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카 Jan 02. 2016

#2. 여행의 진리는 식도락

나는 내가 다녀온 여행의 맛을 하나하나 평생토록 사랑할 것이다

방콕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원래는 람부뜨리 빌리지에서 며칠 더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일정에 변동이 생기는 바람에 숙소 이동을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무척 분주했다. 나는 어제 막 풀었던 짐을 다시 싸고, 최언니는 4일여 간 여기저기 집어던져뒀던 짐을 정리했다. 


여행에서 싸는 짐이란 신묘한 미스터리를 숨기고 있는데, 첫째로는 지퍼를 열면 도저히 저 작은 캐리어 안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막대한 양의 물건들이 튀어나온단 점이고 둘째로는 짐을 다 꾸리고 나면 꼭 캐리어 맨 밑에 당장 필요한 물건이 들어가있단 점이다. 나는 돈을, 여권을, 휴대폰 배터리를 꺼내러 캐리어를 몇 번이고 다시 열었고 최언니는 자신의 캐리어 위에 주저앉아 간신히 지퍼를 잠갔다. 나는 캐리어를 세 번 뒤집고는 기진맥진해 짐을 두 번만 더 싸면 살이 쭉 빠질 것 같다고 혼자 중얼거렸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여행 중 네 번 더 짐을 꾸렸는데 살은 1kg도 자신의 존재를 양보하지 않았으니까.


서둘러 짐을 꾸려 우리의 다음 숙소로 향했다. 옮긴 곳은 람부뜨리 하우스다. 첫 날 묵었던 람부뜨리 빌리지와는 같은 람부뜨리 로드에 위치하고 있지만 위치 상 길을 건너야 한다. 카오산이나 람부뜨리는 딱히 길이 좋은 편은 아니기에, 우리는 힘겹게 캐리어를 끌거나 들고 새로운 숙소로 걸어갔다. 이날은 시내에 나가는 날이기에 늦장을 피울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발걸음을 재게 놀려 새로운 숙소로 향했고, 체크인을 하고 짐을 던져둔 뒤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시내로 가기 전에 꼭 들러야 할 곳도 있어서 마음이 급했다. 아침부터 어딜 그리 바삐 갔었느냐고 묻는다면, 오늘의 제목을 가리키겠다. 여행의 진리는 식도락. 아침부터 시간을 내서 찾아가는 곳이라면 당연히 맛집이다.


나이쏘이 갈비 국수. 고소한 국물에 고기와 국수를 함께 먹는 맛이 일품이다. Copyright 2015, 라이카. All Rights Reserved.


나이쏘이. 한국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국수 맛집이다. 여긴 어젯밤 갔던 쪽포차나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입소문을 탔던 곳인데, 한 번 가 본 사람들은 죄다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이쏘이에서는 소고기와 곱창을 끓여낸 국물에 국수와 고기를 담아 주는데 그 맛이 가히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고기, 곱창, 국수, 심지어는 국물에서 나는 조미료 맛―나는 높은 확률로 쇠고기 다시다 혹은 그 비슷한 종류의 조미료일 것이라 추측한다―까지 놀라울 정도로 탕(湯)스럽다. 이국의 여행지에서 추천 받은 맛집을 갔다가 간혹 어떻게 이토록 한국적인 맛이! 하고 놀랄 때가 있지만, 나이쏘이는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하기야, 사골국과 갈비탕을 보양식으로 먹는 한국인들에게 소고기와 곱창을 끓인 국물로 만든 나이쏘이의 갈비 국수는 그야말로 준비된 맛집 메뉴인 셈이다.


나이쏘이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오느냐면, 한국어 간판과 메뉴가 준비돼 있을뿐더러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오면 주인 아주머니가 메뉴도 보기 전에 아예 한국어로 물어본다. 갈비쿡수? 뜬금없이 들리는 한국어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많지만 아주머니는 내공이 대단하다. 표정에 변화가 없다. 덤덤하게 한국인들이 웃음을 멈추고 주문을 하길 기다리실 뿐이다.


