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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Jan 13. 2016

#5. 또다시 안녕

여행에서 남긴 어떤 것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최언니는 화요일 오후 한 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예정이었으므로,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향하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이날이 마지막 일정이었다. 하언니를 보내고 숙소를 옮기고 나니 여행의 마지막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이 실감나는지, 최언니는 일요일 밤 내내 아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아쉽다, 이제 끝이네, 아쉬워…. 


여행이란 귀향(歸鄕)을 앞두고 있기에 가치 있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신기한 것은 여행 중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난다는 거다. 나는 진심으로 평생을 방랑하면서 살고 싶다. 아마 우리나라가 휴전선으로 막혀있지 않았다면 나는 걸어서라도 멀리멀리 여행을 다녔을 것 같다. 최언니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겠지, 더군다나 혼자 돌아가는 길이니 말이다.


마지막 날의 일정은 최언니를 위해 적게 걷고 많이 쉬는 이른바 휴양지 일정이다(양심적으로 미리 시인하자면, 그렇다고 일정의 전반부에 우리가 매우 열심히 걷고 관광했던 것은 아니긴 하다. 그냥 비교적 그랬다는 소리다). 이날은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조식을 먹고, 랑수언 로드의 스타벅스에 갔다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저녁 일정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최언니와 따로 보내기로 했는데, 다른 이유는 아니고 내가 합류하기 전 확정해둔 일정이라서 그렇다. 최언니는 밥을 먹은 후 내가 추천하고 예약해 준 스파에서 마사지를 받고 오기로 했고, 나는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생각했던 대로 글이라도 써야지 싶었다. 뭐, 여행기 시작 전부터 썼지만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긴 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같이 마사지나 받으러 갈 걸 그랬지. 후회는 언제나 늦다.


조식은 금세 해치우고, 우리는 서둘러 랑수언 로드를 향해 발길을 향했다. 옮긴 호텔은 나나 역 근처였으므로 우리는 걸어서 나나 역으로 향했다. 랑수언 로드는 칫롬 역에 위치해 있는데, 두 정거장 밖에 되지 않으므로 금방이다. 랑수언 로드의 스타벅스는 태국 내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로 유명하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가게로 굉장히 운치가 있다. 뭐랄까, 스타벅스가 아니라 독특한 느낌의 로컬 커피숍에 온 것 같달까. 혹시나 랑수언 로드에 갈 기회가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방문해 보시길.


랑수언 로드의 스타벅스.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누가 그러길, 태국에서 스타벅스를 가는 것은 멍청이나 하는 짓이랬다. 태국은 어디나 커피가 싸고, 맛있는 로컬 커피숍이 많으니 굳이 비싼―한국의 스타벅스에 비하면 당연히 싼 가격이지만 현지 물가에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가 95밧, 대략 3,000원에서 3,500원 사이. 고급 쇼핑몰 푸드 코트의 한 끼 식사가 50밧 내외라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비싼 가격임을 알 수 있다―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필요가 없다고. 


틀린 소리는 아니다. 사실 커피 맛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스타벅스를 갈 필요는 없고, 우리는 뭐든지 맛있게 먹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미 지난 여행기에서 충분히 증명한 것처럼.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꺼이 멍청이가 되기로 했다. 남들이 뭐라던 알 게 뭐람. 우리는 분위기에 살고 분위기에 죽는 얄팍한 여자들이거니와 남의 말엔 신경도 안 쓰는 뚝심있는 여자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랑수언 로드의 스타벅스는 적어도 우리에겐 갈 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 랑수언 로드 안쪽에 위치한 스타벅스로 향했다. 칫롬 역 주변은 개발이 매우 잘 되어 있지만 도저히 조경을 위해 심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규모의 초목이 우거져 있다. 반쯤은 사파리 투어와 비슷한 게 그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드문드문 거대한 고양이나 개가 누워 잠을 청하고 있다. 


과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진짜 거대하다. 한국의 들개나 길고양이와는 달리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고, 움직임이 재지도 않다. 여유롭고 느긋한 데다 사람이 곁으로 가면 ‘이건 뭐지?’ 싶은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심지어 길거리 노점 근처에서 맡겨 둔 식사를 내놓으라는 양 어슬렁대기도 한다. 아마 태국에서는 길거리의 동물을 학대하거나 내몰지 않기 때문인 듯싶다. 


