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3월 - 22년 3월
긴 겨울이 지나고, 햇살이 점점 짙어질 때. 우연히 낯선 사람들 틈에 너와 대화를 하게 되었어.
3월 1일. 평일과 다를 바 없는 주말을 보내는 중이라던 태연한 목소리. 우리는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각자의 공간에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흘려보냈지. 너는 내게 유별난 사람이란 말 대신, 너 또한 유별난 이야기를 꺼냈어. 그렇게 남들은 재미가 없다지만, 서로는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갔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 그리고 새벽 창밖이 밝아올 때 즘 알게 되었어. 우리는 꽤 비슷한 사람이란 걸.
잠깐의 휴일이 지나 다시 일상. 그럼에도 우리는 나의 밤, 너의 낮의 시간에 맞춰 오랫동안 이야기를 이어나갔어. 그러면서 우연히 알게 되었지. INTP 말고도, 우리는 같은 학교를 다녔었고, 같은 직업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같은 건물에 살았었고 같은 쓰린 일도 있다는 걸. 분명 우리는 며칠 전 까지도 서로를 알지 못했어. 그럼에도 다른 시간, 같은 곳에서 같은 길을 터벅터벅 걸어온 우연의 기억들로 우리는 어느새 오랜 친구가 되었어. 자정. 눈을 감은 채 전화기 너머 들리는 말소리를 엮어내며 우리는 같은 기억의 캠퍼스를 거닐었고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지.
우연이 거듭될수록 너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어.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우연이 숨어있을지, 아니면 더는 맞는 구석이 없는지. 서로를 알게 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처음 너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 입구 바깥에서부터 음악소리가 쿵쾅대는 낯선 곳에서 진토닉을 마시던 너의 모습. 사람들 사이, 당당하면서도 장난기가 깃든 표정이 마음에 들어. 우리는 어색함을 감추려, 웃음과 미소로 서로를 곁눈질하곤 했지.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때 데이트를 하게 되었지. 생각보다 우리는 말이 없었어. 표정 없이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지. 알아본 식당들은 모두 자리가 없었고 어두운 저녁, 거리를 말없이 돌아다니게 되었지.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채식 식당에서, 너는 이곳이 낯익다고 말했어. 알고 보니 스무 살 시절에 고양이를 데리고 온 적이 있다고 했지. 사진 속 네가 앉았던 소파를 찾아내고 고양이 이야기를 하며 금세 서로가 편해졌지. 우연은 끝나지 않았어.
다음 날, 화이트데이에 다시 만났어. 내 손엔 너의 초상화가, 너의 손엔 초콜릿이 들려있었지.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린 천장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가 건네주는 초콜릿을 반씩 쪼개 먹으며 그 맛과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맞히고 있어. 그때 너의 환한 웃음을 처음 보았어. 그 미소가 참 예뻐 보였지. 함께 길을 걸을 때 너와 나의 손이 스쳤고, 설레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네게 설렌다고 말했지. 그런 말은 속으로만 생각하라며 고개를 숙이던 너와 긴 밤 산책길을 걸었어. 차가운 네 손을 내 더운 손으로 꽉 잡은 채. 내가 알던 사라진 이곳의 모습 그리고 네가 아는 새로 변한 이곳의 모습을 말하면서.
그때부터 우리는 내가 잠드는 시간이자 너의 오후 시간까지 매일 긴 통화를 했었어. 햇살이 들기 시작하는 아침의 출근길 풍경을 보여주며 네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하기도 했고, 평일의 긴 밤, 코로나로 익숙해진 웹 미팅으로 같이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기도 했지. 3월 20일이 되었을 때, 너는 내게 언제 사귀자고 말할 거냐고 물어보았어.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된 지 20일이 되었을 때, 연인이 되었어. 그 이후 우리는 늘 예쁜 식당을 가고, 같이 요리를 하고,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어.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다녔고, 오렌지 와인을 음미해보기도 했었지. 낮은 산길을 걸으며 벚꽃구경을 하고, 호텔 수영장에서 서로를 띄어주기도 했어. 뮤지컬과 영화를 보고, 서로 일했던 식당을 찾아가고, 한동안 시간만 나면 보드게임을 했었지. 노래방에서 서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고, 한강 풀밭에 누워 책을 읽어주기도 했고, 많은 전시회들을 돌아다녔지. 교복을 입고 롯데월드를 다녀오기도 했어. 언젠가부터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택시 안에서 너는 어지럽다며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어. 그럴 때마다 나는 너의 눈가에 손을 덮고 먼 창가를 바라보는 게 일상이 되었지.
