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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Jan 18. 2016

#6. 나홀로 방콕

방콕에서의 마지막, 진짜 마지막 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뒤척뒤척, 연달아 이리저리 몸을 돌려봐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의 밤은 관광 도시 방콕의 명성을 빛내듯 밝았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건너편 침대를 노려보았다. 모두 잠든 밤, 박장대소하며 신난 두 명의 숙박객이 보였다.


도미토리가 다 그렇다.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놓인 침대에 조심히 몸을 뉘이면 꼭 통조림 캔에 든 완두콩이 된 것 같다. 얌전히 누워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작은 완두콩들. 문제는 우리 방에 몹시 시끄러운 중국산 완두콩 두 알이 있었다는 점이다(중국인에 대한 비하나 차별 의도는 없음을 밝힌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그리고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앉아 담소를 나누곤 했다. 친애의 담소, 좋다. 정말이다. 다만 그것을 남은 8명이 숙면을 취하고 있는 도미토리에서 할 필요는 없잖나. 사실은 하면 안 되는 거지, 그게 에티켓이니까. 


나는 소음에 매우 민감한 인간이라 그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뒤척거렸다. 그들이 입을 다문 건 본인들이 잠을 자는 다섯 시간 정도였던 것 같은데―지금 생각하면 정말 체력도 알아줄 만했다, 다섯 시간을 자고 다시 일어나 앉아 수다를 떨곤 했으니까―진심으로 본인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안 그러면 해도 뜨지 않은 시각에 침대 헤드를 탕탕 치며, 마디마디 대소하며 떠들었을 리가 없지. 내 건너편에 누운 서양 여성은 소음이 심해지면 중국 완두콩들에게 들으란 듯 신경질적으로 옷이며 수건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는데, 그들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몇 번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데도 계속 그런 걸 보면 아예 신경을 안 썼던 걸지도 모르고.


최언니를 보내고 난 첫 날은 호스텔에 짐만 맡겨 두고 터미널21의 스타벅스에 앉아 밤늦게까지 모니터를 노려봤기에 이 사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이튿날부터였다. 해도 안 뜬 푸르른 새벽에도, 적당히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들어와 씻고 누운 저녁 즈음에도, 잠이 들 만한 깊은 밤에도 그들은 계속 속달거렸다.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눕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음악이 잦아들 때쯤 되면 어김없이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그들에게 유독 부루퉁해 보였던 서양 여성의 태도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계속 이랬나 보군. 아이고야.


덕분에 두 명을 제외한 도미토리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묘한 동질감이 흐르곤 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거나, 혹은 그들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왁자지껄 시끄럽게 웃음을 터뜨릴 때면 숙박객들은 서로만 알 수 있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입가에 슬몃 미소를 떠올리기도 했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사람도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본디 도량이 좁디좁은 사람이기에 웃음은커녕 실소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진심으로 중국 완두콩들과 방을 함께 쓰는 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종내에는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만 들리면 진심으로 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오랑우탄이라면 항의와 경계의 뜻으로 배설물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른다. 운이 없게도 안 맞는 완두콩과 한 캔에 수납된 탓에 나는 계속 매우 기분 나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묵었던 수쿰윗의 호스텔. 시설만은 흡족했지만! (출처: https://plus.google.com/117556107580316272913)


사실, 그 문제만 제외한다면 호스텔은 꽤 흡족했다. 아속 역과도 가까웠고, 출입 시간에 제한도 없었고, 비디오룸이나 키친, 플레이 룸을 모두 제공했고, 넉넉한 개수의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방콕에서 호스텔에 머물렀던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런 곳이라면 꽤 괜찮다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완두콩들은 꽤 긴 일정으로 태국에 놀러 온 모양이었고 이대로라면 나는 나흘 간 잠을 이루지 못할 게 뻔했다. 최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 몸이 꽤나 안 좋았기에 잠까지 못 이룬다면 그야말로 몸 상태가 너덜너덜해질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새벽 여섯 시,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호텔로 옮겨야지.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휴대폰으로 근처 호텔을 뒤적거렸다. 당장 예산이 부족했기에 호텔을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흑흑, 언니들 가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짬짬이 최언니에게 당시의 상황을 일러바치며 나는 한탄했다.