우리가 스타벅스에 도착했을 때도 웬 개 한 마리가 그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근처를 제 구역으로 삼은 들개인 것 같았는데 우리가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계속 문 앞에서 어슬렁거려 꽤나 곤혹스러웠다. 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스타벅스에 따라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스타벅스는 무전취식하는 손님이나, 주문을 안 하고 더위만 피하러 온 손님이나, 무엇보다 사람이 아닌 손님을 반기지 않을 것 같았기에 우리는 개를 피해 잽싸게 스타벅스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불쌍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개를 억지로 외면하고. 아마 꽤나 자주 스타벅스에 출몰하는 잡객이었는지, 개를 경계하던 스타벅스 파트너님이 우리만 슬쩍 들어오자 그제야 눈에 힘을 풀고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무난하게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말처럼 랑수언 로드의 스타벅스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꼭 한옥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 같은 풍미가 있달까. 가정집을 개조한 곳이라 그런가 공간 내부가 독특하게 디자인되어 있었고, 테이블 하나도 평범한 모양이 아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안쪽에 위치한 다인용 테이블은 통나무 하나를 통째로 쪼개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노트북을 펴 놓고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다. 우리는 카운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앉은 테이블은 커다란 물레를 엎어놓은 모양이었다. 만일 우리가 에티켓을 아는 문화시민이 아니었다면 그 위에 앉아 빙글빙글 돌며 도자기 흉내를 내 보고 싶을 만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기웃대며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랑수언 로드 스타벅스의 내부.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나는 층고가 높은 건물을 좋아한다. 복층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20대 초반부터 복층 집에 꼭 살아보리라는 결심을 한 적이 있는데, 아직 이루지 못했다. 언젠가는 꼭 살아보리라). 정작 살아보면 냉난방도 힘들고 공간 활용도도 떨어진다고 다들 뜯어말리지만 층고가 높은 건물은 보는 것만으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더 좋아하는 것은 층고가 높은 건물을 제대로 활용한 인테리어다. 천장이 높기만 하면 소용 없다, 그 높은 공간을 제대로 활용해야지. 예를 들면 벽면 한 쪽을 꽉 채워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책장이라거나, 해가 잘 드는 통창 같은 것들. 


랑수언 로드의 스타벅스는 그런 의미에서 완벽히 내가 사랑할 만한 장소였다. 높은 층고에, 긴 벽을 가득 채운 MD 상품 진열대와, 부드럽게 톤 다운된 컬러로 공간을 분리하는 가벽까지. 이곳은 넓진 않지만 층고가 높은 데다 효율적인 공간 활용 덕분에 상당히 넉넉해 보이면서도 위치에 따라서 아늑한 느낌을 준다. 구석구석 빨대와 시럽 등을 나무 동이 위에 올려두고 천장에 가까운 벽에는 커피콩이 담긴 병을 붙여두는 등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이기도 했고. 나와 최언니는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사진을 찍기도 하고, 하언니에게 중간중간 연락을 하기도 하며―하언니는 사진 같은 건 보낼 필요 없다고 우리에게 손사레를 쳤지만 우리는 친절하게 사진을 보내 주었다. 하언니는 아마 정답게 욕을 할 만큼 기뻐했던 것 같다―시간을 보냈다. 


귀국 이후 하언니와 만나 가보지 못했던 곳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하언니나 우리나 이 스타벅스를 가장 아쉬워했다. 언젠가 다시 방콕 여행을 갈 일이 있다면 뭣보다 여길 꼭 가보자고 약속할 정도였다. 모두 비슷한 체인 커피숍이라도 나름의 풍미와 운치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을 랑수언 로드의 스타벅스가 증명했다며, 우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호텔 뮤즈의 메디치 키친 앤 바.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스타벅스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근처의 호텔 지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랑수언 로드에는 특급 호텔을 위시해 값비싼 루프탑바, 미슐랭급 레스토랑 등 가볼 만한 장소가 많다. 


