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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Dec 28. 2015

#0. 저렴한 항공권으로 파산 시작하기

여하튼 저, 여행 갑니다

어느 날 대학 동기 최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나 방콕 갈 건데, 같이 갈래?] [나야 언제나 가고 싶지. 내가 바로 방콕에 살고 방콕에 죽는 여자, 방콕 없인 못 사는 여자. 근데 돈이 없어. 아쉽.] [그래? 그럼 너 여행 다녀온 정보나 좀 내놔] [그럴까?] [ㅇㅇ 여행안내서는 너로 대신하겠음] 그래서 노트북을 들고 언니를 만났다가 무심코 조회해본 타이항공의 30만원 상당 항공권에 홀렸다는 거다, 이 여행의 시작은.


“아니어떻게이럴수가있지내가작년9월에진에어를35만원에끊어서다녀왔는데타이항공이30만원이라니이게가능한가격이야아무리비수기라도?” 숨도 안 쉬고 감탄사인지 한탄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어지간히 나오기 힘든 가격이니까. 방콕을 다섯 번 다녀왔는데 한 번은 성수기라 그렇다 치고, 다른 네 번은 모두 비수기 저가항공을 타고 다녀왔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저것보다 아슬아슬하게 비쌌다. 저가항공, 여섯 시간 비행에 밥은커녕 제대로 된 음료도 한 잔 안 나올뿐더러 꼬꼬마인 나조차 찌그러져있어야 하는 비운의 좌석을 갖춘 비행기들. 근데 왜 타이항공이 더 싸지? 바로 내가 호갱이었던 것 같은 아찔한 감각, 하하.


탄식을 누르고 일단 방콕 여행이 확정된 최언니에게 빨리 표를 끊으라고 닦달했다. 내가 35만원에 저가항공을 타고 다녀온 건 다녀온 거고, 갈 사람은 좋은 비행기 타고 가야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단 비행기 표 예매를 하고, 아니 시키고, 다회의 방콕 여행 경험으로 얻은 귀중한 정보를 무료나눔한 뒤 집에서 언제나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음, 당연히 집중의 ㅈ도 안 되더라는 소리다. 최언니는 비행기 타고 내 사랑 방콕에 간다는데, 나는 한국 모 소도시에서 히키코모리 될 지경이다. 마감 마감 마감 마감…. 반복되는 일상의 루틴은 한 치 오차도 없이 날 찾아올 거고 똑같이 죽을 만큼 지루하겠지. 최언니는 방콕을 간다는데. 방콕을. 방콕을! 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심각. 엄숙. 고민! 갈까 말까?


에이 그래 모르겠다, 가자! 고민한 시간은 짧았다. 엄마 나 다음 주에 방콕 가! <여행 소개서> 이름 김땡땡. 나이 땡땡살. 성별 여자. 주소 모 소도시. 여행에 지원한 이유. 아무 것도 하기 싫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아무 것도 하기 싫다… 이러고 있는 동기 언니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저 사람을 구제해줘야 할 것 같아서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사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고요, 갈지 안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항공권 가격이 야금야금 오르는 걸 보니 어쩐지 조바심이 나서 결국 결제하고 말았습니다. 밖에서 결제하느라 여권 번호도 몰랐는데 고민하다 이미 여권 번호를 등록해둔 면세점을 뒤져서 알아냈습니다. 저는 이렇게 순발력과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여행 면접이란 게 있다면 이렇게 대답하면서 여행을 시작했을 거다. 없으니까 그냥 패스. 여행 준비나 하자. 마감을 서둘러 마치고, 웹진에 한 주 쉬겠다는 양해를 구하고, 옷도 좀 사고, 짐 싸고 스케줄도 좀 조정하고. 여하튼 저, 여행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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