고심 끝에 나는 두 개의 호텔을 골랐다. 한 곳은 더 데이비스 The Davis, 스쿰빗 쏘이 24에 위치한 호텔로 방콕 최초의 부띠끄 호텔로 유명한 곳이다. 예전 여행에서 나는 이곳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조용하고 넓은 데다 뭣보다 한국인이 드물어 흡족했었다. 수영장도 한적하고 근처에 마트와 편의점, 맛집과 마사지 샵까지 위치해 있어 멀리 나갈 필요가 없기도 하고. 쏘이 24의 초입에는 방콕 최초의 고급 쇼핑몰 엠포리움 백화점과 최근 개장한 엠쿼티어가 있어 쇼핑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다른 한 곳은 아속 역 근처의 작은 비즈니스호텔이었다. 골목으로 상당히 들어가야 했지만 그건 데이비스 호텔도 마찬가지였던 데다, 이후 일정을 이속 근처에서 소화할까 생각 중이었기에 뭣보다 그 근처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격도 저렴했던 데다 당시 재개장해 시설도 훌륭할 듯싶었고, 오며 가며 나나 역 야시장을 보기도 좋을 것 같았다.


곰곰 고민 끝에 나는 두 번째 호텔에 묵기로 결정했다. 저렴한 가격도 마음에 들었고, 아무래도 더 데이비스보다 사람이 적을 것 같기도 했다. 워낙 사람이 많은 호텔을 싫어하거니와, 한 번 바쁜 호텔 측의 실수로 더위를 먹어 졸도하며 짜오프라야 강에 추락할 뻔한 이후로는 특히나 사람이 적은 호텔을 선호하게 됐다. 나는 단호하게 예약 버튼을 누르고 서둘러 결제를 마쳤다. 


만일 이게 드라마였다면 장면 아래 굉장히 불길한 느낌의 BGM이 깔리고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 따윈 없었다. 그저 새로운 숙소에 대한 희망에 들떠 나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일단 호텔을 옮기고, 짐을 좀 풀어 두고, 깨끗이 씻고,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몸으로 하얀 침대에 누워 잠을 좀 청해야지. 밤에는 씨암이나 엠쿼티어에 나가 봐야겠다. 짐을 꾹꾹 눌러 담으며 나는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그릇된 결정이었다. 사람은 적었지만 적은 이유가 있었고, 골목 끝이라도 더 데이비스처럼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택시 기사는 호텔 이름을 듣고도 처음 들어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았느냐고 나에게 물었었는데, 나야말로 궁금하다. 어떻게 맞는 조건을 찾다 보니 나온 호텔이었는데 하필 그런 곳을 선택했을까. 후회는 언제나 늦다.


그래도 외관은 번듯한 편이었다. 내부는, 어휴, 말을 하기도 싫다.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며 나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텅텅 비어 있는 건물에, 구석구석엔 제대로 보수조차 하지 않은 듯한 시설들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는 유리가 깨져 있었고, 안내문조차 제대로 붙어있지 않았다. 방 안은 더 가관이었기에 부언하기도 싫을 정도다. 이불은 제대로 빤 건지 의심―침대에 깔려있는 이불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서랍장에 들어있는 이불은 진심으로 손도 대기 싫었다―스러웠고, 냉장고는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게다가 에어컨과 창문에는 시커먼 먼지가 잔뜩 껴 있었고, 어지간하면 호텔의 카펫에 대해 불평하지 않지만 이곳은…. 아니, 이만 생략하도록 하자. 혹시라도 식사를 하면서 이 글을 읽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나는 이 호텔의 이름을 포스팅에도 명기하지 않을 생각인데, 실수로라도 여길 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농담 같지만 일백 퍼센트 진심이다. 혹시라도 아속 역과 나나 역 사이에, 골목 깊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과거에는 체인 호텔이었지만 지금은 자가 브랜드인, 그리고 사진 상으로는 수영장이 꽤 멋있어 보이는 호텔을 가려는 분이 있다면 먼저 내게 말해주시길. 도시락을 싸야 하니까, 당신을 말리러 다니기 위해 말이다. 


뭐, 어쨌든 혼자 있을 수 있는 것만은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나는 호텔의 침대에 벌러덩 누워 생각했다. 중국 완두콩들이 아니었다면 호스텔에서 계속 머무르다가 남은 일정을 좀 더 좋은 호텔에서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나는 이미 매우 지친 상태였다. 체했고, 이유 모를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때때로 머리도 아팠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밤마다 정말 간절히 기원했다, 잠이라도 제대로 자게 해달라고. 하지만 중국 완두콩들은 매우 화목한 밤을 보내고 있었고, 조용히 해달라는 요청 따윈 갈비 국수를 마시듯 후루룩 씹어 넘기는 대범함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호텔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국 끝 간 데 없이 예민해져 호스텔에서 미친 사람처럼 발광했을지도 모른다.