그중에서도 이날 간 곳은 호텔 뮤즈로, 방콕 마니아들에게 훌륭한 시설과 좋은 위치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뮤즈 호텔의 지하에는 정통 이탈리안 퀴진 ‘메디치 키친 앤 바’가 있다. 방콕에는 많은 파인 다이닝이 있지만, 가격을 고려하면 어디든 쉽게 발걸음하긴 어렵다. 메디치 역시 디너 코스는 상당한 가격을 부담해야 하지만, 런치 코스는 디너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정통 이탈리안 퀴진을 즐길 수 있다. 방콕에 오기 전 누군가가 메디치의 런치 코스를 강력 추천해뒀기에 마지막 날의 점심으로 여기를 선택했었다.


스타벅스부터 호텔 뮤즈까지는 금방이다. 몇 분도 걷지 않아 금세 호텔 뮤즈가 나왔다. 지하에 위치한 메디치로 내려가자 어두운 조명이 우리를 맞았다. 최언니와 나는 디자인과 분위기에 감탄하며 메디치로 걸어 들어갔다. 런치 치고 다소 늦은 시간에 가서 그런지 레스토랑은 한산했고 손님도 몇 팀 되지 않아 바로 자리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언니와 나는 각각 안내해주는 메뉴를 한 가지씩 선택했다. 가격에 비해 호화로운 코스다, 정말로. 메디치 런치 코스는 택스를 포함해 600밧 정도 나오는데, 환산해 봐야 2만원 선이니까. 전채부터 후식까지 제대로 포함해 나오는 이탈리안 퀴진 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임에 틀림없다.


식전 빵. Copyright 2015, 최언니. All Rights Reserved.


천천히 음식이 서빙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최언니와 나는 전채부터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전채는 카프레제와 루꼴라 샐러드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샐러드를 먹기 전에 여러 개의 포크 앞에서 다소 당황한 상태였다. 왜 그런 것 있잖나. 분명 식기 사용법 자체는 식사에 별 상관없는데 어쩐지 열을 맞춰 늘어선 커트러리 앞에서 주눅이 드는 것 같은 느낌. 흡사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던 옷에 234만 9천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본 것 같은 당황스러움! 나는 최언니에게 속삭였다. 전에 들어보니 밖에서부터 하나하나 쓰는 거라고 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최언니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밖에서부터 쓰는 게 맞다. 바깥에서부터 전채 요리, 생선 요리, 고기 요리 나이프와 포크가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 어지간한 고급 퀴진이라도 커트러리 사용법에 대해 고객에게 훈수를 두거나 간섭하지 않으니 그냥 보이는 대로 집어 들어 사용하면 된다. 생각해보면 인도 요리를 손으로 먹지 않는다고, 혹은 서양인들이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손가락질 하는 일은 없으니까 그거랑 비슷한 거지 뭐. 그냥 편한 대로 하나씩 써도 별 문제 없다. 우리도 그냥 내키는 대로 집어들어 하나씩 사용했다.


최언니와 내가 포크를 하나하나 들어 포크의 사용법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이 메인 요리가 나왔다. 언니는 치킨 요리를 시켰고, 나는 알리오 올리오를 시켰다. 


메디치 직원들은 서비스에 충실했다. 내 파스타에는 최언니 허벅지만한 치즈 그라인더를 가지고 와서 치즈를 갈아주었고, 물잔이 빈다 싶기 무섭게 잔을 채워주었다(사실 나는 하마만큼 물을 마시는 사람이기에 좀 민망했다는 건 비밀이다). 런치에도 스테이크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그건 어쩔 수 없었고 치킨과 파스타도 흡족했다. 최언니는 한 입 한 입 감탄하며 음식을 즐겼고, 나도 꽤나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최언니는 메디치를 나오며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아쉬움이 남는 듯했다. 나도 그랬다. 방콕에 올 때마다 이번에는 여력이 되면 꼭 가 봐야지, 하는 호텔들이 있는데 뮤즈도 그 중 하나다.  페닌술라라거나 한사르라거나, 방콕의 다른 특급 호텔도 좋지만 뮤즈도 꼭 가보고 싶다. 특히 두 개 층을 통째로 사용한다는 스위트룸에 말이다. 특급 체인 호텔에 못잖은 서비스와 시설을 자랑한다던데 말만 들어보고 가 보질 못 했으니. 물론 실제로 방콕에 방문할 즈음 뮤즈 스위트룸에 묵을 만한 돈이 있다면 그곳에 쓰지 않을 것 같긴 하다…. 


