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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Dec 28. 2015

#1. 함께하는 여행이란 보험 같은 것

보험 만기, 혹은 해지환급금 0원!

최언니로 말하자면 대학 때 가장 절친했던 동기 사이다. 대학에 대해 그렇게 좋은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혹시라도 고등학생이 있다면 전공 선택 신중히 하시길. 진심으로!―나는 회기동 쪽으로 머리도 두지 않는데, 최언니와 깔깔대며 온갖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 건 아직도 인상 깊다. 서로 휴학을 여러 번 해서 함께 학교를 다닌 기간은 길지 않지만 내 경우 대학 동기 중 유일하게 연락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번 여행은 최언니와 함께 가는 첫 장기 여행인데, 사실 최언니도 그랬다지만 나도 살짝 걱정했었다. 1박 2일 짧은 나들이는 함께 간 적 있지만 돈과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투자해야 하는 장기 여행은 또 다를 수 있으니까. 함께 가는 여행이라는 게 원래 보험 계약 같은 거다. 수지맞으면 만기에 보험금 잘 타는 거고, 아닌 경우 <상기 보험계약은 중도 해지 시 해지환급금이 이미 납입한 보험료보다 적거나 없을 수 있습니다>. 두둥, 땅땅땅. 쉽게 말해 좋은 마음으로 여행길에 나섰다가 돈 낭비하고, 기분 상하고, 사람까지 잃을 수 있단 거다. 


그러니 최언니와 함께하는 여행에 대해 아예 걱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최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몽글몽글 끓어올랐다면 굉장히 애틋하고 감성적인 여행기가 되었겠지만, 거짓말은 안 되니까 패스. 돌바닥에 끌리는 캐리어처럼 내 마음도 덜컹덜컹,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흔들흔들. 최언니와 함께하는 여행을 잔뜩 기대하면서도 좋은 요 아래 삶은 콩을 한 알 두고 누운 것처럼 나는 아주 약간 불안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에서 출발한지 약 20여 시간 후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갈 무렵에는 그런 불안감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엄청 피곤했다, 전날 공항에서 노숙했거든. 교통이 매우 안 좋은 소도시에 살다 보니 공항 가는 차도 여의치가 않다. 공항버스 첫 차를 타도 항공 출발 한 시간 이십여 분 전 도착인데, 어쩐지 아슬아슬할 것 같은 기분. 그래서 큰맘 먹고 공항 노숙을 선택했더랬다. 


노숙이란 춥고, 배기고, 잠을 자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짐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는 불편한 반나절을 견디는 것이 취미가 아니라면 안 하는 게 나은 짓인데―안타깝게도 난 아니었다. 쉽게 생각했다가 뒤척뒤척, 잠은커녕 배기는 허리를 붙들고 고생만 했다는 소리다. 게다가 공항서 타이밍을 놓쳐 화장실도 못 갔고, 건조한 기내에 오래 있었더니 피부가 쨍그랑 깨질 것 같았고, 설상가상 택시에서 바가지를 써서 여러모로 기분도 언짢았다. 태국 여행 경험 5회를 자랑하는 내게 바가지를 씌우다니! 얼마 안 되는 돈을 써서라기보다 왠지 바가지를 썼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 투덜투덜대면서 방으로 걸어들어가는데 쨘, 최언니가 날 기다리며 방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얼굴이 마주치자마자 푸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최언니는 더운 나라에서 입을 만한 나풀나풀한 드레스를 입고―참고로 최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 보인다―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왔다. 누군가 나를 반긴다! 언제 어디서, 상대가 누구더라도 절로 웃음이 나는 일인데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단다. 피로가 반쯤 풀리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약 15년쯤 못 본 사람들처럼 얼싸안고 소리를 지르고, 너무 보고 싶었다고 경쟁하듯 왁왁댔다. 최언니는 혼자 여행하려니 너무 심심하고 외로웠다고 하소연을 했고, 나는 빨리 오고 싶었다고 쟁쟁거렸다. 이산가족이 상봉했다면 이랬을까, 우린 유난스럽게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아, 참고로 그날은 목요일이었고 우린 불과 지난 일요일에 만났었다. 푸하하.


여행지의 공기는 기분을 별스럽게 만드는 힘이 있다. 피곤도 잊고 즐겁게 떠들다 땀을 씻어내고 꼬꼬마들처럼 우와 밖으로 뛰어나갔다. 만났으면 먹어야지. 기분이 좋아도 나빠도, 지쳐도 피곤해도 졸려도 먹어야 한다. 여행이니까. 아니 사실은 최언니와 내 삶의 모토가 그렇다. 우린 만나면 무조건 먹는다. 심지어 방콕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먹어야 한다. 우리는 재회 기념으로 온갖 타이 퀴진을 정복하겠다는 각오로 뛰쳐나갔다. 


