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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B Apr 17. 2021

사회적 지위가 사라지고, 우리는 순례자가 되었다

2018 4월 9일 - 10일

어머니와 보낸 열흘의 휴가는 순식간에 지나버리고 이제 벌써 카미노 프랑세스 루트의 시작점인 생 장 피에 드 포트로 향하는 날이다. (순례길 루트는 아주 다양하다. - 교통편이 없던 시절에는 순례자가 사는 집을 시작점으로 보고 순례자마다 다 다른 길을 걷는다고 표현했다. caminoways.com에 따르면 전체 순례자의 56.88%가 카미노 프랑세스를 선택한다고 한다. 카미노 프랑세스는 프랑스 남부의 국경마을인 생 장 피에 드 포트에서 시작하여 순례길의 목적지인 스페인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끝난다.) 이른 아침부터 아침을 먹고 짐을 싸는 동안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전까지 어머니 눈빛에서 설렘을 볼 수 있었다면 오늘은 애석함이 눈동자에 가득 차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리였으니까.


어머니와 나는 2006년에 45일 동안 유럽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유럽 여행이라면 대부분 가는 코스를 무시하고 우리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스페인 남부에서 약 2주를 보내고, 어머니께서 가시고 싶어 하셨던 도시와 내가 꼭 모시고 가고 싶었던 도시 중에서 골라 다닌 조금 느린 여행이었다. 보통 여행객들이 하루 - 많으면 이틀 머물다 가는 장소에서 우리는 며칠이고 지냈다. 길가에 주저앉아 맥주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고, 길에서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면서. 하루하루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득 찬 여행이었지만 45일 동안 어머니께서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은 이 한 마디였다.


"내가 다음에는 절대 너랑 여행 안 온다. 네 아빠랑 올 거야."



12년 전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이번 프랑스 여행과 순례길에도 내가 어머니와 함께 걷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위해 준비하신 돌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와 여행을 하시다가 너무 예뻐서 주우셨다는 작은 몽돌에는 아버지께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순례자는 돌을 들고 걷다가 카미노 프랑세스 루트의 약 2/3 지점에 있는 철십자가(Cruz de Ferro)에 놓아둔다. 돌을 들고 걷는 이유는 아주 많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떠난 이를 그리며 들고 다닌 돌을 철 십자가에 두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이유다. 하지만 자신의 고뇌를 두고 오기 위해 돌을 지니고 걷는 순례자가 있는 것처럼 각자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아' 자만 나와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에 메고 있는 무거운 짐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티며 묵묵히 기차역으로 걸었다. 기차 파업은 여전히 지속되어 기차역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침묵 속에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던 어머니와 나. 함께 하기 위해서 떠난 여행이지만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우리는 다른 세상에 속해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모든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바욘에서 5일을 지나면서 라이너 외에는 순례자를 한 명도 만나지 못했지만 기차역에 들어서자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작은 역이라 몇 개 되지 않는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90%는 등산복을 입은 채로 큰 배낭을 발 옆에 세워두고 있다. 감추려고 해도 잘 갖춰 입은 등산복과 등산가방은 그들의 공통된 명칭인 예비 순례자와 목적지를 선명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 들 중 누군가는 길 위에서 또 마주치겠지. 어쩌면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한 명 한 명,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나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 있는 사람은 눈을 감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었고 일행이 있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 모녀뿐이 없는 것만 같았다. 뭐라도 떠들어야겠다는 마음에 작은 기차역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깨끗하고 모던한 화장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스테인리스 메탈로 만들어진 듯이 반짝반짝거리던 금속의 화장실은 내가 지레짐작했던 기차역의 화장실과는 너무 달랐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문이 열기 힘들었다고 말을 시작하자 어머니께서 “맞아 맞아.”라고 답하시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리신다. 어머니도 이야깃거리를 찾고 계셨나 보다. 화장실이 가장 중요한 안건인 마냥 대화를 이어간다.


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버스가 도착했다. 곧 순례길이 시작된다는 설렘이었을까, 순례자들은 무작위로 버스를 둘러쌌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버스는 금방 만석으로 가득 찼다.


