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보고타 > 메데인 > 코스타리카 타마린도 > 하꼬 > 미국 뉴욕
콜롬비아 사람들은 인사에 진심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우다다 달려가 안길 때처럼 진한 포옹을 한다. 다 큰 어른들끼리.
중미에 비하면 북미 양키들의 포옹은 인사치레다. '오우 우리는 만나서 악수가 아니라 포옹을 하는 사이지. 우리 참 격의 없지?' 보여주기 식이다.
보고타 사람들은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나도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들이다. '난 너가 좋아! 이리 와, 우리 서로 꼭 안아주자!' 라며 꼬리를 흔든다.
보고타 생활 2주 차, 현지 친구들에게 '나 이제 너네의 꽉 안아주는 인사에 익숙해진 것 같아'라고 말했다. '원래 볼에 뽀뽀도 하는 거 알지?'라는 답이 왔다. 잠깐 상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난 안될 것 같았다. 한 번만 살려주십쇼 '응 나의 빈약한 아시안 심장을 배려해 줘서 고마워'라고 했다.
해발고도 2,600미터에 있는 보고타는 도시 전체가 한라산 꼭대기 (1,950m) 보다 높이 있다. 적도 부근이라 계절이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니라 비가 많이 오는 계절과 조금 오는 계절로 나뉜다. 날씨는 고도가 결정한다. 보고타는 일 년 내내 한국의 가을 날씨다. 해발고도 1,500미터로 보다 따뜻한 메데인은 '영원한 봄의 도시(La ciudad de eternal primavera)'라고 불린다.
콜롬비아는 모든 걸 가졌다(Colombia lo tiene todo). 안데스 산맥이 동, 서, 가운데 세 갈래로 나눠지는 곳이자, 남쪽에는 아마존 정글이 있고, 북쪽에는 별이 잘 보이는 사막이 있으며, 태평양과 카리브해 두 바다를 끼고 있다. 환태평양 화산대에 걸쳐 있는 안데스 산맥에 걸쳐있는 덕분에, 활화산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대신 화산재 섞인 비옥한 토양을 자랑한다. 추수철도 따로 없고 연중 내내 온갖 기후별 온갖 과일과 농작물이 하늘에서 떨어진 땅에서 솟아오른다.
패션후르츠가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 또 찾아먹기 위해 '마라꾸자(Maracuya)' 라는 이름을 외워두었는데, 다음번에 먹은 맛있는 패션후르츠는 이름이 '그라나디자(Granadilla)' 였다. 알고 보니 패션후르츠 가족에는 스물몇 종이 있다고, '빅 패밀리'라고 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굶어 죽을 걱정이 없는 곳. 강아지 부족이 사는 곳이다.
보고타 엘도라도 공항의 유리문을 나서는 순간, 마주한 도시의 멀끔함에 나는 당황했다.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어디 있는가? 고층 빌딩과 고가 도로, 화려한 그라피티와 우락부락한 오토바이들이 보였다. 기관총 소리나 수류탄 터지는 소리는 없었다.
메데인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 내내 경치가 좋았다. 거대한 자연과 그 등허리 비탈에 자리 잡은 인간들의 도시가 한눈에 보였다. 노란 택시 차창에 코를 박고 바라봤다. 녹음이 우거진, 영원한 봄의 도시였다.
무지와 미지의 영역을 여행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가본 곳은 다시 가지 않는다. 하지만 보고타에는 조만간 다시 갈 예정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서로 영영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한 데 뭉쳐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약과 강아지처럼.
케냐는 세계 최대 차(茶) 수출국이다. 중국인 줄 알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다 마셔서 수출은 많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로비에서 마신 차들은 평범했다. 좋은 차들은 영국에서 싹 쓸어간다고 한다.
콜롬비아는 세계 3대 커피 수출국이다. 그리고 보고타 커피는 엄청났다. 나는 평소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보고타에서 나는 음료가 아닌 기호 식품으로서 커피를 만났다.
'싱글 오리진'이나 '스페셜티 원두'라는 말이 나오기 한참 전, 그리고 '공정 무역'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인 1927년에 콜롬비아 커피 농가들은 FNC(Federación Nacional de Cafeteros)라는 커피 카르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국내외 유통/물류 관리, 후안 발데즈(Juan Valdez)라는 농부 캐릭터를 활용한 '콜롬비아 원두' 마케팅, 그리고 커피연구에 정진한다. 그렇게 세계과학한림원 농업과학상을 받고, 후안 발데즈 아저씨는 한때 뉴욕 광고주간에 '가장 중요한 광고 아이콘'으로 뽑히기까지 한다.
그리고 2002년, FNC는 처음으로 고급 커피콩을 수출하지 않고 자기 나라에서 팔아보기로 한다. '어? 왜 콜롬비아에서 마시는 콜롬비아 커피는 맛이 없지?'라고 갸웃거리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보고타 엘도라도 공항에 후안 발데즈 카페 1호점을 연다. 도시 중산층의 성장과 맞물려 대박이 난다. 한국에서 초록색 머리 풀어헤친 사이렌 간판 보이는 것만큼 자주 보고타에서는 갈색 콧수염 기른 농부아저씨 간판이 보인다.
