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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Jan 05. 2016

#3. 언젠가 잊히는 것들에 대해서(2)

그러나 그리하여 더 아름다운 것들도 있는 게 아닐까

흔히 태국이라면 수상시장이나 재래시장을 떠올리지만 방콕에는 대형 쇼핑몰이 굉장히 많다. 가보면 그 규모에 압도될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다. 우리가 방금 식사를 해결하고 나온 씨암 쎈터나 씨암 파라곤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만 걸어가면 근처에 젠과 이세탄, 센트럴 월드 세 개의 백화점을 합친 센트럴 월드 플라자도 있다. 칫롬에 위치한 게이손 플라자에 프롬 퐁 역에 있는 엠포리움 백화점과 엠쿼티어, 어제 방문했던 아속 역의 터미널21까지 그야말로 방콕은 대형 쇼핑몰 천지다. 쇼핑몰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3박 4일은 관광이 가능할 정도다.


흥미로운 것은 쇼핑몰마다 각기 개성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마분콩은 과거 90년대의 용산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지은 지 오래 된 건물이거니와 구획이 나뉜 전자용품점이 꽤 많기도 하고. 터미널21은 얼핏 두타 등의 종합 쇼핑몰을 연상시키는데, 동대문에 있는 어떤 쇼핑몰을 하나 집어다 심혈을 기울여 단장하고 관광객을 3/4쯤 덜어내면 터미널21과 흡사해질 것 같다. 반면 씨암 센터와 씨암 디스커버리는 한국에선 본 적 없는 굉장히 독특한 느낌의 몰이다. 대부분 태국 자체 브랜드로 채워져 있어 그런 듯싶다. 네 개 층으로 쇼핑몰 치고는 적은 층수지만 본 적 없는 독특한 디자인과 브랜드로 가득해 방콕 쇼핑몰 중 가장 매력적인 곳으로 꼽히기도 한다. 나는 후일 씨암 센터의 한 브랜드에서 가방을 보고 첫눈에 반해 남은 돈을 모두 쏟아 붓는 바람에 하마터면 집에 못 갈 뻔하기도 했다. 오오, 아름답게 빛나는 가방느님이시여 제게 축복을 내리사 방콕에 영원히 체류할 뻔하게 만드시니.


씨암 센터와 함께 위치한 씨암 파라곤은 씨암 센터보다는 비교적 익숙한 브랜드로 채워져 있다. 물론 사 올 수는 없다, 어마어마하게 비싸니까. 무슨 소리냐고? 명품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다양한 명품 브랜드로 꽉 찬 씨암 파라곤은 방콕 최대의 쇼핑몰이라는 명성답게 매일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물론 지하에 위치한 고메 마켓이나 각종 음식점, 푸드 코트, 수족관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이 정도 규모의 쇼핑몰이 없어서 어디에 비교하기는 뭐하지만, 명품관이 늘어서 있고 관광객이 북적대는 모습을 보면 얼핏 롯데 백화점 본점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규모 때문인지 1층에서는 매번 무언가 행사를 하고 있고, 지하로 내려가면 내가 사람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북적대는 인파가 날 맞이한다.


씨암에서 벗어나 게이손으로 향하면 상대적으로 조용한 느낌이 든다. 씨암 파라곤과는 달리 게이손은 명품 브랜드만이 입점해있는 곳이다. 비교적 관광객들도 적지만 구경할 만한 것도 적다. 그야말로 갤러리아 등의 명품관에 온 느낌이다. 언제나 빈곤한 여행객이었던 나는 게이손에 몇 번 가지 않았고 갈 때마다 그저 직원들이 엄청 친절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만 기억난다. 심지어 외부 출입문까지 직원들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직접 열고 닫는다. 미안해요, 내가 졸부가 되거든 다시 올게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떠나게 되는 곳이다.


