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l Aug 06. 2019

빛나기보다 빛을 담은 사람이 되길

정체성을 입다, 패션힐러 최유리 작가와의 만남 이후

나는 아마 타고난 해외여행 체질일지도 모르겠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며칠을 앓은 두통 치통 생리통도 약 먹은 듯 사라지고 끙끙 앓던 감기도 말끔하게 사라진다. 불면증이 없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시차 적응도 필요 없다. 도착하는 순간부터 현지의 시계에 완벽히 적응해 먹어야 할 시간에 세 끼를 먹고 자야 할 시간에 잠든다. 자정까지 돌아다니다 무거운 두 다리를 끌고 숙소에 도착해도 다음날 아침이면 새로 태어난 듯 공장 초기화되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소화불량 따윈 없다. 새로운 환경의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음식과 새로운 거리. 발을 디딘 장소와 완벽하게 무관한 사람, 아무도 아닌 사람(nobody)으로 머무르는 건 나의 엔도르핀을 끊임없이 샘솟게 한다. 한국땅에서 역시 노바디인 건 마찬가지면서 무슨 셀럽이라도 되는 것 마냥, 이놈의 마음이란 내 원 참 웃기고 앉아있다.



2018년 발리 (드레스-2013년 마닐라 구매)



뻔뻔한 마음이 제일 잘 드러나는 건 패션에서다. 특히 여름나라에서 그렇다. 추워서 꽁꽁 싸맬 필요도 없고 땀에 전 옷을 하루에 몇 번이고 갈아입어야 하는 데다 적당히 사 입어도 가을 겨울 옷보단 싸다. 잡지에서 보아온 해외 스트리트 패션 같은 걸 뻔뻔하게 시도해보기 딱이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 아무도 없다.



배꼽 보이는 크롭탑을 입어도 아무렇지 않고, 옆구리가 뻥 뚫려 속옷이 보여도 ‘응.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어 진다. 옷이 짧든 길든, 몸에 붙던 여유롭던, 다리가 길어 보이건 아니건, 가슴골이 보이건 말건 전혀 상관없다. 이런 나라에선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 액세서리도 참으로 다양하다. 훌라춤을 춰야 할 것만 같은 꽃 목걸이부터 파라오의 금빛 찬란한 팔찌, 동네 애들이 공기놀이할 것만 같은 돌 귀걸이, 할리우드 대스타만 소화할 법한 거대한 귀걸이 등 이것저것 사서 칭칭 감아본다. 액세서리를 잘 쓰는 사람이 멋쟁이라 하였으므로 합리적인 시도라 합리화하면서. 이번을 계기로 한국에 가서도 멋쟁이가 되어보겠다 다짐하면서. 패셔니스타로 탄생할 나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니 가급적 이런 모습의 사진은 남겨두지 않는다.



그리고, 혹시나는 역시나로 이어진다. 슬픈 예감은 틀린 법이 없다. 공항 입국장에 마중 나온 나의 소심이. 이 녀석은 마중을 거르는 법이 없다. 소심한 자아는 귓가에 소곤소곤 말을 걸어온다.



‘옆에 사람들 보이시죠? 그렇게 다니면 사람들이 흉봐요. 저기… 파라오세요? 할리우드 대스타세요? 그건 대체 무슨 스타일이시죠? 그런 건 전 세계에 단 한 번도 유행한 적 없는 거 아시죠? 미래에서 오셨어요? 아님, 청동기 시대? 미스 모글리신가요? 저기... 말입니다, 이러지 마십시다. 왜 그래요, 왜.’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삶의 공간으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한없이 작아지며 곁눈질을 시작한다. 결국 여행지에서 새로운 내가 되어 입었던 옷과 액세서리는 결국 기념품이다. 언젠가 다시 여행을, 혹은 호텔 패키지 같은 여행 비스름한 거라도 가야 한 번 입을까 말까다. 엔도르핀을 장착한 미래 패셔니스타는 그렇게 어두운 옷장 제일 구석에 착착 걸린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 할머니가 잡아 준 매미도 그랬다. 방금 전까지 맴맴 울다가 내가 알코올을 주사기로 찔러 넣는 순간 그대로 굳어져 착착 정리됐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곤충채집에 이어 옷 채집을 하고 있는 건가. 여름나라의 옷을 썩지 않게 보존하며 표본을 만드는 건가.






팔찌 - 2014년 프놈펜 시장 구매




"좋아하는 게 여기 다 들어있네요."



내 액세서리 꾸러미를 살피던 그녀가 말했다. 우린 사실 어색한 사이, 어느 행사장에서 만나 잠시 머물렀을 뿐 따로 차 한 잔 한 적도, 깊은 이야길 주고받은 적도 없는 서먹한 사이지만 패션 컨설팅이라는 구원의 손길을 나는 덥석 잡아버렸다. 내 옷장을 열어 보이고 고민스러운 여름 옷가지들을 입어 보였다. 구제불능, 회복 불가 판정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마음 한 구석이 아슬아슬 찌릿찌릿 간질간질했다. 그러나 한 편으론 편했다. 깊은 고민은 때론 잘 아는 사람보다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을 때 편하기도 하다.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실망하지 않을까, 어차피 알던 사이가 아니면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줘도 괜찮다.