샤워를 하고 한동안 누워 쉬고 나니 날카로워진 신경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텔 컨디션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실은 돈이 아까워질 정도였지만 혼자 있을 수 있단 사실만은 위안이 됐다. 이제 밖에 나가 봐야지, 나는 꾸물꾸물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낙후된 시설을 친절한 서비스로 조금이나마 갈음하려는 건지, 직원들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고객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했고, 빈말도 잘했고. “넌 한국 사람답지 않게 영어를 굉장히 잘한다!” 나가는 길에 만난 호텔의 벨보이―라지만 나이로 보면 이미 집에 아들이 여럿 있을 법한―가 내게 말했다. “내가?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영어를 잘해. 그에 비하면 나는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편인걸.” 벨보이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말했다. “아냐, 내가 본 한국인들에 비해 넌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걸.” 자기가 봤다는 데야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칭찬에 괜히 반박할 필요도 없어서 나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벨보이는 나나 역이나 아속 역 근처로 가는 툭툭도 운전해줬는데, 내가 나가서 툭툭을 찾을 때마다 오, 코리안 걸!―나 역시 걸이라고 불리기에 매우 난감한 나이라는 것을 잊은 듯이―하고 웃어줬다. 이 호텔에 대한 좋은 기억은 이 분이 유일하다.



설렁설렁 나가 프롬 퐁 역의 엠포리움과 엠쿼티어에 도착했다. 이곳을 돌아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한다. 딱히 쇼핑한 것도 없고, 살까말까 들었다놨다 했던 가방 두 개의 모양새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기엔 우리의 시간이 너무 아까우므로. 엠포리움을 돌아보는 것이 재미있었다고만 말해두자. 이 백화점은 재개장 이후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새롭게 바뀌었는데, 나만 해도 마주보는 엠포리움과 엠쿼티어 중 어느 쪽이 엠포리움인지 알 수 없어 두 곳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예전 엠포리움을 가 봤던 사람이라도 그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리라고 장담한다. 방콕 최고의 쇼핑몰이라는 수식어를 되찾겠다는 야심은 대단해서 지나가면서 얼핏 바라만 봐도 그 규모와 인파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심지어 내가 엠포리움을 방문한 주간은 재개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라, 씨암 스퀘어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파도에 쓸려다니는 소라게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기만 했다. 


그 넓디넓은 백화점 두 군데를 헤매고 다닌 것은 꽤 피곤한 일이어서, 저녁에 다시 침대에 누울 때쯤 나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 오늘만큼은 근처의 바나 24시간 까페라도 나가 글을 쓰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세상에, 분명 글을 쓰겠다고 방콕으로 날아온 것 같은데! 비행기를 타기 전 야심차게 노트북을 챙겨 넣던 과거의 나에게 애도를 보내야 할 판이었다. 


와서 어떤 글을 썼지? 첫째, 여행 경비 가계부. 이건 글이라고 할 수 없으니 빼고. 둘째, 영화 리뷰. 그래, 이걸 썼구나. 굳이 방콕에서 쓰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는 걸.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작 쓰려고 했던 글은 한 자도 못 쓰고 엉뚱한 글만 썼다. 그것도 억지로, 들고 나온 노트북에 무안해서 몇 자 끄적인 데 지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에라, 다시 침대에 대 자로 누웠다. 엉뚱한 짓을 했군! 나는 혼자 낄낄거렸다. 앞으로는 절대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리라는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아야지. 그날 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물론, 이때의 나는 1바트까지 열심히 맞춰 쓴 가계부가 후일 이 여행기를 쓸 때 지대한 도움을 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교통비부터 간식까지 하나하나, 장소와 항목까지 적어놓은 덕분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여행기를 쓰면서도 어렵잖게 그때의 기억들을 복기할 수 있었다. 음, 어떻게 보면 여행이 글 하나를 낳긴 낳은 셈이다. 내가 상상한 류의 명작은 전혀 아니었지만, 뭔가 쓰게 만들기는 했으니 영 헛된 일은 아니었다고 봐야 할까. 다행은 다행이었다. 영 예상치 못한 다행이긴 했지만. 하하.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역시 잠이란 중요한 것이군! 나는 침대 시트 위를 뒹굴거리며 생각했다. 숙면을 취한 것만으로 컨디션이 상당히 나아져 있었다. 오늘은 뭘 할까, 생각하다 문득 남은 경비가 얼마인지 궁금해졌다. 소중히 들고 다니던 경비 봉투를 열어 남은 금액을 확인했다. 