칫롬과 씨암 중간에 위치한 센트럴 월드 플라자는 일본계 백화점인 젠과 이세탄을 센트럴 그룹에서 인수해 만든 멀티 콤플렉스 쇼핑몰이다. 개인적으로 방콕에서 가장 좋아하는 쇼핑몰이기도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쁜 잡화를 많이 팔고 푸드 코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내가 태국을 좋아하는 두 가지 이유를 다 갖췄대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친구와 태국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한 적이 있는데, 음식은 싸고 맛있는 반면 공산품은 훌륭한 퀄리티의 제품이 많다는 것이다. 음식이 싼 것으로 치면 다른 동남아 국가들도 그렇지만 태국처럼 양질의 공산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 다른 동남아 국가들을 여행하고 태국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소리가 있다. 여타의 동남아 국가를 돌고 태국으로 돌아오면 태국이 얼마나 훌륭히 개발된 국가인지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대중교통부터 시민의식까지 태국은 자유여행에 최적화된 나라처럼 보일 정도다. 방콕처럼 편하고 쾌적하게 동남아의 진미를 즐길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센트럴 월드 플라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세 개의 쇼핑몰을 이어 만든 곳인만큼 센트럴 월드 플라자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각 구획, 즉 백화점마다 다른 분위기를 내므로 염두에 두고 구경하는 것도 좋다. 젠이나 이세탄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식 백화점 분위기가 나고, 가운데의 센트럴 월드는 탁 트인 전경을 자랑하는 쇼핑몰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신도림 IFC몰 등의 신규 대형 쇼핑몰 같은 느낌이랄까. 이곳에는 명품부터 태국 고유 브랜드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입점해 있다. VIERA 등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태국 로컬 브랜드도 몇 개 있어 갈 때마다 즐겁게 구경하곤 한다.


센트럴 월드 최상층에는 영화관과 음식점, 푸드 코트가 있다. 갈 때마다 느끼지만 방콕에서 핫한 음식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은 씨암 파라곤과 센트럴 월드다. 이 두 곳, 한 곳을 더하자면 엠포리움 백화점까지 세 곳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별미가 가장 먼저 입점되곤 한다. 씨암 파라곤은 사람이 너무 많아 싫다는 사람에게 센트럴 월드가 좋은 대안인 이유다. 센트럴 월드 맨 윗층에 도착했을 무렵 우리는 쉬지 않고 서너 시간을 걸어다녔던지라 다소 녹초가 되어 있었는데, 와중에 최언니와 하언니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음식이 있었다. 크루아상 타이야끼, 즉 크루아상 붕어빵이었다.


크루아상 타이야끼는 흔히 볼 수 있는 크루아상을 납작하게 누르고, 그 사이에 팥이나 크림 등 다양한 속을 넣고 구워 붕어빵처럼 즐기는 간식이다. 단 간식을 즐기는 언니들은 그야말로 눈이 뒤집혔다. 야, 저거 하나 먹자! 언니들은 순식간에 가게 앞으로 달려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나는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언니들이 증발되거나 기화한 줄 알았다. 


크루아상 타이야끼를 굽는 광경.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우리는 센트럴 월드 푸드 코트에서 이른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밤에는 야시장을 둘러볼 생각이었으므로 식사를 여기서 하는 게 좋겠다 싶은 생각이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최언니에게 그러했듯이 나는 하언니에게도 족발덮밥에 대해 끊임없이 예찬해 왔는데, 내가 얼마나 쉬지 않고 칭찬했던지 하언니는 이때쯤 거의 족발덮밥을 앓고 있는 지경이었다. 하언니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꼭 족발덮밥 먹고 싶어. 나도 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언니에게 꼭 족발덮밥을 먹여야겠어. 최언니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야 할 맛이더라. 우리는 전장에 나서는 장군처럼 비장하게 푸드 코트로 걸어 들어갔다.