우리에게도 갈비 국수를 먹을거냐 물으시기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가 쿨하게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리시곤 총총 사라지셨다. 입구 기준 오른쪽에 준비된 주방은 개방형으로 요리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데, 과정이래봐야 삶은 국수에 육수와 고기를 담는 것뿐이지만 구수한 냄새에 시선이 절로 주방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가 국수 두 그릇을 가져다 주셨다. 뽀얀 고깃국물에 국수가 담겨 있고, 그 위에 고기와 곱창이 소담스레 올라가 있다. 사실 나이쏘이의 갈비 국수는 고깃국물에 고기와 국수의 조합이라고 하면 으레 예상되는 맛 그대로다. 간이 잘 맞는 갈비탕에 당면이 아닌 소면을 말고 육수에 푹 삶아 부드러워진 고기를 올리면 똑같은 맛이 날 것 같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맛있을까. 알던 모양 알던 맛인데도 입에 넣으면 새롭게 맛이 나 기분이 좋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언니와 나는 여긴 참 예상 가능한 맛인데도 맛이 난다며, 또 기분 좋아 깔깔거리며 후루룩 국수를 해치웠다.


나이쏘이의 유일한 단점은 양이 매우 적다는 것인데, 매번 생각하지만 이게 태국 사람들의 평균적인 취식량이라면 태국 여성들의 그 마른 몸매가 이해가 된다. 그냥 한 젓가락 들어서 후룩 마시면 끝날 것 같은 양인데 맹세컨대 내가 많이 먹어서가 아니고, 그냥 적다, 정말로. 어떤 블로그에서는 양이 적으니 미리 더블, 그러니까 곱빼기를 시키라고 조언하던데 우리는 품위를 아는 여성들이므로 다른 현명한 방법을 선택했다. 아침을 두 번 먹는 거지. 그러니까 이건 첫 번째 아침인 거고, 현지인들처럼 이 한 젓가락 남짓의 국수에도 배가 부른 양 떵떵 배를 두드리고 나와서 두 번째 아침을 먹으러 가면 되는 거다.


상기 문단은 농담이 아니고 매우 진지하고 참신한 발상의 전환이었으므로 우리는 두 번째 아침을 먹기 위해 파아팃 피어로 향했다. 파아팃 피어는 카오산과 람부뜨리에서 가장 가까운 선착장으로 시내와 카오산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나이쏘이에서 길을 건너 바로 보이는 선착장 깃발을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 들어가면 파아팃 피어가 나온다. 투어리스트 보트는 가격에 비해 빠르고 쾌적하므로 우리는 이 보트에 탑승하기로 하고 표를 끊었다. 


짜오프라야 강. Copyright 2015, 라이카. All Rights Reserved.


솔직히 말해 짜오프라야를 처음 봤을 땐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그 더러운 물이라니! 수상 선착장에 서니 온갖 쓰레기가 떠 있는 구정물이 날 맞이했고, 그 탁기(濁氣)로만 견주자면 이게 고인 물인지 흐르는 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윽, 더러워. 한 마디를 내뱉고 혹시 한 방울이라도 튈까 주춤 뒤로 물러서 사방을 경계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장기간의 수원 관리를 통해 조금씩 개선되고는 있다지만 현재도 짜오프라야 강은 구정물에 가깝다. 혼탁하고 냄새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누가 투기한 것이 분명한 오물이 떠다니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강을 옆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일견 신비하게까지 느껴지지만 강변에는 아예 짜오프라야를 제 젖줄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수상 가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짜오프라야 강이 아직도 방콕 시민들의 상하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수상 가옥들을 보면 그게 사실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놀랐던 점은 그렇게 싫기만 했던 짜오프라야가 보면 볼수록 묘하게 매력적이었단 거다. 첫 방콕 여행에서 어쩌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짜오프라야와 만났었다. 처음엔 그렇게 싫던 것이 볼수록 점차 덤덤해지더니만 이내 아무렇잖게 강에 뛰어들어 노는 아이들도, 강가에 아슬아슬한 말뚝을 박고 뜬 건지 선 건지 모를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수상 가옥도, 줄지어 쓰레기를 나르는 커다란 수송선도 완성된 한 장의 그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그것들이 제 일부인 양 짜오프라야는 반짝반짝 빛났다. 종내에는 내 눈이 이상한 건가, 혹은 이게 사람들이 말하던 짜오프라야의 매력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여러 번의 방콕 여행 끝에 나는 이 오묘한 강에 대한 내 감상을 드디어 한 줄기로 정리했는데, 언제나 더럽지만 언제나 매력적인 강이라는 거다. 수질이니 오염도니 걱정해도 짜오프라야가 품은 아름다움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해가 막 숨은 이른 저녁의 하늘이 어떤 색인지 잊어버렸던 도시인들도 짜오프라야 강변에 서면 그 무렵의 상공이 경탄할 정도로 우아한 녹색으로 빛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밤중에 짜오프라야를 바라보면 강이 품은 어둠조차 마롱마롱 빛나는 것 같고, 물이 녹은 냄새는 달콤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속도로 치자면 낙제점인 수상 보트를 굳이 이용하는 이유는 바로 그 비효율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미적 쾌감은 느릿느릿한 속도로 나아가는 보트에 앉아 있을 때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짜오프라야는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다. 누구도 짜오프라야 강이 방콕의 상징임은 부정할 수 없을 터다.