헐, 뭐가 이렇게 많이 남았지. 나는 남은 금액을 보고 잠시 아연해졌다. 이제 일정이 갓 이틀도 남지 않았는데 경비가 대략 총 예산의 45%정도 남아 있었다. 분명 최언니와 하언니가 있을 때는 예상대로 소비하고 있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언니들이 돌아가고 난 이후 식사며 간식이며 대체로 길거리 음식이나 Pier21 등 저렴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었나, 나는 봉투에 남은 돈을 꼼꼼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단순히 밥을 먹고 마사지를 받는 걸로는 모두 소비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음, 그렇다면 오늘과 내일은 과소비의 날로 정한다. 역시 잼중의 잼은 탕진잼이지. 어차피 다시 환전해봐야 환차손만 보는 거, 방콕에서 모두 탕진해버리고 갈 테다! 나는 야심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소홀했던 먹부림을 위해 오늘은 씨암을 나가야지. 나는 바로 씻고 씨암으로 향했다. 물론 인생은 예상처럼 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이날 씨암에서 운명처럼 내 전재산을 모두 털어간 가방을 만나게 된다…!


씨암에 도착해 가장 먼저 간 곳은 9th cafe라는 레스토랑이었다. 크레이프 케익도 잘하고, 개인적으로 여러 파스타도 좋아하는 곳이다. 가격이 가격인지라―식사에 음료, 디저트까지 넉넉히 먹으면 메디치의 런치 코스보다 더 나올 수도 있다. 실제로 나도 그렇게 지불했고―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방콕에 오면 한 번씩은 꼭 들른다. 아침 겸 점심을 여기서 먹기로 한 이유는 남은 경비를 소모하는 데 나인스 카페처럼 마땅한 식당이 떠오르지 않았고, 씨암에서 쇼핑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사는 당연히 맛있었다. 날치알 파스타와 타이 전통 퀴진인 듯한 닭 날개 튀김을 먹었는데, 파스타는 여전히 맛있었고 튀김은 다소 애매한 맛이었지만 향신료를 적절히 사용한 양념만큼은 흡족했다. 


우스운 것은 묘한 불운이 또다시 은근슬쩍 날 스치고 갔던 거다. 분명 소다수가 베이스가 된 음료를 시킨 것 같았는데, 정작 나온 것이 땡모반이었다. 그냥 두고 마실까, 바꿔달라고 할까 고민하다 그래도 시킨 걸 먹어보자 싶어 종업원을 불러 바꿔달라고 했더니, 아…! 


나는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앞서 맹렬히 질타한 페퍼민트 티 플롯만큼은 아니었지만(이건 진짜 생산을 금지해야 하는 음료다) 그냥 땡모반을 먹을 걸, 후회가 남는 맛이었다. 이맛도 저맛도 아닌 느낌이랄까, 소다는 큼큼했고 층을 이뤄 위에 올라간 음료는 뭔지 몰라도 향이 몹시 인공적이었다. 나는 사진을 한 장 찍는 것으로 이 음료에 대한 관심을 거뒀다. 에잇, 젠장. 끝까지 음료가 말썽이야. 나는 조용히 인상을 찌푸렸다.


모든 불운을 음료에 쏟아붓다. Copyright 2015, 라이카. All Rights Reserved.


