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이름으로 알아보는 옛 이야기
분당선
가천대 : 대학교이름
태평 : 태평동
1970년대 수도권 정비 일환으로 광주대단지가 건설되면서 서울지역 주민들이 집단 이주하였고, 그 결과 1973년 성남출장소가 시로 승격됨에 따라 새롭게 동을 창설하였는데, 당시 시정자문회의에서 ‘근심 걱정이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붙인 이름이다.
모란 : 모란시장
모란개척단의 김창숙(金昌叔)[1] 이 1964년에 만든 시장이다. 김창숙의 고향이 평양이라 이름을 모란봉에서 따왔다고 한다.
참고 : https://namu.wiki/w/%EB%AA%A8%EB%9E%80%EC%8B%9C%EC%9E%A5
야탑 : 야탑동
‘야탑(野塔)’이라는 명칭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처음 명명되었는데, 오야소(梧野所)의 '야' 자와 상탑, 하탑의 '탑' 자를 취한 것이다. 오야소란 이름은, 원래 마을 앞의 들이 넓고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오동나무 들마을'이라고 하다가 오동나무 열매가 많이 열리는 ‘오야실(梧野實)’로 변하였고, 그것이 다시 ‘외실’ 또는 ‘왜실’로 줄었다가 한자로 표기할 때 오야소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 상탑, 하탑의 ‘탑’은 그 정확한 축조 및 해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300여 년 전 이 지역에 탑이 있어 탑골이라 부른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이매 : 이매동
첫째는, 이곳에 있던
탄천변 들판을 ‘이무술들’이라 하는데, 이 마을이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므로 ‘이무술’과 ‘매화낙지’를 취하여 이매동이라 하였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동쪽의 영장산(413.5m)을 ‘매지봉’이라고도 하는데, 이 줄기에 크고 작은 두개의 매지봉(梅址峰)이 있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이무기와 관련된 전설로 옛날 탄천 변 방죽에서, 주민들이 천년 만에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려던 이무기를 잡아 죽였는데, 그 저주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위령 승천제를 지냈으나 제사상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밤 주민들 꿈에 이무기 화신인 백발노인이 나타나 동민들의 정성에 보답하여 저주를 풀었다고 하고, 제를 지냈던 자리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진주 유씨 세보』에 ‘임의곡(任意谷)’또는 ‘이매곡’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의술’로 불리웠다는 설도 있다.
서현 : 서현동
광주군 돌마면 돈서촌, 양현, 통로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진 곳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통폐합때 돈서촌(遯書村)에서 ‘서’자를 취하고 양현리(陽峴里)에서 ‘현’자를 취하여 ‘서현리’라 부르게 된 곳에서 유래하였다. 양현리는 ‘볕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글자 그대로 ‘햇볕이 잘 드는 고개’로 풀이되어 ‘양현리’가 되었다고 하며, 돈서촌에는 어느 선비가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수내 : 수내동
‘수내(藪內)’라는 이름은 이곳의 ‘숲안’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숲 또는 늪을 뜻하는 ‘수’와 안을 뜻하는 ‘내’자를 취한 것이다. 이 ‘숲안’이라는 이름은 조선 숙종 때 청주목사를 지낸 이병익이 이곳 마을 앞 분당천(수내)변에 숲을 가꾸었으므로 ‘숲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고, 일설에는 경종때 이병태(李秉泰) [1688~1758]가 부락 앞에 숲을 가꾸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근 탄천(炭川)의 우리말 표기가 ‘숯내’이며 지금 분당천(탄천의 지류)을 이 지역(숲안의 역말 등)에서 ‘수내’라 하였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지역 지명이 분당천=수내, 탄천=숯내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정자 : 정자동
이 지역이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제 9대 임금 성종의 아들(12남) 무산군(茂山君)의 제 5자인 태안군(泰安君) 이팽수(李彭壽)[1490~1525]의 묘역과 그 자손들이 터를 잡았다. 태안군의 증손이 되는 이경인(李敬仁)[1575~1642]은 이천부사겸 광주병마진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 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소일하였다. 그 후 그가 즐기던 ‘정자가 있는 마을’란 뜻의 ‘정자리’가 되었다.
미금 :
구미동(九美洞)과 금곡동(金谷洞) 사이에 있어서, 두 동네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https://namu.wiki/w/%EB%AF%B8%EA%B8%88%EC%97%AD
오리 :
겨울에도 강이 얼지 않아 오리가 많이 찾아들어서 '오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예로부터 오리나무가 많이 자란 지역이라고 해서 오리라는 지역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어떤 연유에선지 전설은 한자식 표현을 궅혀서 오동나무 오(梧)를 사용해 표기합니다.
http://onhangeul.tistory.com/300
신분당선
판교 : 판교동
마을 한복판으로 국사봉 자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려 탄천에 합류되는 운중천이 흐르는데 여기에 넓은 판자로 다리를 놓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널다리’로 부르다가 ‘너더리’로 변했고 이것을 한자로 판교(板橋)라고 표기한 것이다.
8호선
수진 : 수진동
이 지역에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7째 아들인 평원대군(平原大君)이 사망하자 영장산(靈長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壽進宮)을 지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궁말, 궁촌, 수진궁, 수진동, 수진리 등으로 불리우다가 성남시로 되면서 수진동으로 된 것이다.
신흥 : 신흥동
1973년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탄동의 일부를 갈라 독립시킬 당시, 시정자문회의에서 ‘새롭게 부흥하자’는 뜻으로 현 신흥1동, 신흥2동, 신흥3동 지역을 신흥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단대오거리 : 단대동
단대리’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탄리(炭里)’와 함께 개발이전 성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불리워진 지명이다. 과거 단대리는 현 단대동, 금광동, 중동, 은행동 전역 및 신흥동 및 성남동 일부까지 포함하였다. 일설에는 1973년 시승격 당시 탄리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고개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그 고개의 흙이 붉었으므로 단대골 또는 던데, 단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이미 조선시대 문헌에 단대(丹坮)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근거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입구 :
산성 : 산성동
과거 단대동 및 창곡동 일부가 병합된 지역으로서 1983년 10월 단대1동으로부터 분동되어 단대4동으로 불리웠다가 1989년 5월 성남시의 구제(區制) 실시로 수정구 산성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동명 개편시 남한산성(南漢山城) 진입로인 산성로와 접해 있고 단대공원과 단대체육공원, 산성소공원 등 녹지공간이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참고자료 : http://blog.naver.com/pro2454/172685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