족발덮밥에 대해 굳이 부언할 필요는 없겠지. 두말할 필요 없이 맛있었다. 이번에는 곱창이 적어서 달걀과 고기만 올라간 것으로 받아 왔다. 하언니는 야무지게 밥과 소스를 싹싹 비벼 크게 한 입 물었다. 어때, 맛있지? 내 물음에 하언니는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였다. 나도 한 입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음, 언제 먹어도 맛있어! 지금 이 대목을 쓰면서도 약이 오르고 입에 침이 고인다. 나는 종종 방콕에서 살이 쪄서 돌아오는데 8할 정도가 족발덮밥 때문일 정도다.


족발덮밥.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특히 족발덮밥을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나는 망설임 없이 함께 먹는 태국의 프리키누, 흔히 말하는 쥐똥고추 절임을 꼽는다. 세계에서 가장 매운 종의 고추로 우리나라의 청량고추보다도 서너 배 더 맵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워낙 알알한 매운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도 라면을 끓여 먹을 때 청량고추를 서너 개는 썰어 넣고, 없으면 고춧가루라도 팍팍 쳐서 먹어야 하는 매운맛 마니아다. 


처음 족발덮밥을 먹을 때 옆에 준비되어 있는 고추 절임을 보고 옳다구나 싶어 잔뜩 퍼와 맛을 봤다. 악, 기대처럼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화끈하고 얼얼한 신미(辛味)가 났다. 몹시 맛있는 매운맛이었다. 그 이후론 덮밥을 먹을 때마다 한 스푼 크게 퍼서 함께 먹는다. 난 이것이 별미 중 별미라고 생각한다. 이게 없이 족발덮밥을 먹으면 허전할 정도로.


밥을 두고 한담을 나누는 것은 미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우리는 조용히 식사에 열중했다. 밥 한 숟갈에 절인 고추 몇 개를 올려 같이 먹고 있는데 갑자기 하언니가 물었다. 그게 뭐야? 일시에 최언니와 하언니의 시선이 고추 절임에 집중됐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아삭아삭 고추 절임을 먹고 있자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보자 불현듯 장난기가 솟아올랐다. 이거 고추 절임인데 무척 맛있어. 난 이거 진짜 좋아해. 나는 당당했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누락하면서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으로. 내가 맛있다고 호언장담하자 하언니는 맛이 궁금한 듯 나와 고추 절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치 빠른 최언니는 오히려 내 말에 눈을 빛냈다. 이거 안 매워? 음, 그런 걸 물어보다니. 자부심이 우습게도 1초 뒤 나는 거짓을 진술했다. 응, 안 매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순진한 하언니는 금세 넘어왔다. 그래? 진짜 맛있어? 난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원래 이럴 땐 더욱 확실한 태도로 농간을 부려야 넘어오는 법이다. 하언니는 순수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라 내가 조금만 더 그럴듯한 말로 속여 넘기면 넘어올 법했다.


하지만 하언니가 시식의 기로로 막 넘어오기 일보 직전, 최언니가 고개를 저었다. 보기만 해도 매워 보이는데. 에잇, 최언니가 요요히 빠져나갔다. 그 단호한 표정을 보아하니 사기극은 실패로 돌아간 듯했다. 아니라고 조금 더 우겨보려고 했지만 최언니의 표정에 너무나도 의심이 가득해 나는 그만 푸핫,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금만 더 했으면 하언니는 넘어올 법했는데, 아깝다! 서툰 사기꾼은 사실을 고백했다. 이거 태국 쥐똥고추라고, 전 세계에서 제일 매운 고추야. 맛있는데 맵긴 진짜 매워. 혹시나 싶어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최언니의 눈빛에 역시나 하는 빛이 흐르고, 하언니도 웃음을 터뜨렸다. 딱 봐도 매워 보이는데 안 맵대! 이게 사람을 속여먹으려구! 최언니는 삿대질을 했다. 크크크킄…. 아까운 건 둘째치고 억울해 하는 최언니의 표정에 웃음이 터졌다. 푸하하하하…. 우리는 밥을 먹다 말고 신나게 폭소를 터뜨렸다.