쪽포차나 외부 정경. 상단에 한글 메뉴가 걸려 있다.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오늘 저녁은 최언니가 혼자 도전했다가 닫혀 있어서 실패하고 쓸쓸히 돌아왔다던―방콕 맛집, 특히 포차나나 시푸드 음식 전문점에 갈 때는 개장 시간을 알아가야 한다. 참고로 쪽포차나는 오후 다섯 시―쪽포차나. 예전에는 뿌빳뽕커리와 모닝글로리 볶음으로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는 정도였는데, 한 번 두 번 방콕 검색을 하다보니 어느새 방콕 맛집이 돼 있어서 신기했던 곳이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미리 말씀드리자면 쪽포차나는 카오산을 방문하거나 근처에서 숙박하신다면 한 번쯤 방문할 만하지만 굳이 시간을 내서 찾을 필요는 없는 정도다. 맛이나 가격이나. 시내에 묵는다면 다양한 시푸드 요리 전문점이 있고, 꽝시푸드나 쏨분시푸드, 쏜통포차나 같은 곳도 있으니 그쪽으로 가도 된다.


쪽포차나 외부에는 다양한 추천 메뉴가 쓰여 있다. 특히 한글로 쓰인 메뉴는 외국에서 한글을 봤을 때 으레 그렇듯 엄청 눈길을 끈다. 게 커리, 팟타이, 볶음밥, 똠양꿍, 모닝글로리, 새우 회, 새우 구이 등을 추천해 뒀는데 취향대로 주문해 먹으면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첫 방콕 여행때 똠양꿍 전문 요리점 똠양꿍에서 똠양꿍을 시켰다가 똠양꿍 냄새에 기겁해서 그대로 놓고 나온 기억 때문에 똠양꿍은 패스했고, 무난하게 뿌빳뽕커리와 모닝글로리, 볶음밥과 새우 구이만 시켰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주변에 있는 것이라면 머리 위 하늘부터 눈 앞 포크까지 모두 신기해하며 깔깔대고 있자니 드디어 요리가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태국의 첫 끼니로 나를 선택하다니 현명하군요! 요리에 입이 달렸다면 이렇게 말했겠지. 우와. 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나온 첫 번째 요리는 뿌빳뽕커리였다. 



쪽포차나의 뿌빳뽕커리.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뿌빳뽕커리를 보고 있자면 흡사 그 자태가 “자 이제 나를 먹기 위해 수고로움을 감수해 보아라!”라고 외치는 것 같은데, 가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게를 커리에 볶았다 = 게도 먹고 커리도 먹어야 한다 ∴ 게살은 게살대로 발라야 하고 커리 양념에도 신경써야 한다> 즉, 엄청 번잡스러운 먹거리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무척이나 맛있는! 차라리 번거롭고 귀찮은 먹거리인데 맛이 없으면 그냥 사진이나 팡팡 찍고 말 텐데, 뿌빳뽕커리는 비극적으로 맛있다. 하긴 커리도 맛있고 게도 맛있는데 맛있는 것과 맛있는 것이 만나면 더 맛있겠지, 맛 없을 리가 없다. 비운의 음식을 앞에 두고 나는 내 수고로움을 위해 잠시 합장한 뒤 포크를 들고 전투적으로 음식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입 베어물었다. 냠.


첫 마디는 아, 역시 맛있다! 나도, 현지에서 뿌빳뽕커리를 처음 먹었던 최언니도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뿌빳뽕커리는 경이로운 미식(美食)이라고, 나는 흡사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탄복했다. 이러니 살이 빠질 리가 없지.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많으니 다이어트가 힘들 수밖에 없다. 


내가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소식과 운동이고 또 하나는 먹으면 먹을수록 살이 빠지는 평행우주에 가는 거다(얼핏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나는 전자는 N년간 실패해 왔으니 앞으로는 후자에 도전해봐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우주선에 태우면 그 규모가 한 척이 아니라 선단 하나 정도는 되겠네. 성공하면 방콕에서 온갖 시푸드 전문점을 탐방하며 방콕 미식 대행진을 해야지. 뿌빳뽕커리는 이런 생각이 드는 요리다. 


연달아 식사가 나왔다. 차례로 볶음밥과 새우 구이가 나왔는데, 사실 딱히 대단한 실력을 요구하는 종류의 요리는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굉장히 맛이 난다. 뭐든 그렇지만 현지의 맛집에서 먹은 요리는 한국에 와서 찾아 먹으면 고유의 맛이 나지 않는데 다른 요리는 그렇다 쳐도 뿌빳뽕커리나 새우 요리는 어쩐지 그럴 만하다 싶다. 게도 그렇고 새우도 그렇고, 큼직한 건 거의 주먹 만한 것도 있는데 한 입 베어물면 입 속에서 확 터지는 육즙부터가 다르다. 특히 구이요리에 나오는 새우는 껍질을 발라내도 한 입 가득 우적우적 씹을 수 있는 양감을 갖춘 것들이 대부분이라 흡족하다. 물론 현지의 음식을 맛있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비단 재료나 조미료는 아니겠지만 식재료부터가 한국과는 다른 느낌이란 거다. 흑, 나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런 요리를 태국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비극이야! 더 없이 불행한 일이라고! 엉엉.


