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던 햇살, 그 하나까지도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 아주 영영 잃어버리는 일은 드물긴 하지만, 어딘가 휙 던져놓고 찾지 못해 한참을 아쉬워 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면 한동안은 계속 그것에 집착한다. 꼭 당장 필요한 게 아닌데도, 그다지 귀할 것도 없어 잊으면 그만인데도 동동거린다. 물건을 처음 접한 장소와 상황, 함께 해온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괴로워한다.
이런 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물건에 대해서는 대놓고 집착이나 할 수 있지 사람에게는 그럴 수도 없다. 그러기엔 나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손해보는 것 같거든. 몇 번의 노력을 하다 안된다 싶으면 손을 놔버린다. 그러고 까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경우들이 간혹 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유로 낯선 곳에 떨어진 그와 나는, 비슷한 타입은 아니지만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었다. 우린 너무 달랐지만 어쩌다 보니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있었다. 한정된 시간이었지만, 그냥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와 나를 떨어뜨려 생각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알면 알수록, 편협한 나의 사고와 좁은 세계에서 먼 사람이었고 그래서 종종 흠칫 놀랄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 상관없이 그냥 너무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특유의 말도 안되는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고, 그걸 발휘해 그의 빈 곳이 있으면 메워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도움이 되려고 했었다.
한정된 시간은 종결되었고 우리는 각각 다시 현실로 복귀했다. 함께 했던 낯선 환경에서 각자의 익숙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관계가 완전히 같은 모양새를 갖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형태를 바꾸어 적응해가며 연속성을 띌 줄 알았다. 그의 현실에서 마련된 내 자리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더 금방 내 존재는 없던 것이 되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사는 곳도 멀고 행동양식도 다르고 하다보니. 그 한정되었던 시간동안은 뭘 해야 할지 몰라 함께 헤맸기 때문에 그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정리하며 더 생각하지 않는 게 개운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구겨져 어딘가 처박혀 있다가, 뜬금없이 한 번씩은 떠오른다.
며칠 전에 문득 길을 걷다가, 결국엔 그 마음 속에도 내가 준 상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장난스럽던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에 내가 너무 둔하지 않았을까.
대상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넌 나랑 달라'를 입버릇처럼 달고 장난스레 말했다. 실로 다르기는 달랐다. 다름에 대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내 입장에선 종종 놀라웠고, 그런 지점들을 두고 서로 놀리고 장난을 치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상처 받는다'고 얘기를 했던 적이 한 번 있었다. 며칠 전 그 말이 불현듯 생각나며,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익숙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찾아가느라 바빠 나와의 관계에 대해 굳이 더 애쓰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자신의 평상으로 복귀 후 더 이상 특별한 가치가 없어진 나와 그 관계에 대해 노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흘려보냈는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었던 것인지는. 오직 내 생각과 추측일 뿐 알 수가 없다. 함께 가까웠던 다른 이가 언젠가 연락해볼까 물었을 때 나는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조금 후회한다. 하지만 그는 단호한 사람이고 어차피 했다 해도 결국 또 흐지부지 다시 만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상처로 남은 관계들이 있다. 한때 너무나 가까웠지만 지금은 흩어져간 이들. 진입장벽을 넘으면 사람을 홀랑 믿고 의지했던 나는, 어쩌면 그뒤로 더 경계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년 남짓한 그 시간과 사람이, 지금의 나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벌써 오래 전의 일인데 이렇게 한 번쯤은 써야만 뭔가 내 마음 속에서도 생각이 정리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잊고 있다가 한 번씩은 턱턱 걸리는 지점. 이제는 missing piece에 대한 마음을 흘려보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