최언니와 나는 보트에 나란히 앉아 수상 가옥을 구경하기도 하고 짜오프라야 강의 오염도에 대해 진지하게 추측하기도 하며 슬렁슬렁 앞으로 나아갔다. 유독 투어리스트 보트만 타면 옆으로 지나가는 다른 보트의 탑승객들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어주는데, 흡사 관광객들에겐 방콕 시민으로서 꼭 인사를 해야 한단 의무가 있는 것 같다. 이런 광경을 계속 보다 보면 처음엔 낯설었던 인사도 아무렇잖고 옆으로 보트만 지나가면 자연스레 손을 들어 휘휘 인사를 하게 된다. 건너에서 히잡을 쓴 여성이 롱테일보트를 타고 지나가며 통통 튀는 선체에도 아랑곳않고 흡사 여왕의 행차처럼 우아하게 손을 흔드는 광경만은 색달라 웃음을 터뜨렸지만.


사톤 피어, 그리고 사판 탁신 역 플랫폼. 다른 방향으로 가는 열차가 같은 라인으로 들어온다.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보트에서 내려 BTS역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두 번째 아침을 먹을 곳은 아속 역과 이어져 있는 쇼핑몰 터미널21. 우리는 지상철을 타고 사흘은 굶은 사람처럼 터미널21로 달려갔다. 방콕에 오면 종종 아침을 터미널21에서 해결하곤 한다. 터미널21의 5층엔 푸드 코트 피어21이 있어서 저렴하고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방콕의 길거리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그 위생 때문에 겁이 나 시도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피어21은 좋은 선택이다. 우리가 여기에 달려온 이유는 내가 방콕 여행 전부터 최언니에게 강력 추천했던 메뉴, 족발덮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방콕의 미식에 대해서는 수만 가지의 의견이 있지만 주로 뿌빳뽕커리와 팟타이, 쏨땀 등의 메뉴로 중론이 모아지는 듯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모두 태국 고유의 특색이 드러나면서도 대중적이고 맛이 좋아 태국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들어본 적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인기 있는 음식들이다. 인터넷에서 ‘방콕 맛집’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주로 나오는 메뉴 역시 주로 저런 요리들이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태국 요리를 꼽으라면 나는 두말도 않고 무조건 족발덮밥을 꼽는다. 뿌빳뽕커리와 갈비 국수에 대해 앞에서 논한 적 있지만, 사실 족발덮밥이야말로 태국에 가면 무조건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마땅한 대체품도 없고 한국에서 팔지도 않거니와―혹시라도 한국에서 족발덮밥을 파는 곳이 있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진지하고 절박하게 찾고 있어요―정말정말정말 맛있으니까.


족발덮밥은 짭쪼롬한 간장 양념에 돼지고기를 푹 삶아 취향에 따라 같은 양념에 끓인 달걀, 곱창, 돼지고기 튀김 등을 얹어 함께 먹는 요리다. 설명만 봐도 알겠지만, 맛이 없을 수가 없달까. 돼지고기만 있어도 맛있는데, 그걸 ‘짠 양념’에 ‘달걀과 곱창’까지 함께 끓였다는데 할 말 다 한 거 아닌가. 음식에 대한 내 지론은 확고하다. 음식은 자고로 맵고 짜야 맛이다. 그런 의미에서 족발덮밥은 나를 위해 태어난 음식일지도 모른다. 오오오, 잔뜩 기대하며 오랜만의 족발덮밥을 바라보았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크게 한 숟갈 퍼서 한 입 넣자 크,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마주앉은 최언니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맛있지? 응, 장난 아니다! 우리는 온몸을 뒤틀며 행복해했다. 바로 이 맛이야. 오래된 유행어라도 쩌렁쩌렁 외치며 피어21을 행진하고 싶은 기분이었달까.


