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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Dec 28. 2015

#prologue

그리하여 이것은 실패의 기록

뭐, 막연한 그림이 둥실둥실 떠오를 때가 있다. 주로 마감을 앞두고. 내 경우는 어딘가 현실과 유리된 곳에선 글도 술술 나오리라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기분이 들곤 한다. 


특히 글이 안 나와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보면 이국적인 풍경들이 눈앞에 둥둥 떠다니고, 지난 여행에서 강렬한 추억을 남겼던 온갖 경험들이 기억을 자극한다. 맛있었던(혹은 끔찍이 맛없었던) 요리, 더운 날 시장을 구경하다  목말라 죽기 직전 마셨던 커피 한 잔, 골목길을 헤매다 방향을 잃었을 때 만났던 현지인, 아직도 용도가 짐작이 안 되는 현지의 기념품…. 


이런 걸 끊임없이 되뇌고 있다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인터파크투어 앱을 열어 그곳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해야겠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에 사로잡힌다. 내가 사랑하는 그곳의 텁텁한 공기 속에 앉아 있으면 걸작을 뚝딱 뽑아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서 강렬히 펄럭대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명작을 낳은 온갖 예술가들의 이름은 훌륭한 근거가 된다.


홍콩 부두. 사진은 여행기와 아무 관계 없습니다. Copyright 2012, 라이카. All Rights Reserved.


물론 환상이다. 정작 도착하면 지루하게 노트북을 들여다볼 바에야 수영장 베드에 누워 낮잠이라도 자자는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생각이 든다. 그게 어디가 됐던―정말 어디건, 사막 한복판이라도 여튼 일상이 아니라면―보고 먹고 놀고 자고 쉬느라 얼마나 바쁜데. 하다못해 심심해서 호텔방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닐지라도 노트북은 들여다보기 싫다는 이상한 집념이 불타오르기 마련이다. 이젠 경험자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저기요, 여행지에서 일을 하겠다는 허황된 생각으로 노트북을 들고 가실 생각이라면 차라리 추리소설을 한 권 더 들고 가세요, 진심입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실패의 기록. 야심 차게 노트북을 들고 명작을 가볍게 두어 편 써오겠다는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지만…. 놀멘놀멘 숙소에 누워 자고, 일어나 조식을 먹고, 빈손으로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더없이 빈곤하지만 사치한 여행. 정작 여행 가기 전에 써야지 했던 글은 단 한 자도 쓰지 않은 그런 나태한 여행. 지금 시작됩니다. 커밍 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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