하언니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고추를 하나 집어 먹었다. 어땠느냐고? 음, 죽지는 않았다고 해 두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둘째 치고 태국 쥐똥고추는 진짜 맵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만 남기고 하언니는 물을 벌컥, 잠시 쉬었다가 또다시 벌컥, 괜찮은 듯 했다가 다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하언니를 보고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고, 하언니도 죽일 뻔했다. 


어우, 진짜 맛있는데 매워. 진짜 매워. 하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악! 먹지도 않은 최언니가 코를 감싸쥐었다. 너 입에서 매운 냄새 나! 하언니가 신미에 뺨이라도 맞은 듯한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매우니까…. 하언니는 그 뒤로도 한동안 후하후하, 몇 번이나 큰 숨을 내쉬었지만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까지 매운맛이 가시지 않아 엄청 고생해야만 했다.


아시아티크 전경 (출처 www.hanksterclub.com)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아시아티크 더 리버프론트, 소위 아시아티크 야시장이다. 방콕에서 최근 가장 유명한 시장 중 하나다. 기찻길 시장, 짜뚜짝 시장, 담넌사두억 수상 시장, 암파와 수상 시장 등 태국엔 유명한 재래시장이 많지만 아시아티크는 재래시장이 아니다. 관광 사업을 위해 기획 조성된 야시장으로, 유럽풍으로 지어진 건물 안에 천오백여 개의 상점이 입점해 있다. 의류와 잡화부터 전자제품, 다양한 생활용품까지 방콕에서 기념품으로 구입할 만한 물건들이 잔뜩 있는 곳이다. 우리는 딱 하루, 함께 보낼 수 있는 밤을 기념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아시아티크로 향했다.


아시아티크엔 각종 볼거리가 많다. 우리는 이국의 풍광에 감탄하며 장면마다 카메라를 들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돈이 안 되는 재주가 많은 것으로 굉장히 유명하다. 전문가가 되기 약간 모자란 수준의 재주가 굉장히 많은 편이랄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너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매우 편해졌다고 주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주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재주는 사진 촬영 기술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사진을 꽤 잘 찍는다. 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즉 피사체 스스로가 흡족한 사진을 찍어주는 데는 재주가 있는 편이다. 어딜 가든 훌륭한 풍광이 보이면 내 주변 사람들은 내게 카메라를 쥐어주곤 한다.


이날도 씨암 센터부터 아시아티크까지, 쉼없이 사진을 찍었다. 이날 하루 찍은 사진만 물경 수백 장은 될 정도다. 최언니와 하언니는 사진 찍히는 것을, 다시 말해 피사체가 되는 것을 매우 즐기는 사람들이기에 대부분은 인물 사진이었다. 훌륭한 포토그래퍼가 아닌가! 이래서 내 주변 사람들이 죄다 나를 여행 메이트로 낙점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손에는 카메라 혹은 휴대폰을 들고, 눈으로는 언니들이 앞서 가는 모습을 쫓으며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특히 아시아티크는 좋은 촬영 스팟이 많았기에 셔터만 누르면 그대로 한 장의 화보가 되었다.


관람차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아이들이 모여 노는 놀이기구를 구경하기도 하며 우리는 천천히 강가로 나아갔다. 아시아티크 더 리버프론트라는 이름처럼 아시아티크는 짜오프라야 강변에 접해 있는데, 밤에 보는 짜오프라야의 야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처 잡히지 않은 혼탁함은 밤의 장막에 가려지고 물결은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멀리 무언가를 나르는 수송선은 불을 달고 유유히 강물을 헤치고 건너편의 마천루들도 위용을 뽐낸다. 짜오프라야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자 언니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강변으로 달려갔다. 


나는 천천히 언니들의 뒤를 쫓았다. 자연스럽게 사진을 담으려고 걷던 자리에 쭈그려 앉아 언니들의 걸음걸음을, 길게 늘어선 조영(照影)을 찍기도 하고, 아시아티크를 둘러보며 이곳저곳의 풍광을 눈에 담기도 했다. 빠르게 달려간 언니들과는 어느새 거리가 좀 벌어져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최언니에게 먼저 가라고 손을 내저으며 나는 천천히, 내 걸음대로 걸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반짝이는 네온사인이 그 사이를 메웠고,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뚜벅뚜벅 내 그림자를 밟고 사라졌다.