그러나 후안 발데즈 카페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가보고 싶은 스페셜티 카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안데스 산맥의 고지대가 커피 키우기 최적의 환경이라면, 아마존 강 상류와 오리노코 강 인근 정글은 오천 년 전부터 카카오를 마시던 카카오 기원지다. 콜롬비아는 모든 걸 가졌다. 커피에 밀려 기를 못 펴고 있긴 하지만, 콜롬비아의 카카오는 국제 카카오 기구(ICCO) 기준 상 90% 이상이 '파인 카카오'로 분류된다. 참고로 전 세계 카카오 중 파인 카카오는 5~10%다.
카카오 전문점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친 어느 햇살 좋은 오후. 아리따운 여자 둘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건너편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더니 냅다 키스를 갈겼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듯한, 이 세상에 너와 나 둘 뿐이라는 듯한 키스. 그런 키스는 영화감독이 '컷!' 외치면 끝나는 것 아니었나? 하지만 현실에는 감독이 없다. 키스는 끝나지 않았고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얼빠진 상태로 한국의 깨어있는 친구들에게 생중계 구조 신호를 보냈다. '네가 이상한 카페에 간 것 아니냐'는 답이 왔다. 아니 여기 카카오 기원지
여자 둘의 키스가 놀라운 게 아니었다. 정열(情熱). 그 둘에게는 나도 카페 직원도 다른 손님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페 테이블도, 유리창 너머의 공원도 산책하는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아지경(無我之境). 그 몰입이 부러웠다. 몰입의 대상이 사랑이라는 게 충격이었다.
메데인 친구들을 만나 이 충격을 전했다. 도대체 언제 끝나나 싶어 시간을 재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10분을 더 하더라고. 끊기지도 않고. '아이 나도 연애하고 싶다~'라는 답이 왔다. 반응 뭔데
'나는 터프 걸이야! 내 팔에 이 문신들을 봐! 나는 헤비메탈만 들어!'라고 셀프 브랜딩을 시도하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매사에 사랑스럽다는 표정이라 내 눈에는 꼬리 없는 털북숭이 강아지인 친구였다.
'숨 쉬어 이것들아!!'라고 한 친구는 흔치 않은 고양이 부족이었다. 시끄러운 파티가 싫다며 자긴 콜롬비아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엉뚱한 곳에서 태어났고 한국이 자기와 딱이라며 한국 대학원을 알아보는 친구였다. '수분 보충해! 물 좀 마셔가며 해!' 라며 하악질을 했다.
나의 충격은 전해지지 않았다. 머쓱해서 '아시아 사람들은 폰 확인 해야 해서 10분 키스 못해'라고 덧붙였다.
최소 업무 메시지 확인은 해야 한다 ㅇㅈ? 실눈 뜬다 ㅇㅈ?
나의 우선순위를 돌아봤다. 10분 간 눈 안 뜨고 키스가 가능한 사람의 우선순위는 어떤 걸까? 그런 건 다른 우주에서 가능할 거라는 상상도 못 해봤는데, 버젓이 다른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연인을 아모르(Amor),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 토마토 수프 좀 전달해 줘요" "사랑, 올 때 메로나" 하는 식으로. 남자들은 하나같이 팔만대불출이었다. 여자는 없었다. 여왕들만 있을 뿐.
그런저런 연애 얘기를 하다 결혼 얘기로 대화가 흘러갔다. 콜롬비아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걸 하진 않는다고, 결혼 휴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면 굳이 결혼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사실혼과 법정혼을 구분하지 않는 듯했다.
남성 마초 문화가 강하고, 남자들이 대부분 아이를 같이 키우지 않고 떠나버린다고도 했다. 자기도 엄마가 키워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했다.
엥? 아모르와 새끼 강아지를 두고 떠난다고? 어이가 없던 차에 문신을 한 강아지 친구가 아니라고 외쳤다.
'아냐! 우리 아빠는 우리를 잘 보살펴줬어! 게릴라들의 총에 맞아서 일찍 돌아가셨지만'
아차.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릴라? 총? 플랜테이션? 순발력은 자신 있었는데.
10분짜리 딥키스와 게릴라 반군의 농민 학살. 두 번 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 줄 몰라 발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날, 타투퍼피가 나를 기억의 집 박물관(Museo Casa de la Memoria)에 데려갔다. 좌익 게릴라와 극우 민병대, 정부군, 마약 카르텔끼리의 전쟁, 암살, 폭탄 테러,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과 활짝 웃는 사진과 생존자들의 회고와 당시의 사진들이 있었다. 타투퍼피는 조용히 울었고 나는 또다시 애꿎은 발끝만 조금씩 닳게 할 뿐이었다.
내가 만난 콜롬비아 사람들은 지나치게 다정하고, 잘 웃고, 잘 웃기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커튼을 잘 치지 않는 이웃집 중년 부부는 금요일 저녁 조명을 어둡게 켜고 블루스를 추고, 음정은 무시한 채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감당할 수 없게 밥을 많이 퍼주고, 술은 더 많이 퍼주고, 인사에 진심이고, 사랑에 목숨 걸고(당연히!),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주제에 우린 꼭 다시 만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총구를 겨누다니.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 다시 가봐야겠다. 동전의 양면이 한 면에 있는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