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에미레이트 연합의 아부다비와 두바이, 그리고 오만의 니즈와 방문기
지나간 후에야 깨달음이 온다.
두바이 공항 출국장. 한 남자가 무겁게 짐을 쌓은 카트를 밀며 지나간다. 목젖부터 발목까지 굵은 선으로 떨어지는 새하얀 칸두라에 단정하게 기른 검은 수염이 잘 어울린다. 보기 드문 미남이다.
뒤에 오는 여자는 검정 천으로 몸을 덮었다
하나
둘
셋
세 여자 모두 드러나있는 건 두 눈뿐이다. 마지막 여자의 얼굴이 잔상으로 남는다. 크고 깊은 흑갈색 눈과 시원한 콧날. 아바야와 니캅으로도 미처 다 가려지지 않는다. 엄청난 미인이다.
공항 수속 줄이 길어 걸음을 재촉한다.
하나
둘
셋
아. 저 남자 부인이 셋이구나.
갑자기 그 남자가 더 훤칠하고 더 잘생겼었던 것으로 기억이 조작된다. 그래서 그렇게 짐이 많았구나. 그래서 서로의 등만 보고 걸었던 걸까. 일행이 넷인데도 재잘거림 없이.
몇 년 전 7월의 두바이가 나의 첫 중동 방문이었다.
한낮 기온이 45도까지 올라갔다. 길가에 걸어 다니는 미친놈은 나뿐이었다. 사람들은 초대형 쇼핑몰을 짓고 그 안을 어슬렁거렸다. 해가 져도 35도 밑으로 떨어지질 않았다. 공원은 있었지만 산책을 할 순 없었다. 샤워기를 틀면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왔다. 차가운 물이 나오길 기다려봤지만 기별이 없었다. 결국 땀을 뻘뻘 흘리며 샤워를 했다. 이럴 거면 안 씻는 게 낫지 않나. 옅은 락스 냄새가 나는 호텔 타월로 땀인지 뭔지 모를 것들을 닦으며 다짐했다. 이곳에서 살아남은, 심지어 번성했던 문명이라면 그 관습이 뭐든 무조건 존중한다.
아 대신 에어컨 안 틀고 낙타 타고 다녀야 함ㅇㅇ
UAE 에도 20:80 법칙이 적용된다.
검은 황금을 깔고 앉은 20%와, 그들을 섬기는 외노자 80%. 필리핀, 스리랑카, 네팔, 파키스탄, 인도, 잠비아, 케냐 등등 전 세계인을 끌어당기는 블랙 골드 러시다.
국경을 넘어 여행하면 그 나라 특유의 영어 억양에 익숙해지는 데 사나흘정도 걸린다. 이곳에서는 2주 내내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각국의 영어가 한 도시에 모여있었다.
나는 그 나라 인사말을 한 두 마디 익혀서 마치 현지에 잘 녹아든 척 뽐내는 걸 좋아한다. 아살람 알라이쿰(السلام عليكم)도 준비했지만 쓸모없었다. 어차피 이들의 모국어는 아랍어가 아니었다.
여행 기간 동안 아부다비 뉴욕캠퍼스 바로 옆에 있는 친구집에 얹혀 지냈다. 그 반경 1km는 뉴욕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깔끔하게 다린 아랍 전통 의상들이 섞여 있는 것. 동네 커피샵에 가면 검은 히잡을 둘러쓴 여대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트북을 켜고 조과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모임도 성별 나눠서 하나?)
전액 장학금은 물론 분기별 비행기표에 온갖 지원금까지, 아부다비가 돈을 뿌려주는 덕분에 국적불문의 수재들이 다 이곳에 모인다고 했다. 검은 황금을 농축시켜 만든 인재 블랙홀이었다.
이번 여행은 나와 내 애인과 나의 엄마, 동생이 함께했다. (그렇다. 나는 와이프 셋 딸린 이슬람 상남자 뺨치는 K장녀다.) ‘딸과 여행 갈 때 엄마들 금지어 십계명’ (예를 들어 ‘달다, 짜다’ 금지. ‘이거 젊은애들이나 하는 거 아니니’ 금지 등등)을 숙지하신 어머니께서는 이번 여행에서 말수가 부쩍 적어지셨다. 그럼에도 하신 말씀으로 우리의 아라비아 여행을 돌아볼 수 있다.
여기 루브르 볼 게 없다. 파리 루브르가 훨씬 낫다.
어머니는 당신께서 파리 루브르에까지 다녀온 교양인(?)이라는 것을 은근히 누르며 말씀하셨다. 그 교양이라는 것을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돈 싸 들고 파리로 날아드는 것이리라. 아부다비도 그래서 엄한 남의 나라 미술관을 통째로 들여왔을 것이다.
문화 강국이란 무엇일까? 이슬람 문화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찬란하고 오늘날까지 수억 명의 삶에 녹아있는 최강 문화 아닌가? 프랑스 인들이 초승달 깃발을 휘날리는 군대에 짓밟히고 정신승리를 위해 만들어 먹은 빵이 크루아상 아니던가? 문화 약국이란 무엇인가?