천천히 걸어 도착한 아시아티크 끝자락에는 제법 그럴 듯한 라이브 바가 있었다. 내가 언니들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강과 부두가 만나는 자리의 바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에드 시런의 Thinking out loud.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나는 멍하니 자리에 멈춰섰다. 노래에 홀리고, 그날 밤의 정취에 홀린 것처럼. And darling I will be loving you till were 70. And baby my heart could still fall as hard at 23. And Im thinking bout how people fall in love in mysterious ways. Maybe just the touch of a hand. Oh me I fall in love with you every single day, and I just wanna tell you I am…. 


가사가 귀에서 맴맴 돌았다. 묘한 감상이 나를 턱 치고 지나갔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당시의 내 기분을 설명하기 힘들다. 나는 기쁘고, 우울하고, 슬프고, 즐겁고, 외롭고, 행복했다. 당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기도 했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싶기도 했다. 너무 벅차면 오히려 바위처럼 굳어 아무 말도 안 나오는 것처럼 너무 많은 감정들이 몰려와 대체 내가 어떤 기분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길! 나는 매우 감상적인 인간인데다 원래 여행이란 것이 그렇잖나. 여행의 밤은 감정의 진폭을 열 배 쯤은 증식시키곤 한다. 변덕스런 감상에도 이유가 있다면 꼬리를 잡아 빙빙 팔매질로 던져 버릴 텐데, 안타깝게도 본디 울기(鬱氣)엔 이유가 없다. 나는 노래 속에서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 순간이었다. 이리 와, 같이 찍자! 누군가가 날 불렀다. 놀라 고개를 들자 난간에 기대 선 언니들이 웃으며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아, 나는 그제야 제대로 섰다. 어찌할 바 모르고 당황해 우두커니 멈춰 섰던 나를 알아챈 듯 언니들은 웃으며 내게 손짓했고, 밝은 목소리에 나는 끝도 없는 기이한 우울 속에서 번득 끌려나왔다. 언니들이 미소 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카메라의 버튼을 눌렀다. 환하게 웃음 지으며 내게 손짓하는 언니들이 앵글 속에 온전히 담겼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번 여행에서 내가 잡아낸 사진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으며 가장 고운 순간이었다. 언니들은 다정히 웃고 있었고―비눗방울이 탁 터지듯 깨어나 나도 웃었다.


그때, 사랑하는 노래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번연히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심지어 영원할 것 같은 이런 감회 역시 천천히 무뎌지고 잊히리란 사실도,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나는 점차 이 순간에 느꼈던 무언가를 망각해 가리라고.


언젠가는 잊히고 마는 종류의 것들에 대해 나는 종종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맛, 이 기쁨, 이 향기, 이 웃음소리…. 이런 종류의 즐거움은 후일 아무리 탈환하려고 해도 꼬리조차 잡을 수 없다. 이런 것들을 영원히 담아둘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프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번 여행, 그 순간, 짜오프라야 강 위에서 나는 아주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잊히고 사라지며 영원한 것은 오직 비-영원성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하여 더 아름다운 것들도 있는 게 아닐까. 점차 기억 속으로 깊게 잠식해가는 장면 속에서 그때의 나와 당신이 그러했노라고 그리워할 수 있으니까. 되짚어 그때 함께했기에 좋았노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에.


나는 지금도 그때를 그린다. 잊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때, 온 세계가 아름다웠던 것은 그 반짝이는 가변성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나는 언니들에게 뛰어갔다.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당장 이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언니들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았다. 나는 안도했다.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 잊히는 것이 아쉬울 만한 순간에 이 사람들과 함께라는 사실에. 짜오프라야 위로 물을 먹은 별이 반짝반짝, 힘차게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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