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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sian Dec 31. 2020

손 끝에서 열린 하늘길을 따라서...

버진리버(Virgin River)로 비행하시겠습니까?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본 적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모르는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꿈. 머나먼 나라로의 여행이라면 비행기 티켓을 끊는 순간, 새롭고 찬란한 여정이 시작된다. 무지갯빛을 품은 비눗방울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는 설렘을 안고 말이다.  


출발하기도 전에 예약된 찐 행복의 그림들, 이젠 기약도 할 수 없을 만큼 멀어져 간다. 어디가 정점이고 끝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팬데믹 한복판에서 우린 각자의 갈망에 단추를 걸어 잠그고, 허용되는 만큼의 거리와 간격을 두고, 절제되고 단출한 아주 최소한의 삶 속으로 수렴하고 있는 나날들... 비눗방울은 곧 터지게 될 슬픈 운명임을 예감한 것일까.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과 불안에 잠식당한 암흑의 밤을 통과하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읽을거리 조차 눈밖에 나서 혼란스러워진 정신을 다독여줄 자연의 장엄한 풍광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숲이 빽빽하게 들어찬 곳, 한겨울 알싸한 찬 공기가 꾸깃해진 내면을 깨울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몸을 누이고 손 안의 작은 창을 붙들고서 버진리버(Virgin River)에 접속하는 순간이 내겐 그 낯선 세계로의 여행 티켓과도 같았다. 손끝 여린 터치 한 번에 지도에는 없는 가상의 공간, 캘리포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버진리버(실제로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밴쿠버에서 촬영됐다) 로의 여정이 시작됐다. 실제라면 한국에서부터 약 9,086km 거리(인천-캘리포니아 북부)의 비행, 세상 제일 편안한 내 방구석 침대 한켠에 몸을 묻고 손끝에서 하늘 길이 열린 것이다. 임상 간호사이자 조산사인 멜린다 멜 먼로(이하 멜, 알렉산드라 브렉켄리지 Alexandra Breckenridge)의 발걸음을 따라서.  






LA의 능력 있는 간호사 멜은 집도 팔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캘리포니아 북쪽 작은 마을 버진리버로 이사를 온다. 호프 맥크레이 시장(이하 호프, 아네트 오툴 Annette O'ttole)의 구인 공고에 응해 그 동네에 하나뿐인 병원에서 일을 할 계획으로 마을에 입성하는데...


차는 도랑에 빠지고, 1년간 머물 숙소는 이메일로 받아 본 사진과는 다르게 엉망진창 다 쓰러져가는 헛간 수준이다. 그녀 앞엔 웰컴 드링크는커녕 얼렁뚱땅 그 상황을 넘어가려는 호프와 낡은 오븐 속에서 나온 먼지 퀴퀴 쌓인 새 둥지가 전부다. 이곳이 지상천국이라던 호프의 립서비스가 무색하게도 시골 촌구석 버진리버의 첫인상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첫 출근은 더 가관이다. 꼬장꼬장 고집스러운 70대 의사 버넌 멀린스(이하 버넌, 팀 맨더슨 Tim Mantheson)은 간호사 멜을 자신의 병원에 들일 생각이 없다. 어쩐지 버진리버의 이방인을 맞이하는 방식이 여전히 썩 아름답지 않다. 그녀로선 계약 조건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만족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 LA로 돌아오라는 언니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서야 결국 눈물샘이 터지고 마는 그녀. 선택해서 왔지만 낯선 세상에서 던져진 외톨이가 된 기분에 사로잡혀 간신히 붙들고 있던 감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시즌 1 첫 회, 첫인상을 잠시 그려보았다. 어서 와, 도시 아가씨. 이런 시골 촌 구석은 처음이지? 버전을 보는 건가 싶게 버진리버는 그녀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듯 보인다. 제정신이라면 벌써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야겠지만 쉬이 그럴 그녀도 아니다. 멜은 어릴 적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다 남을 돕고 싶다는 일념으로 간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해 병원과 응급센터, 국경 없는 간호사회 등 여러 의료 현장에서 무수히 많은 경험을 쌓은 내공이 있기에 어떤 일에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단단하고 강인한 내면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


# 관전 포인트 1 - 그녀의 이름은 멜.


그렇다, 난 이 여자에게 끌렸다.