창가를 바라보며 떠올랐어. 언젠가, 우리가 아직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위로하려 너의 힘들었던 과거의 일을 초연히 드러내던 너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짐했었지. 널 웃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나의 스무 살. 낯선 곳의 겨울밤. 누군가에게 손바닥을 보이는 대신 자기만의 세상에 숨으려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스물 다섯 이후로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나약함을 씻어내려 했어. 그리고 지금. 나를 보며 한껏 웃음 짓는 너를 보며, 가끔은 내가 우스운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네가 아니라면, 누구를 내가 이처럼 웃음 짓게 할 수 있을까. 너와 함께 하는 동안, 나는 나약함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비로소 의젓해지고 있다는 걸 느껴.
100일을 맞아 우리는 처음 여행을 떠났어. 6월 초여름의 제주도에서 이곳저곳을 탐험하듯 길을 걸었지. 내가 운전면허가 없어도, 좋은 계획을 세우지 못해도, 길을 잘 찾지 못해도 너는 밉다고 하지 않았어. 같이 양산을 쓰고 길가의 돌담과 풀꽃을 바라보며 걸었고, 저 멀리 보이는 카페를 발견해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땀을 씻어냈지. 걸어서 도착한 해안에 몸을 담그고 웃고 장난쳤던 순간들. 여행이 이렇게 즐거운 것인지 몰랐어. 너와 함께라면 앞으로 더 많은 여행과 새로운 일들이 즐거울 것만 같아. 네가 나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고 채워줬기 때문이야. 우리는 더운 바람이 부는 초록빛의 해안가에 긴 성벽을 두른 모래성 쌓고 돌아왔어. 함께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반면에, 우리가 함께 있는 날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을 때. 안정감이 드는 대신,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어. 너를 만난 이후 글을 써본지도, 그림을 그려본지도 꽤 오래되었고, 한 번쯤은 홀로 카페에 앉아 오랫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펼쳐보도 정리해보고 싶었지. 하지만 혼자 거리를 나왔을 때. 늘 가던 카페에 오랜만에 들려 커피를 마시면서 알게 되었어. 이제는 네가 없는 나의 생활을 생각하기 어려워졌다는 걸. 글을 쓰는 도중에도 나는 네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잠을 자는 시간인지, 동시에 생각하게 되었어. 그만큼 나라는 것이 줄어들었을까. 지금 자고 있는 너 몰래 카페에 들러 글을 쓰는 이 순간,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어. 오히려 스스로의 마음이 풍요로워졌다는 걸 알아.
여름이 끝나 갈 때, 너는 내게 결혼하자고 말했지.
당장 결혼식 날짜를 추첨해야 한다고.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이제 정말 우리가 함께 한다는 실감하게 되었어. 결혼을 준비하며 또 많은 일들이 있었지. 없을 것 같던 다투던 날이 있었고, 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얽힌 환경들을 이해해야 했지.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고, 청약을 신청하고, 밀린 설거지와 버려지는 가구들 그리고 웨딩드레스와 심해지는 코로나. 그만큼 돌아보지 않던 것이 신경 쓰이고, 우리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어. 그럼에도 가끔 너와 내가 서로 건네는 장난에 웃음을 멈추지 못할 때, 문득 확신이 들어. 너와 함께라면, 우리는 어떤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별이 되어 서로를 비춰주고, 동경하고, 다잡아줄 거야.
긴 겨울이 지나고, 햇살이 점점 짙어질 때. 우연히 낯선 사람들 틈에 너와 대화를 하게 되었어.
평일과 다를 바 없는 주말을 보내는 중이라던 너의 가벼운 목소리. 우리는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각자의 공간에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흘려보냈지. 너는 내게 유별난 사람이란 말 대신, 너 또한 유별난 이야기를 꺼냈어. 그렇게 남들은 이해할 수 없어도, 서로는 헤아릴 수 있는 대화를 이어나갔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 그리고 새벽 창밖이 밝아올 때 즘 알게 되었어. 연인이 찾아왔다는 걸.
2022년 3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