나는 생업을 위해 루브르에 들어가진 못하고 인근 카페에서 일을 했다. 루브르는 건축물만 봐도 예뻤다. 진짜임 정신승리 아님 그러나 바로 옆에 공사 중인 건물이 구겐하임 박물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나라가 처절한 문화 약국이라는 걸 깨달았다. 테마 파크 만들듯, 혹은 수제비 만들듯 아무렇게나 뚝뚝 끊어 납작하게 눌러 던진다는 게, 구겐하임의 못다 올린 철조 기둥들이 문화 약국의 수치심처럼 보였다.
어머니께서는 또한 이재용 이하 한국의 재벌 총수들이 두건 두른 아랍 왕자 앞에 도열했던 걸 애달파하셨다. 조 단위도 아니고 백조 천조 단위로 돈을 뿌리니, 옆집 새 이름도 아니고, 재벌 총수가 별 건가? 일국의 제왕들을 도열하게 하는 검은 황금의 힘, 그 힘을 가지고도 어쩌지 못하는 조바심이 애달팠다.
루브르에 아랍의 미를 주제로 한 전시가 있었다면 나는 생업을 내팽개치고 루브르에 들어갔을 것이다. 바람에 흐르는 모래줄기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곱게 맞춰 입은 칸두라와 터번의 뒷모습에서, 직선이 아니라 반원을 그리는 분수에서, 끝이 휘어진 칼자루에서, 고이 접어 나빌레는 아바야 자락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아랍의 아름다움이 궁금하다.
모래 위를 걷기 힘들다
이건 진짜다! 진짜 힘들어! 갯벌보다 쉽고 설원보다 어렵다. 그리고 뜨겁다! 모래 위에 발을 디디자마자 아랍 전통옷의 숭고함을 깨닫고 스카프를 뒤집어썼다. 그래도 이틀 동안 몸에서 모래가 나왔다. 당시에 입었던 외투 주머니에서는 아직도 모래가 나온다. 덕분에 나의 휴대폰은 한 달째 모래투성이다. 이거 수입산이야
우리가 갔던 리와 사막은 Empty Quarter(Rub’ al Khali), 아라비아 반도의 1/3을 차지하며 사우디 아라비아, UAE, 오만, 예멘을 가로지르는, 가로 500km, 세로 1,000km에 달하는 거대한 사막의 일부였다.
나는 사막이 모래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바다와 더 비슷했다. 바람이 모래알을 쉼 없이 나르는 덕분에 모래 언덕들은 계속해서 살아 움직였다.
나는 대형 SUV에 물과 기름을 가득 싣고 온갖 보험에 가입한 후 사막으로 들어섰다. 차에 내려서도 차와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신경 썼다. 그럼에도 사막은 막막했다. 걸어도 걸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아까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래들의 첩첩산중. 망망대해. 경관이 바뀌지 않으니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내가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게 맞나? 스무 걸음 걷고 쉬고, 또 스무 걸음 걷고 쉬었다. 물이 끝없이 켰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되는 곳. 때는 2월의 한겨울이었지만 땅과 하늘의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나 해가 지고 나면 모닥불을 피워도 한기가 돌았다.
포트폴리오 리밸린싱을 하는 방법은
새롭게 현금 100만 원이 생겼다고 가정하고, 이를 어디에 투자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 투자처가 이미 내가 들고 있는 자산과 다르다면, 리밸런싱을 해서 중심을 다시 잡아야 한다. 관성은 투자 조언이 될 수 없다.
비슷하게, 취준생 시절 항상 막막했던 자소서의 ‘지원 동기’ 항목은, 사실은 면접관들의 ‘계속 회사 다니는 동기’ 보다 중요할 수 없다. 나는 면접에 갈 때마다 그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온순한 신입사원의 자질을 보여주기 위해 꾹 참았다. 어차피 떨어질 거 물어보기나 할걸.
그렇다면 내가 사는 곳도,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삶 속에 죽음이 있는 곳’. 절대로 사막에 살고 싶진 않다.
발 밑에서 황금이 발견되기 전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문화대혁명 이전의 아라비아가 궁금하다. 그 아름다움도, 생명력도, 2025년에 들여다본다고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또 와봐야겠다.
사막에서 나는 문명 속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자유를 발견했다. 필수가 아닌 모든 것은 짐이 되는 삶,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삶. 그러한 환경 속에서 필연으로 맺어지는 동료애, 그리고 평온함은 바로 여기 있다는 믿음. 나는 고난에서 오는 만족감과 금욕에서 피어나는 기쁨을 배웠다. 그것은 배부름이 주는 만족감, 육향의 풍부함, 깨끗한 물의 맛, 잠에 대한 갈망이 고문이 되었을 때 체념이 주는 황홀감, 그리고 서늘한 동틀 녘 불꽃이 주는 따스함이었다.
- 절대를 찾아서, 윌프래드 세시저 (1959)
In the desert I had found a freedom unattainable in civilization; a life unhampered by possessions, since everything that was not a necessity was an encumbrance. I had found, too, a comradeship inherent in the circumstances, and the belief that tranquility was to be found there. I had learnt the satisfaction which comes from hardship and the pleasure which springs from abstinence: the contentment of a full belly; the richness of meat; the taste of clean water; the ecstacy of surrender when the craving for sleep becomes a torment; the warmth of a fire in the chill of dawn.
- Arabian Sands, Wilfred Thesiger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