족발덮밥. 짭쪼롬한 고기와 곱창 등이 함께 나온다.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방콕에 가서 족발덮밥을 먹을 때마다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족발덮밥을 한국에서 먹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다. 그냥 맛있다고 탄복하는 데서 끝날 음식이 아니라는 강한 확신이 주는 행동이다. 마음 내킬 때마다 그저 홍콩 가서 샤오롱빠오 먹고 뉴욕 가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서두에서 밝힌 대로 나는 저렴한 값에 파산을 시작한 소시민이기에, 가능하면 이 음식을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방도를 찾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여행에서는 이런 공상, 혹은 망상에 한발 보탠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최언니였다. 언니와 나는 한 입 먹을 때마다 족발덮밥에 감탄하면서 어떻게하면 이 음식을 한국으로 들여올 수 있을지, 왜 여태까지는 아무도 들여오지 않았는지 고민했다.


최언니는 마음만 먹으면 족발 가게에서 쉽게 들여올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최언니의 말을 빌자면, 실제로 족발 양념과 흡사하고 장시간 끓이기만 하면 되니 족발 가게에서는 더 이상 품을 들일 필요 없이 만들 수 있을 거란다. 내 생각은 약간 다른데, 족발덮밥의 소스는 족발 양념보다는 장조림 양념과 흡사한 것 같다. 밥에 비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묽고 심심하게 만든 장조림 양념. 그러니 장조림을 만들어 파는 대형 마트에서 족발덮밥을 판매하는 것이 더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사장님들은 족발덮밥을 안 들여 왔을까? 왜 족발덮밥은 다른 타이 퀴진에 비해 유명하지 않을까? 둘 다 알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인터넷에서 족발덮밥을 검색하면 우리처럼 이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꽤 많은 것 같은데, 실제로 한국에서는 찾을 수가 없으니 원. 최언니와 나는 족발덮밥을 두고 <한국에서 카우카무의 위상과 그 이유> 같은 제목을 단 논문을 쓸 기세로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족발집 사장도, 대형 마트 점주도 아니므로 방콕에서만 족발덮밥을 즐겨야 했다. 일정이 끝나기 전까지 몇 번은 더 족발덮밥을 먹으러 오기로 진지하게 결의하고 자리를 떴다.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기 전에 디저트를 먹기 위해서였다. 참, 이쯤 쓰다보니 우리의 위가 어떤지 궁금해할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굉장히 평범한 한국 여성들이다. 그저 맛있는 것을 여타의 사람들보다 조금 더 좋아할 뿐인. 특히 둘 모두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엔 관심이 많으니 여행가선 두말할 것도 없다.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닌 이상 소문난 맛집은 가보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음, 아주 조금 위가 크다고 해 두자.


아이스몬스터의 망고-딸기 빙수.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디저트는 피어21 옆에 있는 아이스몬스터에서 먹기로 했다. 현재는 휴업 내지는 폐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알기로 상당 기간 같은 자리를 지킨 디저트 가게다. 터미널21에 갈 일이 없으면 굳이 찾아갈 만한 맛집은 아니지만, 피어21에서 식사를 할 경우 간단히 후식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우리는 딸기와 망고가 반반 올라간 컵 빙수를 나눠먹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늘 아침에만 세 번째 무언갈 먹고 있었으므로 위가 조금 큰 우리로서도 버거운 양이었는데 심지어 바로 다음 일정은 가만히 누워있어야 하는 마사지였다. 최언니와 나는 마사지 전에 우리가 ‘헤비 밀’ 했다고 꼭 말해야겠다며 낄낄거렸지만, 빙수를 남기지 않은 것으로 봐서 빈 말이었던 것 같다. 하하.


터미널21 근처 마사지 샵이라고 하면 다들 알 테지만,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라바나 스파였다. 한국 사람들이 방콕에 오면 꼭 가는 몇 군데가 있는데, 아마 라바나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모닝 프로모션을 포함해 다른 고급 스파에 비해 저렴하고 질 좋은 마사지, 깔끔하고 쾌적한 시설 때문에 유명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냥 이유불문 무조건 가야하는 곳, 뭐 이런 느낌이다. 아, 물론 지금은 별로라는 건 아니고. 그냥 예전에 비해 당연한 관광 명소가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가격 대비 괜찮은 곳임은 분명하다.