최언니와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있는데, 새 캐리어라는 게 사기 참 애매한 물건이란 거다. 정작 필요할 때는 제한적이지만 필요할 때가 되면 다른 곳에 돈을 쓸 일이 너무도 많다. 여행을 준비하며 이번만은 새 캐리어를 사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결국은 다른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캐리어를 구매할 돈으로 여행에 투자를 하면 좀 더 나은 여행이 될 텐데, 옷을 한 벌 더 살까, 차라리 면세점에 쓸까, 아니면 현지에서 고급 스파라도…, 같은 생각들. 호텔도 비슷하다. 나는 잠은 안락하고 청결한 곳에서 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적당한 개인실이면 만족하는 소박한 배낭여행객이기도 하다. 언젠가 뮤즈와 연이 닿아서 스위트룸에 묵게 된다면 로또 당첨 후에나 가능할까! 하하하.


우리는 최언니의 일정에 맞춰 레스토랑을 나왔다. 말했다시피 저녁은 따로 보낼 예정이였다. 언니는 사톤에 있는 한 마사지 샵을 예약해뒀었고, 스파를 마치고 일곱 시 반 즈음 다시 만나기로 했다. 최언니는 귀국 전 꼭 족발덮밥을 다시 먹어야겠다고, 그것도 피어21의 족발덮밥을 먹어야겠다고 했기에 우리는 아속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칫롬을 좀 구경하다가 아속으로 돌아가 뭐라도 끄적이려는 심산으로 최언니를 배웅하고 칫롬의 쎈월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굳이 왜 쎈월이냐고 묻느냐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센트럴 월드를 참 좋아한다. 젠이나 이세탄은 소박한 한국 동네 백화점 같고, 센트럴 월드는 멀티 컴플렉스 쇼핑몰로 쇼핑을 즐기기에 좋다. 


이날은 젠과 이세탄 구석구석을 돌아보기보다는 쎈월을 중심으로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다. 물론 나는 부유치 못한 배낭여행객이므로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아이쇼핑만 즐겨야 했지만! 매번 생각하지만 빈곤할 때 호화로운 백화점을 둘러보는 것도, 허기질 때 장을 보러 나가는 것도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모두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고, 모두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쓸데없는 생각이다. 주머니에 든 재화에는 한계가 있고, 내 위의 크기도 제한적이다. 다행히도 나는 매우 영민하여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달랑달랑 가벼운 주머니로도 즐겁게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헤이, 익스큐즈 미?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뭐지? 고개를 돌리자 웬 서양 남자 하나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번호를 알려달라고, 첫 눈에 반했다고, 내 사랑을 바치겠다는 남자에게 번호를 건네주니 알고 보니 정유업계의 떠오르는 신흥 부호였고 사막에서 벌어지는 상상초월 러브 스토리가 시작됐다…는 로맨스 소설 같은 일은 당연히 아니었고, 생글생글 웃는 것이 누가 봐도 백 퍼센트 영업용 미소였다. 감정 따위는 단 1g도 실리지 않은 자본주의적 미소. 아, 한국선 내 얼굴만 봐도 이런 사람들이 슬슬 날 피해 가는데 대체 왜 해외에선 이렇게 붙들리곤 하는 거지! 미처 한탄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슬슬 웃으며 나를 웬 가판 앞으로 데려갔다. 아니, 시간 없어 하고 가버려도 사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남자의 영업 기술이 호기심을 유발했고 시간도 넉넉했기에 나는 귀를 기울여 남자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남자는 모 화장품 브랜드의 매니저라고 했다(아마도 나 같은 외국인 호구, 아니 외국 관광객에게 화장품을 판촉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인 듯했다). 남자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안녕? 나는 이 화장품 매니저야. 이 브랜드 읽어 볼래? 맞아, 그렇게 읽는 브랜드야. 너 영어 잘하는 구나? 여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네 시간을 좀 쓸게. 자, 네 손을 좀 봐. 네 피부는 지금 마르고 건조하지, 약간의 각질도 있는 편이야. 물론 심각한 건 아니고. 아, 그런데 너 어디서 왔니? 한국? 남한, 아니면 북한? 오, 남한! 다행이다, 북한 걔네들 완전 또라이야 그치?―여기서부터 슬슬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이 화장품은 다른 것과 달리 페이셜 코스메틱은 아냐. 물론 얼굴에 써도 상관없을 정도로 좋은 기능을 갖추고 있긴 하지. 그런데 원래는 이렇게, 몸의 피부에 문지르는 거야. 봤어? 이 화장품에는 소금이 들어 있어. 사해에서 나온 소금. 너 사해 알아? 이스라엘 사해. 거기서 나온 소금인데, 아 정말이야, 다른 화장품처럼 중국에서 나온 소금으로 사기를 치는 건 아니라고 보증할게, 여기 이스라엘이라고 쓰여 있는 거 보이지….


