.kam

특징은 두께가 2-3cm로 무지막지하게 두껍다는 것, 허리 벨트에 찰 수 있는 거치대(?)가 있다는 것, 라디오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이미 다른 친구들은 소니에서 나온 1.5cm 두께의 얇은 워크맨을 갖고 다녔다. 바지 속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였다. 대신 가격은 10만원대로 꽤 비쌌다. 


당시 나는 비싼 물건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아니었고 "시험에서 000점 맞으면 사달라" "방 청소를 하면 사달라" 같은 요구를 할 줄 아는 아이도 아니었다. 비싼 걸 사달라는 게 망설여지는 평범하면서 평범하지 않은 아이였다. 

위쪽에 있는 제품이 소니 워크맨, 아래쪽이 내가 찾던 아이와 카세트 @marryme.kam

마트에 장보러 가면 항상 음반 코너에서 테스트로 들어볼 수 있게 해둔 헤드폰 앞을 떠날 줄 몰랐다. 딱히 음악을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그 모습이 짠했던지 엄마가 3만원짜리 아이와 카세트를 사주셨다. 


그 카세트로 들었던 첫 테이프는 패닉 1집이었다. 오토리버스(A면에서 B로 자동 전환하는 기능)이 안되는 탓에 A면이 끝나면 손으로 직접 테이프를 꺼내 B면으로 돌려 들었다. 라디오도 좋아했는데 이 카세트로 처음 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은 '신해철의 음악도시'였다. 


그 뒤로 고장이 났던가 잃어버렸던가 하는 이유로 비슷한 카세트를 한 번 더 사고 씨디플레이어(CDP)로 넘어갔다. 

도쿄 아키하바라 거리 @marryme.kam

왜 갑자기 이 카세트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이제 들을 테이프도 없을 뿐더러 음악은 유튜브에 넘쳐나는데. 


아마 그 시절의 내가, 내 감정이 그리웠기 때문일 거다. 처음 가져본 나만의 음향기기가 너무 좋으면서도 왠지 다른 친구 앞에서 꺼내기 창피했던 그 마음. 모양이나 가격과 상관없이 그 카세트로 들었던 음악은 나를 성장시켰다. 


한편으로 좋은 걸 사주지 못하는 엄마 마음을 이제는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뭐가 될 지 모르지만, 음악에 재능있는 것 같진 않지만 쪼르르 마트에 따라와 음반 코너에만 있던 아이. 분명 더 좋은 제품이 있다는 걸 알지만 매달 빠듯했던 가계부에서 10만원이 넘는 돈을 갑자기 쓰기란 고민스럽지 않았을까. 


사실 그것보다 좋은 걸 사달라고 보채지 않는 아이가, 싼 물건을 사줘도 밤새 끼고 자던 아이가 안쓰럽지 않았을까. 다시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와서 꼭 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전자제품을 파는 아키하바라의 요도바시카메라 @marryme.kam

아키하바라에서 아이와 카세트를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국 하이마트 같은 빅카메라나 요도바시카메라에 몇몇 신제품이 있긴 하지만 전혀 모르는 브랜드였다. 이제 아이와나 소니는 단종돼 나오지 않는다. 


뒤지고 뒤지고 뒤지다 중고 제품을 파는 건물을 찾아냈다. 상인들에게 워크맨 사진을 보여주며 어디가면 찾을 수 있을 지 물어봤다. 

신삥(新品, 새 물건)은 아니고
츄코(中古, 중고 제품)라면 저기로 가봐.


내가 찾던 중고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던 가게 진열장 @marryme.kam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진열장에는 그 시절 내게 낯익은 카세트 플레이어와 CD플레이어가 꽤 많이 들어있었다. 


가격표가 있었지만 사실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베이나 아마존에 같은 제품이 더 싼 가격에 올라왔을 수도 있다. 바가지를 쓴대도 괜찮다. 내가 찾던 물건이 있단 것만으로도 지갑을 열 수 있었다. 


가게를 지키던 사장님은 캐캐묵은 카세트를 꺼내달라는 나를 신기해했다. 심지어 자꾸 아이와만 고집하는 걸 의아해했다. 아주 서툰 일본어로 "어릴 때 아이와를 써서 추억이 있다. 아이와가 소니보다 쌌기 때문에 부모님이 그걸 사주셨다"라고 했더니 이해한 듯 웃었다. 

아이와만 찾는 나를 신기해하던 사장님 @marryme.kam

사고 싶었던 아이와 카세트 몇 개와 워크맨을 골랐다. 학창시절에는 가져보지 못한 워크맨도 한 번은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고른 워크맨은 출시 당시에도 꽤 저렴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꽤 얇고, 껌전지(껌모양으로 생긴 얇은 건전지)가 들어가고, 오토리버스와 라디오가 되는 제품이다. 그때의 나였다면 또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

왼쪽은 일반 전지를 넣을 수 있는 배터리 케이스 @marryme.kam

사장님은 꽤 꼼꼼하게 테스트를 해서 제대로 재생이 안되는 제품은 판매하지 않았다. 재생은 잘 안되지만 수리할 때 부품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제품도 있었다. 그럭저럭 테스트를 통과한 제품을 샀다.


구식 카세트 몇 개를 사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주변에서 모두 신기하게 봤다. 물건의 가치란 쓰임새만이 아니라 추억(시간)의 값도 더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나 중고 물품은. 

매장 곳곳에는 나처럼 당장 사진 않더라도 물건을 보고 또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marryme.kam

카세트를 구한 뒤 도쿄 곳곳을 다니다가 카세트 테이프가 보이면 샀다. 테이프가 없으면 카세트를 들을 수 없으니. 맙소사, 가격은 개당 1만원을 넘어갔다. 새 제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아 중고 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갓 출시됐을 때도 1만원은 안했을 텐데. 


그래도 과감하게 몇 개 샀다. 전혀 모르는 일본 가수였지만 그래서 재밌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보니 의외로 노래가 좋았다. '차르르' 테이프 감기는 소리도 정겨웠다. 

나를 위해 산 첫 CDP @marryme.kam

한국으로 돌아와 내 첫 CDP를 꺼냈다.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 산 물건이다. 역시나 당시에도 신제품은 아니었다. 아마 적당한 금액에 맞춰 가장 좋은 제품을 샀을 거다. 버튼을 눌러보니 작동했다. 그때는 작동이 안돼 다른 CDP를 다시 샀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CD를 넣고 돌리는데 자꾸 잡음이 났다. 뚜껑 안쪽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슬쩍 추석 때 돈 주시면서 "CDP 사라" 하셨던 엄마.
사갖고 와서 정말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이리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사줄걸"하시던 엄마. 

때로는 물건에 담긴 시간을 사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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