라바나 스파.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라바나에 들어서면 마사지 샵 특유의 온화하고 화사한 오일 향기가 사람을 맞는다. 후각 세포는 기억을 자극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마사지 샵에 들어가 오일 향기를 맡으면 절로 몸이 이완되는 것 같다. 최언니와 나는 각각 두 시간 프로그램인 아로마 오일 마사지를 예약했는데, 모닝 프로모션으로 예약했기에 한 시간 프로그램인 바디 스크럽이나 페이셜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다. 최언니는 페이셜 마사지, 나는 바디 스크럽을 선택해서 받겠다고 했다. 각자 아로마 오일을 고르고 기다리고 있자, 우리를 담당하는 마사지사가 와서 2층의 룸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알겠지만 모든 종류의 오일 마사지는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같이 받겠다고 하지 않는 게 좋다. 옷을 홀라당 벗은 뒤 손바닥만한 그물 속옷―딴 소린데, 이 그물 속옷은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편하다. 나는 방콕에서 마사지를 받을 때마다 왜 이 속옷은 딱히 팔지 않는지 궁금했는데 이번에 라바나에 가니 판매하더라. 역시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모양이다―만 입고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수치를 느낄 시기는 지났기 때문에 그냥 커플 룸을 선택했다.


마사지가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해 굳이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사지는 같은 샵을 가도 마사지사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나도 라바나에서 별로였던 기억도 있고 좋았던 기억도 있다. 이번에 갔을 땐 굉장히 좋았다. 반쯤은 꾸벅꾸벅 졸면서 뒤집으랄 때 뒤집고 일어나랄 때 일어났더니 어느새 세 시간 여의 마사지가 끝나 있었다. 미처 풀리지 않았던 여독이 싹 풀리는 듯해 기분이 매우 상쾌해졌다. 넉넉히 팁을 챙겨 드리고, 피부가 쫀득쫀득해졌다며 자기 얼굴을 자꾸 매만지는 최언니를 끌고 라바나를 나왔다.


도이 창 커피의 외부.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라바나 스파 건너편에는 소소히 유명한 커피 맛집, 도이 창 커피가 있다. 도이 창 커피는 태국 도이 창에서 생산되는 커피 원두를 사용하는 브랜드 커피숍이다. 태국에서 생산되는 원두로 커피를 만드는 브랜드는 두 가지 정도 더 있다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에게는 도이 창이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도이는 산, 창은 코끼리라는 태국어로 우리나라 말로 하면 코끼리 산 커피 정도 되는 곳. 세계 어딜 가든 표준화된 커피 맛을 즐기려면 스타벅스만한 데가 없지만, 여행 중에는 현지의 커피를 즐겨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최언니와 나는 태국식 커피를 맛보기 위해 도이 창 커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라바나 스파 앞의 도이 창 커피는 소담스럽고 아늑한 규모의 가게다. 들어가면 맞은 편에 바로 주문대가 있고, 대여섯 개 정도의 작은 탁자가 실내에 비치돼 있다. 딱히 둘러볼 것은 없지만 괜히 여기저기 기웃대며 독특한 가게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다가 주문대 앞에 섰다. 나는 벌컥벌컥 마실 요량으로 평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최언니는 도이 창 커피에 왔으니 도이 창을 먹겠다며 쑥 도이 창을 시켰다.


태국 커피, 특히 아이스 커피는 특별히 아메리카노를 골라 시키지 않는다면 시럽 혹은 연유가 넉넉히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더운 나라의 커피는 대체로 높은 당도를 자랑하지만 방콕의 커피는 유독 달콤한 느낌이다, 눈이 저절로 감길 정도로. 에스프레소 원액에 우유와 연유를 듬뿍 넣은 쑥 도이창을 마신 최언니는 천천히 입 안에서 혀를 굴리더니 금세 나른한 얼굴이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미(味)적 취향에 있어서는 우린 95% 정도의 공감률을 보이므로 나는 최언니의 표정만으로도 무슨 말을 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 맛있어! 우리가 동시에 터뜨린 소리는 탄성에 가까웠다. 나와 최언니는 눈을 맞추고 씩 웃었다. 멋있는 곳에서, 훌륭한 마사지를 받고 나와서, 좋은 사람과 마주 앉아 맛있는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좋은 음식은 몸과 마음을 모두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우리는 대단한 기세로 그 말을 증명했다. 오일이 묻어 한껏 못나진 머리와 얼굴로 싱긋거리면서 웃고, 몰골에도 상관치 않고 사진을 찍고, 웃으며 온몸으로 즐겁다고 소리쳤다. 대기를 달군 열기는 밤에도 녹지 않았지만 우리의 웃음도 꼬리가 질겼다. 우리는 깔깔대느라 정신없이 비틀대며 이날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이동했다.