여하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음료를 제외하면 나인스 카페의 식사는 만족스러웠으므로 나는 팁을 두둑히 놓고 가게를 나섰다. 씨암을 어슬렁대며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말했던 것처럼 씨암 스퀘어와 씨암 센터는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한데,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하루 종일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분명 있을 듯하다. 씨암 센터는 중간 중간 관광객들이 앉아 쉬도록 커다란 소파를 둔 데다,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가진 사람이 편하게 쓰도록 콘센트가 달린 테이블도 제공하니까. 돌아다니다보면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 등을 충전하며 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나도 이날 어디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주저앉아 글을 쓸 요량으로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었는데, 한글로 무언가를 끄적이면 굉장히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내 노트북을 바라보는 태국 여학생들 무리 덕분에 본의 아니게 한류 스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보기도 했다. 하마터면 손이라도 흔들어 줄 뻔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한 층 위의 푸드 코트에서 살살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취하기도 하고, 옆 사람이 보는 한국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훔쳐보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훌쩍 시간이 흘러 있었다. 못해도 두어 시간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듯했다. 몇 시간이고 앉아있어도 상관없는 자리였지만 이제 좀 걷고 싶었으므로 나는 노트북을 챙겨 일어섰다. 말했다시피 오늘은 남은 예산을 펑펑 쓸 생각이었으므로 씨암 센터에서 저렴하고(중요하다!) 마음에 드는 잡화라도 있으면 좀 사 갈 생각이었다. 지하에 세포라가 있으니까 마땅한 게 없으면 화장품이라도 사가면 되겠지?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쇼핑에 나섰다.


씨암 센터의 한 테이블에서 보이는 씨암 센터의 정경. Copyright 2015, 라이카. All Rights Reserved.


씨암 센터에는 정말 예쁘고 독특한 잡화들이 가득하다. 나는 어디를 가던 그 나라 고유의 브랜드 물건을 하나쯤은 사 오는 편인데,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방콕 최고의 쇼핑몰은 무조건 씨암 센터일 것이다. 대부분 자가 브랜드인 데다, 꼭 필요한 잡화들이 대다수다. 의류 등은 태국색이 너무 강해 꺼려진다고 해도, 가방이나 지갑, 혹은 의류 잡화들은 품질도 좋고 독특한 것들이 많아 사오기 좋다. 나도 그런 잡화들을 구경하다가 유리로 동그랗게 만들어놓은 한 가게에 들어섰다. 알고 보니 이곳은 태국에서 꽤나 유명한 브랜드의 잡화점이었다. 오, 여기가 거기구나. 나는 가게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헐. 나는 공중을 보고 멍하니 섰다. 이곳에서는 독특하게 가방을 허공에 디스플레이해 뒀는데 내가 보고 첫눈에 반한 ‘그 가방’도 그랬다. 이거 너무 이쁘다! 나는 탄성을 내지르며 가방을 손에 들었다. 손에 딱 맞았다, 아니, 안 맞아도 맞는 것 같았다. 마치 내 손에 스스로 뛰어든 것 같았다. 세상에…! 나는 이유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스포츠 해설자처럼 말하자면 그렇다, 바로 그 순간 게임은 끝난 거다. 


생각해 보면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가방을 하나씩 사오는 것 같은데, 그렇대도 내가 이 여행에서 가방에 전 재산을 털릴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씨암을 돌다가 우연히 이 가방을 보고는, 그 가방을 본 순간만큼은, 보자마자, 가방이 눈에 뛰어든 것처럼, 다른 생각이 필요 없었다. 아, 이건 무조건 사야겠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현지 통화로 네 자리 수를 거의 꽉 채운 가격표를 보고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이 뭐에 홀리면 옆에서 저질러라 저질러라 속삭이는 것마냥 반쯤 정신이 나가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다들 한 번쯤은 겪어본 경험이리라고 생각한다. 오, 가방느님이시여 내게 축복을 내리사 방콕에서 서울까지 걸어갈 뻔하게 만드시고! 사실 모든 의류가 그렇듯이, 이게 없으면 당장 쇼크사 등의 질병으로 급사하는 경우는 없다. 다만 사지 않으면 급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쉽게 말해 그때 내가 그 가방을 보고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됐다는 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게를 나오는 내 품에는 더스트백에 든 가방이 소중히 들려 있었다. 그때 내 표정을 누가 찍어놨다면 50년짜리 놀림감이 되었을 텐데! 진짜 뭐에 홀린 것처럼 가방을 사 가지고 나오는데 멍할 지경이었다. 물론 내로라하는 명품만큼은 아니지만 궁핍한 여행객에게는 꽤 고가의 가방이었는데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구매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다. 


그 가방이 내게 얼마나 과감한 소비였는지 쉽게 설명하자면, 방콕에서 그간 10일 쓴 돈을 다 합해도 가방 하나의 가격보다 적었다. 아무리 남은 경비를 모두 쓰고 나오자고 작정하고 나갔어도 참 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대략 전체 여행 예산의 반이나 되는 돈을 씨암 센터에 뿌리고 온 셈이다. 내 눈물과 한숨도! 물론 그 가방은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데일리백으로 잘 매고 다니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놀랐던 그 기억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충동과 유혹이 난무하는 사행성 게임 따위는 절대 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한 계기가 됐다고나 할까. 푸하하하.