위에 써 둔 건 남자의 말을 반의 반의 반 정도로 줄인 거다. 말을 어찌나 웃기게 했는지, 난 북한 이야기부터 슬슬 웃음이 터지기 시작해 중국산 소금 이야기가 되어서는 화장품은 안중에도 없이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푸하하하하, 내가 폭소를 터뜨리자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유머러스한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능란한 화법으로만 점수를 매긴다면 90점 이상은 족히 받을 법했다. 자, 이렇게 스크럽을 마친 손에다가 이 바디버터를 바르면…. 아, 너는 무슨 향을 좋아하니? 이건 망고 향이고, 이건 바닐라 향이고, 이건 무향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바르면 돼. 오 그래 좋아 바닐라 향, 발라 봐. 그리고 네 다른 쪽 손과 비교해 보렴.


내가 오, 탄성을 터뜨리자 남자는 자부심 가득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매장 매니저라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건 정말 좋은 화장품이야. 화장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지, 이게 얼마나 어메이징한 제품인지 말야…. 그리고는 이내 눈앞에 다가오는 것은 당연히, 두둥, 계산기. 남자는 영업용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했다. 이 화장품은요 고객님, 경험하신 것처럼… 스크럽과 버터를 함께… 단돈… 피부에 놀라운 기적이…. 


아이고, 나는 계산기의 가격을 확인하고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화장품의 효능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다. 아주 잠시 복용했던 것이지만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 정도 가격이면 고작 피부에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바르면 살도 빠지고 눈도 커지고 코도 오똑해지고, 화장품 스스로 직립보행도 하고 비행도 해야 한다. 기초 화장품도 아니고 고작 바디용품에 그 정도 돈을 쓸 수는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웃으며 발을 뒤로 뺐다.


매니저는 놀란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놀란 게 아니라, 누가 봐도 가장한 것이 분명한 기색으로. 그는 걱정스레 말했다. 네가 왜 이 좋은 기회를 잡지 않는지 모르겠어, 만일 돈이 문제라면, 너는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내가 할인을 해 줄게―왜 나는 판촉에 필사적인 사람들에게만 귀엽고 사랑스러워지는 걸까!―, 그렇다면 가격은…. 남자는 할인된 가격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처음 제시된 가격의 80% 정도 되는 금액이었지만, 내 생각에 합리적 소비를 위해 스크럽에 쓸 수 있는 가격은 10% 정도였기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정말 처음 제시된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그 가격이면 내가 가방을 하나 사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헤이, 큐트 걸! 남자는 뒤에서 나를 애절하게 불렀다. 목소리가 너무 안타까워 다시 웃음이 터졌다. 웃으며 남자를 돌아보자 남자는 대체 뭐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날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대체 왜 이 기회를 잡지 않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자본주의적 안타까움이 반(하지만 단언컨대 분명 연출된 표정이었다), 날 꼭 잡고 싶다는 간절함이 약간, 지금이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또 약간. 


안타깝지만 너무나도 값비싼 사치품이었기에 나는 손을 흔들어 남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혼자 흐흐 터지는 웃음은 몰래 감추고. 남자는 필시 매우 안타까워했겠지만 나는 남자의 언변과 화술을 되짚으며 그날 최언니와 다시 만나기 전까지 홀로 즐거워했다. 나 혼자만 즐기다 가서 미안, 미스터. 하지만 스크럽과 바디버터에 수십만 원을 쓸 수는 없어. 나는 가난한 여행객이고, 가난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 금액이라면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쏘리.