수다 식당의 외부. 이른 저녁에도 북적거린다.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마지막 일정은 수다 식당이다. 수다는 스쿰빗 쏘이 14에 위치한 식당으로 바나나 잎에 싼 치킨이 별미로 매우 유명하고, 그 외의 메뉴도 평균 이상은 하는 곳이다. 나는 특히 바나나 잎 치킨을 좋아하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여기서 하기로 했다. 우리는 앉자마자 바나나 잎 치킨과 밥, 그리고 새우와 야채 모듬 튀김을 시킨 뒤 시원한 땡모반을 추가했다.


수다 식당은 워낙 한국 사람들에게 유명하기도 하고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있는지라 둘러보면 곳곳에 자리한 한국인들이 눈에 띈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들끼리는 서로를 귀신같이 알아본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처럼 생겼고, 물론 나도 그렇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국인들에겐 아 저기도 한국 사람일세, 하는 (한국 사람만 서로 이해 가능한) 눈빛이 떠오른다. 눈이 마주친 한국인들과 멋쩍은 미소를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은 사실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이국 만 리 이민 생활 중 동포를 만난 것처럼 얼싸안을 수도 없고…. 그냥 너도 한국인이고 나도 한국인인 것을 서로 인식했다는 뜻으로 겸연쩍은 미소를 지은 뒤 고개를 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최언니와 나는 주변을 휘이 살폈다. 통로 하나를 두고 내 오른쪽으로는 한국인 여성 두 사람이 앉아있었고, 왼쪽으로는 배낭여행 중인 듯한 동양인 남자 한 명과 흑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시차에 대한 잡담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왼쪽 테이블은 어떤 조합인지 잘 모르겠고 오른쪽 테이블은 친구끼리 여행을 온 것 같다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서 최언니는 나보다 조금 일찍 돌아가고 나는 최언니보다 며칠 방콕에 더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 다른 테이블에 관심을 접고 내 숙소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했다. 최언니가 자신이 떠난 후 어디에 묵을 예정이냐고 묻기에 나는 고민 중이라고 답했다. 일전에 왔을 때는 이 골목에 있는 튠 호텔에 묵었었는데, 특가로 나온 것을 감안해도 가격 대비 좋은 시설이었기에 튠에 묵을까 한다고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저기요. 뜬금없는 한국어가 들렸다.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왼쪽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동양인 남자가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고, 그제야 깨달았다. 한국인이셨어요? 놀라서 묻자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들으니 이 둘도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고 했다. 한국인 쪽은 태국 여행을 온 참이고, 아프로 머리를 한 외국인 쪽은 일본에서부터 배낭여행을 하고 있단다. 최언니와 내가 오오, 하고 감탄하자 그는 자신이 다녀온 도시를 하나하나 읊어줬는데 교토, 삿포로, 심지어 후쿠시마까지 다녀왔다고―나는 유머 감각이 꽤 부족한 사람이라 이것이 진담이었는지 농담이었는지 아직도 헷갈린다―했다. 한국에서 꽤 오래 있다가 이제 막 태국에 들어온 참이라 옷도 온통 겨울 옷 뿐이라 이제 옷을 좀 사야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장기 여행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여러 가지를 체험하며 여행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60인 도미토리에서 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다른 것보다 냄새를 참을 수 없었다고 죽을 뻔했다는 말에 우리는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숙소를 추천해주기도 하고, 여태 했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며 반쯤 섞여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이내 음식이 나왔다. 바나나 잎 치킨은 염지를 한 치킨을 바나나 잎에 싸서 구운 요리로 튀기지 않아 담백하면서도 촉촉하다. 간은 약간 센 편인데, 짠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간간하다고 느낄 정도다. 이럴 때는 밥을 따로 주문하면 된다. 커다란 볼에 흰 밥을 담아 돌아다니는 종업원을 불러세워 스팀드 라이스를 달라고 하면 접시에 가득 담아 준다. 우리도 밥반찬처럼 치킨을 곁들여 먹었다. 새우와 야채 튀김은 새우, 그리고 아스파라거스를 튀겨 나오는데 대체 무슨 조화인지 희한하게 맛있다. 새우는 원래 맛있다 쳐도 평소 아스파라거스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아스파라거스 튀김까지 싹 비웠다. 여행지에선 왜 이렇게 입맛이 도는지 모르겠다며, 우리는 입을 쩝쩝댔다.