2019년 12월 첫 시즌을 보인 이 <버진리버>를 올 가을 무렵에서야 처음 만난 나는 이 멜이라는 여자에게 강력하게 끌려 정주행을 마치고, 운이 좋게도 애타게 기다리는 인터미션 없이 곧장 시즌 2막까지 달려왔다. 평소 범죄, 공포, 누와르, 스릴러 장르에서 보이는 거친 폭력과 피를 부르는 영상물과는 담을 쌓고 살다 보니 핫하다는 인기작도 못 누려보고 지나치고 마는 개인적 취향 탓에 나의 해쉬태그는 언제나 드라마, 가족, 로코, 휴먼 다큐처럼 안온한 울타리 안에서 맴돈다. 한 인물의 내밀한 서사가 회차를 거듭할수록 잔잔하게 스며드는 흐름 자체를 선호하기에 <버진리버> 역시 취향의 관성이 이끄는 대로 가닿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올곧은 나무숲의 짙은 녹음과 평화로운 강줄기의 흐름을 감상하며 코로나 블루에 꾸깃해진 마음을 달랬다면, 그다음엔 플롯의 중심에 선 멜의 이야기를 따라 자연스레 감정이입의 모먼트에 깊이 몰입되었다. 매회 에피소드를 거치는 동안 멜은 철저한 프로의식에 준해 의학 지식과 전문성을 드러내는데 물러서는 일 없이 책임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매사 똑 부러지게 원칙대로 일하는 멜을 차가운 도시녀를 상징하는 객체로 바라보며 “여기 버진 리버 사람들은 말이야, 너와는 달라”라고 말하며 ‘라테는 말이야’ 꼰대 마인드로 으름장을 놓았던 버넌도 점차 멜의 실력과 인성에 감복하며 인정을 하게 된다.


시시때때로 그녀는 파편처럼 흩뿌려진 아픈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아물지 않은 상흔과 상실감을 직면하며 슬픔에 젖는 멜. 자신의 감정과 이야기를 드러내기까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함을 손에 낀 반지가 대신 말해주고 있다.



마음은 아프지만 더는 슬픔이
모든 걸 지배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녀는 칫솔질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과 슬픔에 지배당했던 깊은 심연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암흑같은 터널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경험을 용기가 필요한 이에게 털어놓고,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슬픔이라는 병이 있음을 인지하게 하며, 스트레스받고 화난 사람들 상대하는 게 익숙할 정도로 강단이 있다. 그만큼 그녀의 내면은 견고하고 부러짐이 없다. 제 할 일을 하며 제 목소리를 내고 주어진 눈 앞의 일들을 성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정하게 풀어나간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훑고 지나간 상처 이면의 깊이까지 헤아릴 줄 아는 안목까지,배역에 딱 어울리는 공감력과 깊이 있는 연기력이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



#관전 포인트 2 - 그의 이름은 잭.


산자락 숲 속의 해거름은 일찍이 찾아오고 눈 깜짝할 새에 짙은 어둠의 커튼이 드리운다. 멜이 버진리버에 도착한 첫날밤이 그러했다. 호프가 널브러진 산장의 숙소를 정리하는 사이 요기나 하러 다녀오라고 등 떠밀듯 알려준 그곳엔 노란 불빛의 잭의 바가 있었다. 이방인의 첫날,  그 헛헛한 마음을 달래준 건 위스키, 잭의 동료 셰프 프리쳐가 건넨 호박과 렌틸콩이 들어간 수프, 그리고 스스럼없이 말동무가 되어준 잭 셰리든(이하 잭, 마틴 핸더슨 Martin Hendrrson)이다.


“힘내요(hang in there)” 만난 지 하루 만에 단 세 마디의 손글씨 카드와 따뜻한 음료가 든 텀블러를 바구니에 담아 건네는 센스를 발휘하며 여심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고, 강가에서의 아침 산책을 자연스레 권하는 이 남자... 너무 작업 속도가 빠른 것 아닌지 뻔한 클리셰가 보일 법도 하지만 정색할 정도는 아니다. 전직 해병대 출신인 잭은 전장에서 부하를 잃은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자책감에 시달리면서도 회차를 거듭할수록 벌어지는 각종 사고 사건의 현장마다 멜 옆을 든든하게 지키며 그녀를 더 깊이 알아가게 된다.



가지 말아요.
당신과 함께 있는 게 익숙해졌어요.
당신이 떠나면 보고 싶을 거란 거예요.



3회 만에 멜에게 고백체 진심을 전하는 잭. 그는 본인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엄연히 현재 진행 중인 연애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때문에 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여지를 남기는데. Mr. 애매모호 씨 잭과 멜이 서로에게 어떻게 스며들게 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와 교차되는 감정선의 변화도 버진리버를 관통하는 관전 포인트 이리라.


온 마을 사람이 오고 가는 잭의 바는 버진리버의 핫플로서 마을 커뮤니티의 중심축에 있다. 미드 <길모어 걸스>의 모녀 로렐라이와 로리를 먹여 살리고, 스타즈 할로우 동네 사람들의 방앗간 격인 루크의 식당이 오버랩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의식의 흐름이다. 루크의 식당이 달콤 고소한 머핀과 짙은 커피 향으로 가득한 캐주얼하고 밝은 브런치 카페라면, 잭의 바는 (물론 커피도 있지만) 어른이들을 위한 좀 더 짙은 위스키 향의 무게감에다 산지 직송 재료가 어우러진 건강 레시피를 추구하는 바를 겸한 레스토랑이다. 폭우가 내려 마을의 전기가 끊기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장소가 되고, 그런 날엔 단조로운 일상의 풍경을 뒤집듯 훈훈한 집단 에너지에 마음을 기댈 수 있다. 작은 동네가 늘 그렇듯 때론 선을 넘는 오지랖과 험담이 뒤섞이는 곳이기도 하다. 바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고, 오해의 실타래를 다시 풀어가는 대화의 시간들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우리의 삶을 은유하고 있다.