남은 금액을 기념품이나 선물 등을 구입하는 데 소소히 소모하고 나니 어느덧 바깥은 시커멓게 어두워져 있었다. 기념품이나 선물이래봐야 대단한 건 아니었다. 이번에 함께 오지 못해 아쉬워했던 친구를 위해 친구가 좋아하는 과자를 좀 사고, 예전에 방콕에 와서 사용해보고 꽤 좋았던 헤어트리트먼트도 몇 통 사고, 방콕 스타벅스에서만 파는 벤티 텀블러도 구입했다(이 텀블러는 여행기를 쓰는 지금도 내 책상 위에 있다. 이걸로 차를 마시다 보면 물먹는 하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다 사고 보니 한 짐이라 호텔에까지 가는 것만도 일일 정도였다. 마켓에서 솜씨 좋게 꾸려준 짐을 들고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호텔로 들어가니 그 벨보이가 오, 쇼핑 데이! 하고 과장되게 놀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예스! 힘차게 대답하고 답지 않게 낄낄 웃어보이고는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어떤 방콕. (출처: http://lj.rossia.org/users/shafir)


나는 호텔 방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물건들을 다소 아연해 바라보았다. 짐이 새끼라도 친 건지 넘치다 못해 거의 흘러나와 있었다. 방콕을 사랑하는 만큼 산 거야…. 들을 사람도 없는 변명을 주절거려 보았지만 딱히 위안은 되지 않았다. 하마터면 산만큼 버리고 올 뻔했지만, 현명하게도 마지막 날을 쇼핑과 탕진으로 보낼 것을 미리 예상한 듯 쇼핑백을 미리 사 뒀기에 모두 한국으로 바리바리 싸 올 수 있었다. 버리며 살아야 한다는데 뭘 이렇게 바리바리 가져가는 건지. 혹시 버릴 게 없나 아무리 살펴봐도 오히려 보탤 게 보이면 보였지 버릴 건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그래, 다 싸 가자! 나는 기진맥진해 자리에 주저앉았다.


짐을 다 꾸리자 드디어 방콕의 마지막 밤을 보낼 준비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일이면 귀국이네, 꽉 닫힌 캐리어를 보니 묘한 감회가 밀려들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호텔 방 밖으로 보이는 방콕의 야경을 휘이 둘러보았다. 


아니, 아니다. 나는 방금의 생각을 수정했다. 나는 아직 방콕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방콕의 밤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보면. 구석진 곳이기에 루프탑 바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하게 아름다운 야경은 되지 못했지만, 불빛이 다 꺼진 조용하고 적막한 그 골목도 내가 사랑하는 도시 방콕이었다. 냄새가, 어둠이, 소리가 온 몸으로 자신이 방콕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 삐죽이 솟은 마천루와 무너질 듯한 판잣집이 서 있고, 매캐한 매연이 흘러와 고약한 냄새를 내뿜었다. 


아마 누군가에게 방콕의 밤을 묘사하라고 한다면 화려하게 빛나는 마천루와 쇼핑몰, 번쩍번쩍 광채를 내뿜는 불탑과 유유히 떠가는 짜오프라야의 크루즈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방콕을 말하라고 한다면―나는 밤의 적막을 깨고 들려오는 오토바이 택시의 소리에 빙긋이 웃었다. 그래, 이게 방콕이지. 낭만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것 같은 메마른 도시에 넘쳐흐르는 고전적인 낭만과 풍취가.


다섯 번째, 그리고 이번에만 열흘의 방콕! 이제 방콕은 그만 와도 될 것 같아, 지겨우려고 해. 먼저 간 최언니에게 맘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것은 생각도 못하고 나는 또 감회에 차 방콕의 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딱히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풍경에도 이렇게 멍하게 홀려버리다니, 이러니저러니 괜한 소리를 해도 결국은 방콕이었다. 가끔은 가장 평범한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운, 내 사랑 방콕! 가방은 꽉 채워 가도 결국 내 마음은 두고 가는구나, 언제나처럼. 푸하하, 나는 혼자 웃으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방콕에서의 마지막, 진짜 마지막 날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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