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인환 Feb 06. 2021

오늘, 회사 그리고 권태와 실연

이 기분은 처음 회사를 들어설 때, 그리고 실연 후 바깥 햇빛을 쬘 때.

 어제, 오늘까지 꼭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오랜만의 여유에 아침부터 책상을 정리했다. 짐이 쌓이는 걸 싫어한다.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만 남겨두고 모든 잡동사니들을 비닐봉지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쓰지 않는 도구들을 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금세 퇴근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밀려있던 일만 간단히 처리하고 밖을 나서려고 했었다. 그런데 파고들다 보니 더 고민이 필요한 일이었고, 금세 끝낼 순 없었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창밖은 검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동기 하나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왜 이렇게까지 늦게 일을 하냐고. 그 질문에 나는 이제 그만 이 팀을 떠나고 싶다고 동문서답을 했다.


 잘 지내고 있니, 일은 할만하니, 요새 바쁘니, 주말엔 뭐하니, 여자 친구는 있니, 재테크는 하니. 이런 일상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늘 그 대답만 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팀을 옮겨, 또는 옮겨도 똑같을 거야 라는 말을 하곤 한다.


 동기는 내 대답에 놀라워했다. 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사냐고. 나는 대답했다. 이제 더는 배우거나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매년 예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고, 연차가 쌓일수록 같은 일을 더 많이, 빠른 시간에 할 뿐이라고. 그래서 점점 노력해도 퇴화하는 기분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젠 사람들이 내게 팀 업무에 대한 과거 이력을 물어보는 것도 싫고, 새로운 방식으로 낯선 걸 하고 싶다. 그럼에도 쉽게 떠나겠다 말을 꺼낼 수 없는 이유는 팀이 걱정되서라고. 내가 갑작스레 이 팀을 떠난다면, 누가 대신할 수 있겠냐고.


 그러자 동기는 내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네가 그동안 다른 사람이 떠나며 맡긴 일들을 해왔듯, 누구든 대신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많은 역할을 맡고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하겠지만 착각이라고 말했다. 나는 항변하듯 팀에서 꽤 인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기가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정말 인정받는 사람들은 따로 그룹에 속해있고 너와 연봉도 다르다고. 그러니 팀을 옮기고 싶으면 당장 옮기라고 말했다. 나는 모니터를 쳐다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동기는 아무리 말해도 듣질 않는다며 투덜대며 회사를 나섰다. 이젠 층에 나 밖에 없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 심적 충격을 받은 나는 모니터를 끄고 회사를 나섰다.




 셔틀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바깥 차들의 램프 행렬을 바라보고 있을 때,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네가 최근에 실수했던 일이 더 큰 문제가 되었으니 당장 수습을 해야 한다고.


 예전이라면 안절부절못했을 텐데.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이어폰으로 클래식을 들으며 상상했다. 다른 팀으로 옮긴 뒤 유관부서 사람들에게 전배 인사를 보내는 것. 신입사원일 때부터 같이 일했던 사람들. 그동안 고마웠고 미워했고 미안했고 화낸 적도 있었다. 끝으로 모든 분들께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좋은 사람이 되어서 다른 팀을 간다는 글을 머릿속으로 정돈해보며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파일을 수정하고 메일을 보내고 결제를 올리고 능숙하게 이곳저곳 전화를 걸어 해결했다.


 오늘, 아침 다시 전화가 왔다. 또 잘못되었다고. 또 나는 전화를 걸어 상황을 파악한 뒤 해결했다. 아침부터 파일을 보내고 전화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낮이 되었다. 필라테스는 못 갈 것 같다. 소파에 누워 전화를 기다리다가 문득, 어제 동기의 다그침이 생각났다. 너는 회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말이 유독 쓰렸다. 마치 실연을 당한 것처럼. 나는 휴대폰 음량을 켜 두고 샤워를 했고, 운동복을 갈아입고 밖을 나섰다. 지금은 카페에서 글을 쓰는 중이다.




 짝사랑이란 걸 깨닫는 것만큼 심란한 건 없다.


 모두들 서로 다른 성향을 타고나서 같은 환경에서 다른 태도로 생각하고 꿈을 가진다. 그런 것들이 뭉친 저마다의 시선에서 다른 시선들과 늘 대화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너를 잘 알기에 다른 곳에 가도 별게 없을 거라고, 누군가는 너를 잘 알가에 다른 곳에 꼭 가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지금, 창밖에 넓은 대로, 커다란 건물들이 낯설게 늘어섰다. 이 기분은 마치 처음 대학교 정문을 들어섰을 때, 그리고 처음 회사 정문을 들어섰을 때와 같고 어쩌면 실연 후 처음 문 밖을 나서 늦은 햇살을 쬐던 때 같기도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글 없는 삶 그리고 도로를 벗어난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