칫롬에서 BTS를 타고 아속에 도착하니 최언니와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칫롬에서 이리저리 시간을 많이 흘려보냈나보다, 혼자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최언니는 30여 분 정도 후에 도착했는데, 뭐 글을 쓰려면 쓸 수도 있었겠지만…. 결론은 안 썼다. 하언니와 잠시 카톡으로 수다를 떨다 보니 30분이 3분처럼 흘러갔거든. 혼자 오니 너무 외로웠다, 공항에서 연예인을 만났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모 배우가 태국에 왔다가 갔다는데 왜 그 배우는 못 봤는지 모르겠다, 오죽 다시 여행을 가고 싶었으면 집에 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승무원 언니를 보고 너무 부러웠다…. 하언니는 홀로 슬퍼했다. 그럴 만도 하지, 어제는 방콕이었는데 오늘은 다시 사무실이라니. 


하언니의 푸념을 들으며 낄낄대기도 하고 언닐 도닥거리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최언니가 저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사지를 받고 이것저것 사 오느라 늦었다고 최언니는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뭐, 늦을 수도 있는 거지. 나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급한 건 그게 아니야, 나 배고프다고. 나는 조용히 속달거렸다. 언니나 나나 메디치에서 밥을 먹은 지 꽤 된 상태였고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기에 몹시 허기가 졌다. 우리는 손을 잡고 일정의 마지막 만찬을 위해 비장하게 피어21로 돌진했다.


메뉴는 볼 것도 없이 족발덮밥. 그렇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바로 이 족발덮밥이 태국의 미식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마지막 날이니 맛난 음식을 맘껏 먹고 가겠다고, 이제 당분간 방콕에 올 일이 없을 텐데 제일 아쉬운 게 족발덮밥이라고 최언니는 진심으로 한탄했다. 


으악, 맛있어, 으아, 이제 마지막이야…. 최언니는 한 숟갈 한 숟갈마다 희노애락을 오갔다. 나는 언니보다 지극히 이성적인 인간이므로―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실은 나의 일정은 꽤 오래 남아있었으므로―이 언니가 정말 허공에 울부짖기라도 하려나, 지킬 앤 하이드가 따로 없네, 뭐 그런 냉정한 생각을 하며 언니를 흘끗거렸다. 앞에 둔 음식은 맛있고 얼마 남지 않은 일정은 슬프고, 뭐 그런 묘한 상태로 최언니는 한 그릇을 깔끔히 해치웠다. 


생선 튀김 요리. Copyright 2015, 라이카. All Rights Reserved.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최언니는 연기가 지글지글 올라오는 옆 테이블을 흘끔거렸다. 저거 뭐지? 몰라, 하지만 일단 튀김 같아 보이니까 맛있을 거야. 튀긴 음식은 두고 볼 것도 없이 맛있음. 최언니는 내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보니 그건 생선 튀김 요리였다. 우리나라에선 일품 요리로 생선 튀김이 나오는 일은 드문 것 같은데 그 생선 튀김 요리는 제법 그럴듯한 일품 메뉴처럼 보였다. 지글지글 달아오른 철판 위에 숙주나물을 잔뜩 올리고 그 위에 튀긴 생선을 올려둔 모양새는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였다. 


최언니가 두 번째 저녁 식사로 그 요리를 가져오자 오,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내 휴대폰에는 아직도 이때 찍은 동영상이 있는데 동영상 내내 최언니는 두말도 않고 음식에 집중하고 있다. 내가 몇 번이나 맛있냐고 묻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흘끗 나를 쳐다보는 정도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이 영상이 유일하게 찍어 둔 음식 동영상이기도 하고, 내가 한 입 맛도 못 본 것이라 그런지 유독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못 먹은 음식은 돌아오지 않지! 돈을 들여 다시 그곳에 방문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한번 맛이라도 볼 걸, 여행기를 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슬슬 최언니 여행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최언니와 나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호텔 1층의 바로 향했다. 이 호텔은 숙박하는 사람들에게 호텔 1층의 바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료 시음권을 준다. 실내석과 발코니석을 합해 30여 석 정도 되는 자그마한 바지만, 제법 제대로 된 바와 바텐더를 갖춘 곳이었다. 


나와 최언니는 발코니 석에 앉아 사진을 찍기도 하고, 언제나처럼 서로를 웃기는 데 매진하기도 하다가―슬슬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술 한 잔 씩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에 대해, 지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어느새 훌쩍 지나간 이번 여행에 대해.


