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시사회를 통해서 봤다.
할머니와 부부 , 아내의 여동생 그리고 아들이 함께 오래된 할머니의 집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하츠에)는 전남편의 유족 연금을 받고 있고, 오사무는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며 이따금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오사무의 아내인 노부요는 세탁업체에서 일한다. 이들과 같이 살고 있는 노부유의 동생(아키)는 손님에게 속옷 차림의 몸을 보여주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하고 있고 아직 어린 쇼타는 오사무를 도와 물건을 훔친다. 이 여섯명은 함께 살기에는 좁은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겨울 아버지(오사무)와 아들(쇼타)은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고 고로케를 사 먹고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1층 복도에서 놀고 있는 아이(유리)를 만난다. 둘은 유리를 집으로 데려오고 몇 주 뒤 유리의 실종이 TV로 보도된다.
여기까지가 영화 <어느 가족> 이야기의 시작이다.
<어느 가족> (원제 : 万引き家族 - 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는 국내에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환상의 빛>, <걸어도 걸어도> 등으로 유명한 고레다 히로카즈가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최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어느 가족>은 가족 구성원들의 관계와 상호 작용 그리고 각자 개인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이 결국 던지는 질문들은 이 가족 구성원과 가족이 보여주는 모습을 통과한다. 이를 통과한 질문들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빛을 얻어 관객들에게 던져진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은 두 가지로 수렴한다. 가족과 국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묻고, 무엇인 가족인가 묻거나. 일본(혹은 국가)이 구성원들에게 무엇인가. 더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전통적인 가족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진다. 부모도 자식을 낳는 것은 선택이나(아닐 수도 있다.) 어떤 자식인가는 선택하지 못한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형제를 선택할 수 없다. 이는 새로운 가족을 꾸리거나 혹은 혼자 살아갈 때에도 원가족은 가족으로 남는다. 현대에 와서 새로운 가족 형태가 등장한다.(정확하게는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거지만) 입양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기도 하며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통해 가족의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현대에 새롭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족 형태가 전통적인 가족과 구별되는 점은 '선택'이 얼마나 개입되느냐인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을 둘러싼 가족 관계의 대부분은, 주어진다.
선택은 책임을 요구하고, 주어진 조건들은 의무를 요구한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책임은 우리를 더 단단한 사람이 되게 만들고 의무는 우리를 짓누른다. 짓눌린 사람은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의무에 짓눌려 도망치거나 의무의 대상을 공격하기도 한다. 가족을 두고 도망가는 부모, 아동을 학대하는 부모, 병든 부모를 학대하는 자녀들.
<어느 가족>은 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택한 관계는 주어진 관계보다 열등한 관계인가. 혹은 불완전한 관계인가. 그리고 주어진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지 않는가. 주어진 규칙(국가,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규칙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묻고 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그 선택은 어떤 의도였든 도둑질이 되기 쉽다. 생필품을 훔치고, 세탁물에서 나온 물건 몇 가지는 슬쩍하고, 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아이를 훔친다. 이 행위에 대해서 국가는 어떻게 답할지 명확하다. 그 답은 정의롭겠지만 최선의 답일까.
<어느 가족>은 이런 질문들을 품고 담담한 연출과 정직한 화면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등장인물들의 외면과 내면을 보여주기에 필요한 순간들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가족>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계속해서 걸어가다 어느 순간 주저앉는다.
*글의 제목 '우리가 훔친 기적'은 강지혜의 시집 제목인 <내가 훔친 기적>에서 변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