덕분에 동남아 태생의 내 조개껍데기 목걸이와 팔찌들이 오랜만에 꾸러미 밖으로 나와 숨을 쉬었다. 샛노랑 파라오 목걸이, 자개 꽃목걸이, 불가사리 변신 팔찌, 우가차카 우가우가 팔찌 등이 지퍼락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중엔 여름날 잘 차고 다닌 팔찌도 있다. 이 팔찌는 어떤 건가 물으며 관심을 표하니 나도 모르게 격하게 호응해버렸다. 이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거라고. 그러자 그녀가 물었다. 왜 이 팔찌가 좋은지. 나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 훅 들어오자, 정돈되지 않은 그간의 느낌을 두서없이 늘어놨다.



반들반들하고 납작한 돌멩이라 느낌이 편안하다. 팔에 차도 자국이 안 남는다. 은근히 알록달록 귀여운데 색감이 튀진 않는다. 자연스럽다. 다른 팔찌를 레이어드해도 나쁘지 않다 등등.



내가 좋아하는 찻잔, 팔찌와도 닮았다




내 설명을 가만히 듣던 그녀의 말은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가 여기에 실려 있다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하다가 내 옷장과 살림을 가만히 떠올려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편안함, 자연스러움, 부드러움. 어딘가 바랜듯한 색감까지. 내가 좋아하는 그릇에도, 그 날 내보인 옷과 장신구에도 이 요소들이 담겨 있었다. 아아, 이 팔찌가 그래서 좋았구나. 맞다. 모든 건 다 연결돼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패션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좋아하는 요소들이 어딘가에서 꼭 드러난단다.



미팅이 끝나고 왠지 보물 같은 느낌에 팔찌를 화장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았다. 순간 머릿속에 그림이, 정확히는 그 그림이 내 눈앞에 펼쳐지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Claude Monet, Water-Lilies, after 1916, oil on canvas (NG6343)




모네의 수련, 그중에서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사실 수련 시리즈 하면 떠오르는 대부분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데, 오벌형의 전시관에 둥근 벽을 따라 그림을 전시해두었다. 곡선을 따라 걷다 보면 그림 속의 버드나무도, 육교도 만나게 된다. 그러다 잠시 멈추고 어느 의자에 앉아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요한 새벽, 지베르니의 정원을 산책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수련에는 사실 연꽃도, 육교도, 나무도 모두 뭉개지고 뿌옇게 흐리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언제쯤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이 그림 앞에 무너졌다. 저 안에 깊은 무언가가 울컥하고 넘어왔다. 직장에서의 갈등으로 우울증 비슷한 걸 앓다가 퇴사를 결심하고 마지막 남은 휴가를 탈탈 털어 쓴 여행이었다. 내 부모에게도, 형제에게도, 연인에게도, 친구에게도, 나를 상담하던 의사에게도 보이지 못한 마음 저 구석의 무언가가 이 앞에서 터져 나왔다. 나 스스로도 살피지 못한 어떤 감정이 형태를 알 수 없는 이 뿌연 그림 앞에 주체할 수 없이 솟구쳤다. 벽을 가득 메운 커다란 그림 구석구석 시선을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빛이 나를 다독였다. 지는 해의 길고 느린 빛이, 주위를 감싸 안는 은은한 빛이,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따스함이 온몸에 전해졌다. 괜찮다고. 그래, 괜찮다고.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빛나는 사람이 되기보단 빛을 담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꼭 주목받지 않아도 조용히 가만히 머무르며 작은 목소리로 밝게 말하고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어도 충분하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 저 편 모네의 그림이 내 팔목을 감싼 돌멩이 묶음 속에 잘도 들어 있었다. 어쩌다 골랐고, 어쩐지 자주 쓰던 팔찌 안에, 그녀의 말대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다 들어 있다.














오랜만입니다.


그 사이 첫 책 <먹고마시고그릇하다>는 2쇄가 나왔습니다. 밥도 빨리 못먹는 저는 뭐든 적응하는데도 오래 걸리는데, 책이 나온지 3년이 다 되어서야 작가라는 호칭에 쑥쓰럽지가 않아졌어요. 연인과 결혼을 한 지는 2년이 훌쩍 지났는데, 이번 여름에 접어들어서야 둘의 일상에 익숙해진단 느낌이고요.


책이, 이렇게 느린 작가를 닮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또 한편으로 책은, 작가만의 것은 아니기에 조금 더 빨리 반가운 소식 전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저로선 언제나 무한히 감사합니다. 만만치 않은 출판업계에서 살아남은 건 다 찬찬히 살펴주신 독자분들과 애정을 쏟아주시는 다정한 출판사 덕분입니다. 참, 좋은 책들을 골라 소개해주시는 전국의 책방 관계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은 책 '오늘 뭐 입지?'를 쓰신 패션힐러 최유리 작가님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브런치 작가로, 패션 유튜버로, 각종 강연장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패션 스타일링을 하고 계세요. 작가님은 작년 브런치 작가들을 초대하신 JTBC4 론칭 행사장에서 뵌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인스타그램 친구가 되어 사는 이야기를 서로 살피게 됐습니다. 이번에 다이아TV에 '너의 옷장을 열어봐'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신다기에 제가 (용기무쌍하게) 1,2화 옷장주로 출연하게 됐습니다. 횡설수설 떠들어대서 제가 쓸만한 영상을 만들긴 한걸까 걱정입니다만, 잠자던 옷을 살리는 작가님의 센스와 누구나 적용하기 쉬운 패션의 법칙은 눈여겨 보셨으면 좋겠어요.


방송은 8월 17일, 이후 영상은 유튜브에서 살펴보실 수 있다고 합니다.

확인하는대로 인스타그램에 소식 남길께요.



https://www.instagram.com/yulhee_own/


작가의 이전글 나중엔 변명이 될 나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