생장 피에 드 포트로 향하던 길, 버스에서 보는 풍경은 기대 이상이었다. 나무의 어린잎에서 보이는 싱그러운 연둣빛과 꽃내음이 보일 것처럼 활짝 핀 이름 모를 노란 꽃, 거기에 아직 풀이 자라지 않은 경작지와 풀이 잔뜩 자란 경작지. 수만 가지의 초록빛과 수천 가지의 노란빛이 어우러져, '봄이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 사이로 해가 드러났다. 찻길을 따라 지어진 집의 하얀 벽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것이 아닌가. 순례자를 축복하는 향연이 열린 것 더없이 찬연한 모습에 이곳저곳에서 '찰칵찰칵'소리가 났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순례자에게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버스 안에서의 이동은 즐거움의 연속이었으나 숙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순례길을 시작하는 마을이기에 알베르게(순례자들이 저렴하게 묶을 수 있는 숙소. 일반적으로 가격은 5유로에서 10유로)가 있었지만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 여유를 맛보고 싶어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약했다.


숙소로 가기 위해 따라 걸었던 시내.


우리에게 시작된 첫 고난은 양쪽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무거운 가방이었다. 순례길 밖에서 순례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이전 일정에서 입었던 옷과 신발이 가득한 가방이 하나씩 더 있었다. 우체국을 이용해 짐을 보낼 예정이라 캐리어를 대신한 거대한 가방을 힘겹게 나눠 들고 바들바들 떨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역에 도착하면 당연히 택시가 있거니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너무나도 작은 마을이니 택시의 수요가 많지 않을 거라 짐작했지만 우리가 도착한 시각에는 한 대의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또 다른 가방은 어머니와 한쪽씩 팔에 낀 상태로 1.7km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느새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숙소로 걸어가는 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래된 돌다리를 지나 작은 시내를 따라 걷다 보니 눈 앞에 풍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무는 중심지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드넓고 푸른 풀밭과 그 안에 수없이 핀 노란 민들레는 점묘화처럼 절묘하게 엉켜있었다. 어느새 길에는 우리 모녀 둘만 남았다. 어머니와 나 주변의 공기가 새의 지저귐으로 가득 찼다. 새로운 순례자를 환영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무거운 몸과 달리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거운 짐이 천근 만근이 되어 다시 어깨를 짓눌렸다. 이제 곧 고지가 보인다며 어머니와 나는 "갈 수 있다!"를 외치며 한 걸음 씩 걷기 시작했다. 그저 4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이지만 말로 외치는 순간, 놀랍게도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가 묶었던 숙소 바로 앞의 풀밭. 사진에는 찍히지 않았지만 양들도 많았다.


어느새 해가 나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풀밭은 이제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그 위에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너무 평화로워 이게 진짜 현실인지 아님 영화 속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숙소는 기대만큼 깔끔했다. 간단히 가방을 풀고, 눈부시게 빛나는 해를 그냥 보내기 아쉬워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가벼워진 어깨에 벌써 순례길이 끝난 듯이 발걸음이 가벼웠다. 무작정 걷다 보니 카미노 순례길의 표식인 조개껍질 문양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십 미터쯤 더 가다 보니 카미노 순례길 오피스가 있다. 순간 울컥했다. 순례길은 오랫동안 계획했지만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 사랑하던 사람에게 이혼을 통보받은 터였다. 순례길을 어머니와의 온전한 시간으로 기대했던 나에게 예상치 못했던 의무가 추가로 지워졌다. 상처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너덜한 나의 마음을 보듬어야 했다. 길을 다 걷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듯이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더불어 예상하지 않았던 미래로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이대로 잘 헤쳐나갈 수 있길. 더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길. 다시 한번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길. 길거리에 있는 벤치에 앉아 슈퍼에서 산 맥주의 시원함 목 넘김을 느끼며 나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크레덴셜을 만들러 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아저씨가 마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겨주셨다. 그 미소 만으로도 순례길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어만 하시는 그 분과 손짓 발짓으로 크레덴셜을 작성하고 첫 도장을 받고 나니 뭔가 가슴이 뭉클하다. 이제 우리는 사회에서 받은 모든 지위가 사라지고, 순례자란 뜻인 페레그리나(Peregrino(남성형), Peregrina(여성형))로 불린다.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이지만 종교의식은 전혀 없다. 순례자라고 말하지만 여행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우리. 래도 우리는 굳이 순례자라는 단어로 우리를 포장하고  위에서 안식을 찾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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