맛있는 한 끼 식사를 마치고―모닝글로리 볶음은 혼자 싹싹 비우고(짜고 매운 요리 만세!) 새우 구이는 두 개씩 사이좋게 나눠서 냠냠. 볶음밥도 반 갈라 커리에 비벼서 꿀떡. 게눈 감추듯 요리 네 개를 먹어치웠다―우리는 몸은 무겁고 마음은 가볍게 다시 카오산으로 돌아왔다. 다이어트를 해본 사람이라면 굶주림이 사람을 얼마나 날카롭게 만드는지 잘 알 테지만, 반대로 포식은 사람을 더없이 여유롭게 만든다. 배가 빵빵하니 여유롭고 기분이 좋았단 소리다. 


느긋하게 카오산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내가 방콕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 매그넘 아이스크림도 한 입 하고, 이리저리 기웃대며 방콕의 밤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곳에서 따숩고 배가 부른 우리는 무척 행복하고 즐거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카오산과 람부뜨리를 다 돌아다니며 모든 재밌는 일에 한 마디씩 끼고 싶을 정도였다. 최언니와 함께 간 건 이런 면에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언니의 재밌는 일에만 끼어들면 됐으니까. 우리는 카오산과 람부뜨리를 돌아다니며 온갖 것에 모두 감탄하고 대소했으며, 이미 몇 번은 본 광경에도 과장되게 경탄하고 벙글대고 즐거워했다.


카오산 로드.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그러다보니 밤이 깊었다. 내일은 시내에 나가기로 했으므로 우리는 일찍 들어가 쉬기로 했다. 첫 날의 마지막 일정은 마사지였다. 익히 알다시피 방콕은 수준급 마사지로 유명한데, 특히 카오산은 저렴한 길거리 마사지도 꽤 실력이 좋다.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한 시간 남짓의 천국을 다녀올 수 있으니 일정의 마무리는 무조건 마사지로 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우리는 숙소 근처의 마사지 가게를 게으른 사자처럼 는적는적 어슬렁댔다. 여기 어제 간 데 같아. 잘하더라. 최언니는 혼자 있을 때 와봤는데 마사지를 엄청 시원하게 하더라며 가게 하나를 가리켰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 모두 찬성했으므로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가게로 들어갔다. 한 시간 220바트, 둘 다 발 마사지를 선택했다. 가게에서 주는 앞뒤가 헷갈리는 모양의 바지를 입고 매트에 누우면 준비 끝. 마사지사가 들어와 마사지를 해 주는 동안 편안히 누워있기만 하면 된다. 마사지사들은 들어와 알싸한 향이 나는 크림을 다리에 바르고 힘주어 문지르기 시작했고, 노곤해지는 몸을 맡기고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누적된 피로가 몰려와 나는 수마에 잠겼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깜빡 졸았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옆에서 최언니가 날 불렀다. 야, 있잖아. 화득, 놀라 깬 내가 대답했다. 응? 최언니가 누가 들으면 안 될 것처럼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하여간. 낮아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최언니는 속닥거리듯 말했다. 어제 간 데 여기 아니야 이 옆 가게인가봐….


나와 최언니는 눈을 맞추고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킄킄크…. 카오산 4일차, 이제는 카오산 로드가 집 앞 골목 같다던 최언니는 불과 어제 갔다던 마사지 가게를 착각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도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했고 좋은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기에 심각한 일은 아니었지만, 여튼 우리는 최언니의 착각에 어깨까지 들썩이며 신나게 웃었다.


아마 최언니 본인도 모르겠지만, 내게 아주 약간의 걱정이 남아있었대도 그건 그 순간 날아갔을 터다. 겨우 이런 일로?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별것 아닌 일로 함께 웃고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역시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게 이국이건 일상이건, 나를 알고 나와 함께 일희일비할 수 있는 누군가와 먼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번 여행에서 깨달았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함께하는 것이 힘이 되는 누군가가 있다. 여행이라고, 타국이라고 짐짓 겁을 낼 필요는 없다. 힘껏 부딪쳐도 깨지거나 앵돌아질 염려가 없는 사람이라면 무작정 손을 잡고 함께 떠나는 것도 꽤 낭만적인 결과를 불러오더라. 


쉽게 얘기할까. 나는 첫 날 깨달았다. 이번 여행은 내게 예상치 못한 보험 만기가 되겠구나. 잔뜩 만기 수령액을 받아 가야지. 푸하하, 보험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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