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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Dec 15. 2020

단순히 인종차별을 안 해야 한다... 는 주장은 옳지만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그렇게 쉬울까?

단순히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고 말하면 단순하고 간단한 주장이만 실제로는 이건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큰 주장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양성, Diversity를 존중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쉽지만 이걸 내 일상에 적용하는 것은 다른 수준의 이야기가 된다. 가진 자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자는 말은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그 가진 자의 부가 자수성가라 아닐 것이라는 이상한 선입견이 내재되어 있곤 하다. 그 누구도 자기 것을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지시나 규칙에 의해 빼앗기길 원하지 않는다.


다시 인종차별로 돌아와서 보자.


양한 인종이 뒤섞여 사는 곳에서 지내다 보면, 다양성이라는 게 얼마나 폭이 넓은지, 나의 포용성의 한계란 얼마나 좁은지 실감할 수 있다.


내가 20대에 이민을 했다면, 좀 더 포용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다 받아들일 수 으며 난 여전히 인종차별주의자일 것이고, 외모지상주의자일 것 같다.


당신이 가족들과 함께 멋진 비치 클럽에 들어가서 쉬려는데 검은색 히잡을 쓴 무슬림들이 들어와서 옷을 입은 채로 수영장에 들어가고, 아이들은 히잡이 있는 긴팔 긴바지 수영복을 입고 있다고 치자, 이들이 소수라면 그냥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들이 단체로 와서 내 테이블이나 썬베드 주변을 장악하면 당신은 다시는 그 클럽에 가지 않을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라 가르쳤는데 우리 집에 놀러 온 아이 친구들이 음식 알러지가 제각각이고, 그 와중에 비건이 있는데 당신이 그 부모들로부터 아이의 음식에 대해 그 어떤 조언이나 정보도 들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데 당신 아이가 놀러 갈 때면 언제나 식사를 주지 않고 돌려보낸다면 당신은 어떨 것인가. 인종차별 얘기를 꺼냈지만 사실 외국인뿐 아니라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람이라고 만났는데 부모는 경우가 없고, 그 자녀는 공공장소에서 부모에게 큰소리를 치고 욕을 하기도 하는 한국 기준으로는 소위 문제아라면? 한국인이라고 만나고 보니 불법체류자라면? 한국에서 불법체류, 불법행위를 하는 외국인을 보면 버러지 취급하던 사람들이 여기선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면 가까이할 수 있을까?


다시 돌아와서, 아이의 백인 친구가 맨발로 마당에서 놀다가 더러워진 맨발 그대로 집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당신 아이 침대의 흰 침구 위에서 뛴다. 친구 아이 엄마는 아이들과 식사하면서 뒤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아이 친구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데 그 아내인 아이 친구 엄마는 나보다 어리다. 당신 아이 생일 파티에 친구 엄마가 아이를 드레스를 입혀 와서 축하한다며 모이라고 하고 주인공을 들러리로 자기 아이 장기자랑을 하면 그 날의 주인공의 기분은 어떨까? 그게 내 아이라면? 언제 어느 자리에나 노브라에 얇은 헐렁이는 민소매로 나타나는 아이 친구 엄마는 때와 장소만이라도 좀 따져주면 좋겠다. 학부모 모임에 누구는 핫팬츠에 노브라 탱크톱, 누구는 빨간 파티 드레스... 다양성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는데 과연 이것이 다양성인가 하는 생각이 뇌에서 소용돌이친다.


내가 싱글에 서른만 되어도 다양성을 조금은 더 받아들이겠지만 지금 내 입장에서는 매우 어렵다. 코로나로 학교도 못 가는데 온라인 수업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들이 모여서 두어 시간을 실내에서 놀게 한다. 학교를 못 가는 상황이 학교의 문제인 것 마냥 학교 가는 것만 빼고 다 평소처럼 하며 지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한편, 우리는 가끔 한국에서 다양성이 존중되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외국인들을 보곤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누울 자리를 잘못 잡고 다리를 뻗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다양성으로 치면 아시아에서는 뉴욕 수준의 용광로이지만 여기서도 다양성이 존중되긴 어렵다. 국적, 인종, 종교, 민족 등으로 차별이 알게 모르게 상존한다.


그런데 단일민족 - 세세하게 따지면 허상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거 따질 문제는 아니다 -, 단일 문화, 단일 언어 국가에 와서 다양성 운운하는 건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나라는 없다.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 언어가 혼재하는 미국도, 프랑스도, 영국도, 중국도, 인도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실 무리한 이야기고 이상적인 이야기다. 동화 같은 이야기다.




위에 예로 든 것들이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수준이나 상식의 문제라고, 혹은 배려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런 행위가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행위라는 사람들, 국적자들이 존재한다.


중국인, 인도인, 중동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국인들, 호주인들, 모든 국가 출신 사람들에게는 제각각의 당연한 행동들, 언어적 표현이 있는데 그걸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존중해주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인데 문제는 우리는 그런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에서 자라지 않았기에 받아들이기가 매우 쉽지 않다.


몇 년 살지 않았는데도 인종은 물론 국적별로 갖가지 선입견이 가득해졌고 친해져도 그저 겉으로만 그렇다. 내 마음이 다른 그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가리는 게 많고 따지는 게 많기 때문이다.


옳은 가치라고 해서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가치라도 나와는 맞지 않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인생은 이론이 아니고 일상은, 삶은 이상적일 수 없다. 다양성은,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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