#관전 포인트 3 - 버진리버의 사람들


시즌 1을 지나 시즌2에 이르며 우리는 버진리버에 완전히 정착한 멜을 만날 수 있다. 그녀는 마을 축제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 정도로 표정도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이제는 온 마을 사람이 멜을 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물론 인터넷과 와이파이는 느려 터지고 소문이 가장 빠른 건 여전하다. 이렇듯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익숙함이 자리하고, 사람들 사이엔 신의로 연결된 가족애와 내밀하게 흐르는 온정을 주고받는다. 역할의 크고 작음과는 상관없이 이 작은 동네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혈류는 바로 버진리버의 사람들이다.


시장인지 동네 반장인지 헷갈릴 정도로 오지라퍼의 전형을 보여주는 호프, 사실 그녀가 있어 알게 모르게 버진리버 산골 촌구석이 돌아간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안다. 프로의식이 너무 투철한 나머지 오해와 오해로 뒤엉킨 실타래를 스스로 풀어야 할 때를 직면하긴 하지만. 그녀의 옆에서 20여 년을 함께하며 병원을 지켜온 의사 버넌도 잭의 바에서 만나면 평범한 옆동네 할아버지가 따로 없다. 오랜 인연을 맺고 이어진 이 둘의 관계는 삶의 황혼 녘 어딘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편 유명 셰프 못지않은 실력을 둔 출중한 요리력의 프리쳐(잭의 군복무시절 동료), 어린 아들을 돌보며 트럭 베이커리 일을 하는 페이지, 너무 인정이 넘치다 못해 과한 오지랖을 자랑하는 코니, 멜의 진심 어린 도움으로 산후 우울증을 이겨내려 결심한 릴리, 사랑인 줄 알았던 잭으로부터 결정적인 순간 이별을 당한 샤메인 등 저마다 비밀과도 같은 각자의 이야기와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물론 이 외에도 갈등과 대립각을 세우며 드라마 극 전개에 꼭 필요한 높고 낮은 텐션의 등고선에 자리한 인물과 에피소드도 준비되어 있으니 너무 그렇게 무료한 감성 로맨스물이라고 몰아붙이진 않아도 될 듯하다.



게리 채프먼에 따르면 사랑에는 다섯 가지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 인정하는 말(Words of affirmation)

- 함께하는 시간(Quality Time)

- 선물(receiving Gifts)

- 봉사(Acts of Service)

- 스킨십(Physical touch)


비단 연인의 사랑에 한하지 않고 인간관계에 확장하여 적용한다면, 이 다섯 가지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고리를 좀 더 부드럽게 이어주는 메시지로 충분히 비유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이 다섯 가지 중에 ‘인정하는 말(words of affirmation)’에 감정의 촉수가 반응하는 나로서는 <버진리버>의 인물들의 입술이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잔잔한 위로를 많이 받았다. 곁에서 감정의 결을 쓰다듬어 주는 말이기도 했고, 때론 애정 담긴 잔소리이자, 사각지대에 가려진 스스로를 바로 보게 하는 따끔한 충고이기도 했다.



자기 마음을 보호하려고만 하면,
고통을 피할 수 있어요.
하지만 결국 반쪽 인생을 살게 되죠.
_ 호프



엄마 대신 자기를 돌봐준 멋진 간호사
선생님이 준 이름이란 걸 알려줄게요.
_ 릴리



날 위한 새로운 고향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_ 잭
내일을 버텨낼 유일한 방법은
평소처럼 지내는 것 같아요.
1년 전 오늘 모든 게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했죠.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요.
_ 멜






그 어느 때보다 연결을 원하지만 적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해야 하는 지금, 이전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 자유로운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 2020 한 해였다. <버진리버> 스토리에 담긴 달빛 무도회(시즌1)와 마을 축제(시즌2) 신은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장면이란 걸 알면서도 지금 우리는 누릴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욱더 비현실적인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적요한 깊은 밤,

무해한 감성의 힐링 드라마를 원한다면 적극 추천한다. 회를 거듭할수록 서서히 스며드게 될 것이다.


시즌2를 마무리할 무렵, 비슷한 시기에 펼쳤던 리베카 솔닛이 쓴 [멀고도 가까운] 의 한 구절에서 <버진리버>에 나온 멜의 시점을 덧입혀 문장을 읊어보았는데 묘한 일치감이 느껴졌다.


콜로라도 강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변화의 힘들을 강하게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강은 거대하고 힘차고 곳곳이 위험했으며, 흐르는 물살은 마치 흐르는 시간 같았다. 나는 내 삶의 구체적인 것을 뒤로한 채 삶 자체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 p.366중에서


넘어가지 않을 듯 보이던 슬픔이란 거대한 페이지를 겨우 넘기고 마주하는 현재가 멜에게도 그러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시즌 2를 끝으로 풀어가야 할 이야기가 짐짓 무겁게만 보이지만, 연이은 시즌 3 확정 소식에 더욱더 기대가 되는 드라마.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1년은 꼼짝없이 긴 기다림의 시간이 예고되어 있다. 하루빨리 모두의 염원대로 최소한의 삶에서 벗어나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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