여행의 밤, 특히 마지막 밤에는 센티멘털해지기 마련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최언니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행 시작 전에는 걱정이 많았다고. 최언니도 하언니도 나도, 서로 이렇게 장기간 원거리 여행을 함께해 본 적이 없었다. 여행기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자칫 잘못하면 보험 깨고 그간 부은 금액까지 날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친구와의 여행이다. 혹시나 함께 여행을 하면서 그간 좋았던 관계까지 와장창 부서지면 어떡하나, 여행 전에는 걱정이 많았다고 최언니는 말했다. 


게다가 내가 오기 전까지 딱히 컨디션이 좋지도 않았단다. 외롭고, 쓸쓸했고, 내가 오기 전에 너무 안 좋은 꿈을 꿔서 기분도 별로였다고. 사람 심리가 그렇다. 꿈이라는 걸 백 퍼센트 맹신하겠다는 게 아니라, 하필이면 나름의 거사―우리 두 사람이 느낀 부담과 걱정을 합하면 이 여행이 거사는 거사였다―를 앞에 두고 있는데 안 좋은 꿈을 꾼다면 누구나 언짢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냥 안 좋은 꿈이 아니라 이가 빠지는 꿈이었단다. 치과의사가 엉뚱한 이를 세 개씩이나 뽑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꿈을 꿔서 너무 기분이 나빴다고, 원래 이 빠지는 꿈이 정말 안 좋은 꿈 아니냐고, 최언니는 조금 흥분해서 말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때까지도 기분이 나쁜지 분통을 터뜨리며 말하는 최언니가 너무 귀여웠지만 비직비직 배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여하간 별일 없었으니 된 것 아니냐고 내가 최언니를 달래자, 언니는 다소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너 오고 나서 같이 여행하는데 기분이 너무 좋더라. 최언니는 말을 이었다. 당연한 걱정에 흉몽까지, 우려가 첩첩이 쌓이는 기분이었는데 나를 딱 보는 순간 기분이 너무 좋았다고. 같이 람부뜨리와 카오산 구경을 하고, 밥을 먹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그간 쌓였던 걱정과 근심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최언니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 누구든 이 사람이 이토록 진지한 게 얼마나 보기 드문 일인지 알아야 이 순간 내가 받은 감동을 이해할 텐데. 만나면 대부분 웃고 떠들고,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서로를 웃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로서 정말 보기 힘든 분위기였다. 게다가 최언니는 원래 먼저 나서서 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열 마디쯤 하면 간신히 서너 마디쯤 하는 사람이랄까. 이날 여행이 안긴 낭만에 취해 최언니가 주절주절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나는 맛있게, 그리고 기쁘게 들었다. 최언니는 몇 번이나 다행이다, 그리고 정말 즐거웠다는 말을 되뇌였다. 나는 웃었다. 내가 언니들을 보고 느꼈던 안도감과 반가움을, 즐거움과 유쾌함을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는 걸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조근조근 털어놓는 최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남몰래 생각했다. 다행이라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최언니도, 그리고 분명 하언니도 이 여행에서 무언가를 남겨간 것이 분명하다고. 좋은 여행 메이트일지, 혹은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일지, 하다못해 정신없이 웃느라 흘린 눈물 한 방울일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쯤 이 상황을, 이 감정을, 이 생각을 글로 남겨둬야겠구나 결심했던 것 같다. 아주 뒤늦게 여행기를 시작하면서 최언니에게 내가 이걸 왜 쓰는지 모르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 있지만, 아마 이 여행기의 씨앗은 이날 밤 잉태되었으리라. 최언니의 수줍은 고해성사를 들은 그날 밤에, 나도 그랬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지금쯤은 하언니도 최언니도 알고 있겠지만, 나도 당신들과 함께하는 여행을 무척 걱정했다고. 하지만 다행히도 마지막 하루 한 시간까지 그건 다 기우였다고. 나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최언니를 보았을 때의 반가움이, 언니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지냈던 때의 즐거움이, 괜한 우려가 사그라들 때의 상쾌함이, 함께할 여행을 손꼽아 바라는 기대가 피어났다고. 이걸 꼭 언니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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