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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렌 Apr 05. 2021

문득 생각난, 보고 싶은 가정부 녀석.

이방인의 삶이란 작은 일 하나하나가 녹록치 않다.

꿈꾸는 이민의 삶.


꿈깨라. 태어난 고향에서 살아도 만만찮은 게 삶이다. 터전을 옮기고 편안한 일상을 사는 건 적어도 10년이 걸릴 것이다.


이게 내가 깨닫는 이민의 삶,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외국인의 삶이다. 영주권을 받아도 별반 수가 없다.


이민 후 최초 3년 정도, 개인적으로나 회사에서나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을 해고하고, 또 스스로 관두고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다. 문자 하나 남기고 가는 놈도 있고.


문화적으로 설명하자면, 굳이 설명을 할 수는 있겠지만 너무 기니 생략한다. 아무튼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어느새 적응이 되고 나니 불필요하게 많은 인원의 '출입'은 사라져갔다. 정말 얼마나 힘들었는지 사람을 또 뽑을바에는 내 인생을 갈아넣겠다고도 생각했었다.


이제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집안팎으로 자리를 잡자 판데믹이 덮쳤다. 하지만 이것도 운 좋게 잘 넘겼는데, 갑자기 둘이, 이틀상간에 사직했다. 아무 인수인계 없이.


하나는 퇴사 예정이긴 했었지만 인수인계와 관련한 약속을 어기겠다며 대놓고 선포하듯 하고 나갔고, 다른 하나는 집안 사정이라며 두 달을 어렵게 버텼는데 더는 안 되어 이곳의 집을 빼고 고향에 간다 했다. 외아들인 자기딴에는 최선을 다해 버텨보겠다고 그간 어떻게 되지 않겠나 싶어 말을 하지 않았다는데, 결국 돈문제를 해결 못하고 부모님과 급히 고향에 가야해서 인수인계고 나발이고 하룻만에 나간다는 얘기다.


먼저 녀석은 나와 아내를 아버지, 어머니처럼 여긴다며 언제든 부르면 급여고 뭐고 버선발로 달려와 돕겠다며 수도 없이 말하던 놈이다. 이 녀석의 어머니는 내 아내와 동갑이다. 또 다른 한 녀석은 지난주까지도 누군가 그만둘 때면 인수인계 할 시간을 주는 게 기본이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던 녀석이자, 꽤 정을 주어 이제 아들 같이도 느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던 온순하고 착한 성실한 아이다. 그래, 이 녀석 아버지가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여담인데, 여기서 우리의 직원들은 한국에서와 달리 진짜 자식뻘이라 그냥 직원 같지가 않게 느껴지곤 한다.


여간에 그런 이 두 놈이 나가며 준 스트레스에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던 오후, 문득 2018년 1월에 그만두었던 우리집 예전 가정부 녀석 생각이 났다.


말이 가정부지 녀석은 서른이 다 되어가던, 고아로 자란 타지 출신의 시커먼 사내였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인지 예의가 없진 않지만 정을 주지 않고 무뚝뚝하고 인사성이 없는 애였는데 우직하게, 성실하게 일을 열심히 했다. 꽤 오래 꾸준히 일했는데 그간 종종 다툼이 잦아가던 아내와의 문제로, 결국 이혼하며 모든 걸 포기하고 하나 뿐인 가족인 동생 가족이 사는 고향에 간다고 그만두겠다 했더랬다.


당시에는 너무 안타깝고, 정말이지 서운했는데, 우리를 만나 그 녀석 삶도 좀 피길 바랬는데, 가족이 없어진 청년이 세상 하나 뿐인 동생 부부와 조카를 보러 가고 싶다니 어찌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만두겠다던 녀석은 정말 힘든 얼굴로 이곳에서, 타지에서의 삶이 이젠 너무 외롭고 힘들다 했다.


그랬다. 그 녀석도 이 나라 사람이었지만 여기선 외국인인 나처럼 결국 한 명의 낯선 이방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월말까지만 일하겠다고 하던 이 기특한 녀석은 대신 일할 사람을 찾느라 나름 고민하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며 초조해하던 우리에게, 우리가 어지간한 사람은 만족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는지,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라며 지금 일하는 A를 데려와서는 3주 가까이 같이 일하며 우리가 인수인계에 신경쓰지 않도록 알아서 했다. 그리고 약속한 날, 조촐한 저녁식사로 우리 온 가족의 환송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남자 녀석을 안아줬던 건, 군생활 이래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모습을 A에게도 보여주며 그는 먼 고향으로 떠났다. 그리고 A는 그가 남긴 선물이, 유산이 되어 지금 우리집에서 일하고 있다.

 

문득, 두 직원의 퇴사로 심란했던 오늘 그 녀석 생각이 나서 바뀐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해보았다. 두 시간 쯤 지났을까. 다행히 연락처가 아직 맞아서 답이 왔다.


그 사이 새로 아내를 맞이하고 그토록 원하던 아이도, 임신했다 했다. 내가 다 기뻤다.


결혼한 줄도 몰랐는데 그토록 갖고 싶던 아이까지 가졌다니. 그 없는 돈을 아이 하나, 자기 가족 이루겠다고 산부인과에 다 쓰던 녀석이었다.


난 녀석에게, 이 나라에서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 중 네가 가장 존중 받아 마땅한, 진짜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누구는 이방인에 고아라고 우습게 봤을테지만, 비록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지만 실제로 나는 그만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을 이 나라에서 보지 못했다. 그리고 네가 소개하고 간 A도 너만큼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다 했다. 그가 그 이야기로, 그 사실로도 작은 뿌듯함을 느끼길 원했다.


간만에 얘기를 나눴기에 결혼 사진도 받아보았다. 그는 왜 결혼소식을 전하지 않았냐는 내 타박에 어쩐지 안부를 전하는 게 어려워서 그랬다 했다. 그래, 그랬겠지.


결혼을 축하해주지 못해 아쉽다고 대신 축하의 의미로 돈을 송금해주겠다 했는데, 다행히도 덥썩 고맙다고 받아주었다. 예전 같으면 사양했을 것인데, 밝아졌는지 아니면 내 기쁜 마음이 전해졌는지 한 번의 사양 없이 고맙다 했다. 난 사양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준 녀석이 참으로 고마웠고 기뻤다. 계좌가 없어졌다던 그에게 그가 근무할 당시 월급의 50%를 그의 새 아내 계좌로 곧장 입금해주었다. 이곳보다 인건비가 낮은 그의 고향에서 화물기사로 받는 급여는 여기서 받던 몇 해 전 급여보다도 적을 것이다. 당시 나는 성실하고 믿음직했던 그에게 그만큼 충분한 급여를 주었었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소식을 전하라고 했다. 가족과 꼭 행복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 녀석도 내게 내가 방금 송금해준 돈을 받았다고, 입금 확인까지 해주며 정말 고맙다고 했다. 난 받으면 받았다고 알려달라고 말도 안 했는데 알아서 잘 받았다 말해주는 게 참 좋았다.


그 녀석이 마지막으로 보낸 입금 확인증에는 내가 보내준 돈의 입금 내역과 함께 아내의 계좌 잔액이 찍혀 있었다.


잔액은 내가 보내준 축의금의 약 2배, 예전에 그가 여기서 받던 월급여에 조금 못미치는 액수였다.


그 순간, 내가 보내준 돈이 녀석의 행복을 잠시나마 2배로 해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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