바나나 잎 치킨과 새우 야채 튀김.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늦은 해가 지고도 어둠이 어스름히 깔릴 무렵이었다. 최언니는 식당이 위치한 골목을 뒤돌아봤다. 이 골목이 풍기는 분위기에 매료된 모양이었다. 나도 그랬다. 이전에 튠 호텔에 묵었을 때는 종종 이 골목을 걸어 들어가며 정말 독특한 광경이라고 혼자 웃곤 했다. 


쏘이 14의 초입에 서면 오른쪽으로는 현지인과 관광객이 섞여 북적대는 허름한 수다 식당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주로 금발의 서양인들이 모여드는 헤밍웨이 바가 있다. 이국의 밤을 즐기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환희가 터져나오는 한편 골목으로는 저녁의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유유히 뛰어간다. 앞으로는 오래된 상가에 불이 꺼져 있고 뒤에선 고층 쇼핑몰이 번쩍번쩍 빛나는데, 사이로는 BTS가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묘하기 그지없다. 일상과 비일상이 어우러지고, 흑과 백이 만나 흑색도 백색도 회색도 아닌 그 사이의 반짝대는 어떤 색깔을 빚어내는 것 같다. 분명 이 광경을 한 프레임 안에 담는다면 <삶의 도시, 방콕>이라는 캐치프라이즈에 어울리는 한 편의 활인화(活人畫)가 되리라.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도 꽤 오랫동안 나는 이날 먹은 음식이, 음료가, 아니 모든 것들이 생각났었다. 내가 대단히 고급스러운 입맛을 갖고 있어서 미식을 감별해냈던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그날 그곳에서의 기억과 느낌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간혹 여행지에서 쓸모없거나, 여행지의 향취가 전혀 묻어나지 않거나, 혹은 그곳에서 사지 않아도 사뭇 상관없는 물건을 사 모으곤 하는데―오로지 그 물건이 타지에서의 기억을 불러 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내 방 책상 위에는 홍콩 문구점에서 사 온 커터, 방콕 서점에서 사 온 추리소설 원서, 마카오 항구에서 사 온 펜 등이 즐겁게 굴러다닌다.


하지만 정작 여행지에서 가장 갖고 싶은 것은 사 올 수 없다. 사실 내가 가장 소장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날의 나니까. 닥터 후에 나오는 타디스 같은 것이 발명되지 않는 이상 당연히 그날의 나를 어디서 가져올 수는 없다. 심지어 내가 최언니와 다시 방콕에 가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곳에 앉아 똑같은 메뉴를 먹더라도 그날 느낀 기분을 전사할 수는 없을 터다.


내가 가능한 한 여행지에서 많은 것을 호들갑스럽게 감탄하며 먹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간은 흐른다, 안타깝지만. 그날의 시간도, 기억도, 나도 어디에 고스란히 보존해둘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짧은 시간을 가능하면 즐겁고 야단스럽게 보내려 한다. 수치심을 느끼는 세포가 죄다 증발한 것처럼, 내일의 해가 뜰지 안 뜰지 모르는 아이처럼. 아이들이란 모든 기억을 새롭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흡수한 기억은 절대 잊지 않는 법이니까. 나는 탐욕스러운 아이마냥 그 순간의 기억을 마시려고 노력한다.


지금도 나는 이불 속에서 입맛을 다신다. 일탈의 맛은 달콤하다. 방콕이라서, 홍콩이라서가 아니라 내 일상이 아닌 때문이다. 그렇다, 여행의 진리는 식도락이다. 나이쏘이가, 땡모반이, 족발덮밥이, 바나나 잎 치킨이 아니라도. 나는 내가 다녀온 여행의 맛을 하나하나 평생토록 사랑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 함께하는 여행이란 보험 같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