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품과 고급품, 그리고 필수품.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대부분의 비선진국에서 관세를 책정할 때 이것을 구분한다. 필수품이라면 비록 수입이라 할지라도 관세가 높지 않으며, 품목 자체는 필수품에 속하더라도 지나치게 비싼 경우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어마어마한 세율의 관세를 부과한다. 천만 원짜리 변기와 욕조가 있는 건 순전히 관세 탓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에 부과되는 특소세가 이제는 필수품이자 집보다도 기본적인 자산인 자동차에 지나친 세금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 생활이 이미 자동차 정도는 흔히, 집집마다 적게는 한 대에서 많게는 서너 대 이상도 있기 때문이다. 해서 같은 이유로 과거에는 두 대 이상의 차량을 보유하면 보유세 성격인 연간 자동차세를 가중하여 부과했는데 이 역시 맞벌이가 일반화되며 사라진 것이기도 하다.
시계의 경우, 단순히 가격으로만 따진다면 천만 원 정도가 그 경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상의 가격은 그냥 과시용일 뿐 기계적인, 성능적인 차이가 유의미하지 않다. 희소하게 생산하고, 전통과 스토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보석을 박아넣고 가격을 올리는 것에 불과하다.
자동차라면 2억 정도일 것이다. 1억 남짓한 차들의 마감이나 성능, 품질은 분명 몇 천만 원 대의 차들과는 구별된다. 2억이 넘는 차라고 해서 시계처럼 보석이 박히지는 않는다. 이 역시 브랜드 전통과 스토리, 그리고 희소한 생산에 의한 수요 공급의 차이로 만들어지는 가격일 뿐이다. 쇼퍼드리븐의 경우 S600의 품질 이상의 것은 사치품이라 봐도 무방하고 오너드리븐 스포츠카는 911 라인업 이상의 것들은 사치라고 봐도 좋다. 딴지를 걸 필요는 없다. 이건 순수한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고 이게 맞다 주장할 생각 따위는 없다.
만년필이나 펜은 몇 백 정도라면 수긍할 수 있다. 가방, 소품, 악세사리 등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그러나 예외라면 수명과 쓰임이다.
페라리를 사서 50년을 소장할 수 있다면 사치라 하지 않겠다. 1억짜리 시계를 사서 소중히 차며 자식에게 물려주고 자식도 그걸 소장할만한 사람으로 성장해서 간직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사치라 하고 싶지 않다. 그냥 모셔두면 그건 다 사치에 해당하겠으나 실제로 그 쓰임을 하면서 오래 사용하고 소유한다면 내 생각은 크게 달라진다.
3백만원짜리 만년필을, 다이아가 박힌 만년필을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이 물려받는다면 그건 돈의 가치를 넘어간다.
어머니의 다이아 반지를 딸이 물려받고 약간의 수선이나 커스텀을 통해 계속 그 가치를 한다면 그 다이아몬드를 누가 사치품이라 할 것인가.
내게도 몇 가지 물려받은 물건들이 있다. 비싸고 값어치가 있는 것도 있고 의외로 별 것 아닌 물건도 있다. 그저 잘 쓰고 잘 관리하다보니 2대째 쓰고 있는 것들도 의외로 많다.비싼 명품이야 그렇다손 쳐도 예를 들면 고무망치 같은 수공구들 중에도 30년 넘게 쓰고 있는 것도 있다.
그 중 몇 가지는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고, 실제로 몇 가지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다. 다만 갈수록 전자제품들이 일상에 많아지고, 전자제품이 아니었던 것들도 전자제품이 되면서 그럴만한 물건들은 계속 줄어들 것 같다. 대부분 전자제품은 신형이 무조건 제일 좋고, 구형을 쓸 일들이란 게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부엌칼이, 수공구가, 만년필이나 기계식 손목시계가, 질 좋은 가죽 가방이, 또 비교적 기계적으로 구조가 단순하고 이미 완성형인 2천년대 직전의 수동 자동차나 모터사이클이 그런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전자제어장치가 들어가면 이미 시대를 탈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도 4-5년은 무던히 쓰는 나지만 전자제품은 역시 그럴 대상은 아니다. TV, 오디오 같은 것도 마찬가지. 이런 것들이야말로 굳이 비싼 걸 쓸 이유가 없는 물건들이 아닐까. 나도 지금 쓰고는 있기는 하지만 수명이 짧은 스마트폰이 백만 원이 넘는 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