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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루 Feb 07. 2020

꿈은 어리석은 욕심일 뿐일까?


-XX시 도서관 휴관 안내

-XX문화센터 XX강좌가 부득이하게 휴강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월요일. 출간한 책과 관련된 두 건의 강연이 취소되더니. 다음날은 집순이인 내가 유일하게 외출하는 장소가 당분간 문을 닫겠단 소식을 전해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백수 생활이 더욱 단조로워진 것이다.


  모든 일정이 사라진 수요일. 오전 8시에 눈 떠졌으나, 평소처럼 청소와 산책을 하지 않았다. 김밥 속 재료처럼 이불 안에 몸을 단단히 말아 넣은 후 영화를 한 편 봤다. 제목은 ‘컨테이젼’. 신종 바이러스가 세계 곳곳을 덮치는 과정을 담은 영화로, 요즘 상황과 꼭 닮아있었다. 뉴스로 짐작할 수 없는 미래를 예견하겠다며 호기롭게 본 영화인데, 끝내 두려움만 커졌다. 이러다가 집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이런저런 잡생각을 걷어내기 위해 11시쯤 아침을 먹고 노트북을 켰다. 글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할 일’과 ‘갈 곳’이 사라졌으나 ‘시간’을 알차게 써보잔 마음이었다. 게다가 쓰다만 글들이 바탕화면에 질서 없이 붙여둔 포스트잇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 ‘제목 미정_시놉시스(2)’란 파일을 클릭했다.

 

  그 안에는 쓸데없는 능력을 지닌 루저들이 모여 대기업 횡포에 맞서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시 읽어봐도 매우 진부했다. 이러니 두 번의 수정을 한 후에도 ‘제목 미정’으로 남아있던 거다. 다음으로 미루고 다른 파일을 열까? 근데 열고 싶은 파일 없는데? 글 쓰지 말까? 그럼 뭐하지? 딱히 할 일이 없어 난감한 상황이 대체 몇 년 만인지. 그때였다. 카톡이 왔다. 나연 언니였다.      




- 하루야. 통화 가능해?

- 네!     


  답장을 보냄과 동시에 ‘읽음’ 표시가 사라졌다. 언니가 메시지를 보내고 카톡방을 빠져나가려는 찰나였던 것. 나는 카톡방에서 잠복하며 언니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굴었다. 글을 쓰지 않아도 될 핑곗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언니!”

 “응! 그렇지 않아도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

 “저두요!”      


  우린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 가득한 말투로 서로를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6개월 만에 하는 통화였다.

      

  나연 언니와 난 글쓰기 모임에서 만났다.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오기 전에 참석하던 모임으로, 내게는 ‘첫 시나리오 스터디’였다. 그때 언니는 모임의 리더로 대본 쓰기 경험이 전혀 없던 나를 멤버로 받아주고, 친절하게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     


 “하루야. 요즘 대본 좀 쓰니?”

 “아뇨. 전 아직도 시놉시스만 끄적거리고 있어요. 언니는요?”

 “난 열심히는 쓰고 있지. 늘 그렇듯.”     


  언니의 마지막 말에 나는 당황했다. 전날 보낸 메시지가 생각 나서다. 지난밤 나는 한 유명 공모전 당선자 발표 글에서 언니 이름을 봤다. 당선자 이름 옆에 있던 간략한 작품 소개도 지난해 그녀가 쓰던 대본과 흡사했다. 그래서 기쁜 마음에 이런 메시지를 보냈었다.     


- 언니! 잘 지내죠? 좋은 소식 있는 거 아닌가요?

- 나 지금 알바 중인데 늦을 것 같아. 내일 전화할게^^     


  돌아온 그녀의 답변에 긴가민가 불안했다. 한데 ‘늘 그렇듯’이란 말에서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 당선자는 언니가 아니구나. 그냥 언니랑 이름이 똑같고 비슷한 내용의 대본을 쓴 다른 사람이구나. 순간 무안하고 미안해졌다.

     

“아, 그렇구나. 이번에 또 공모전 있었는데, 거긴 작품 냈어요?”

“당근이지.”     


  언니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덕분에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초조했던 내 속도 진정됐다.     




  사실 언니는 8년간 글을 쓰고 있다. 한 공모전에서 시나리오가 당선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때 써낸 시나리오는 회사를 오가며 완성한 첫 작품이었다. 직장에서 남들보다 빠른 승진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속 빈 강정 또는 팥 빠진 붕어빵처럼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만난 게 ‘글’이었고, 많은 종류의 글 중에서도 ‘시나리오’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단다.     


  시나리오가 당선된 후 언니의 삶은 급커브길을 만난 자동차로 변했다. 직장생활이 안갯속이라면 전업 작가는 암흑일 것 같았으나, 지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암흑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충동적이고 빠른 결정이 이어졌다. 곧바로 회사를 퇴사한 것이다.     


  그 후 당선된 시나리오는 영화로 제작되지 못했고, 보조작가와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또 다른 공모전을 준비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그런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좀 더 가까워진 후에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있잖아. 나 oo공모전 최종심까지 올랐었어.”

“또?”     


  이번만 도전하고 포기해야지. 이런 결심을 하는 때마다 공모전 최종심에 언니 작품이 포함됐다. 그럼 ‘다음에는 혹시?’란 기대를 품게 됐고, 그렇게 버텨온 게 8년이 된 것이다. 난 내 말 따위가 위로되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거봐, 언니. 언니 잘 쓴다니깐요. 그러니까 계속 최종심에 올라가죠.”

“과연 그럴까?”

“네?”

“이게 내 실력인 게 아닐까? 더는 올라갈 수 없는, 딱 턱걸이까지가 내 실력이면 어쩌지?”    


  ‘턱걸이’란 단어 탓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자존감이 떨어지는 순간마다 ‘턱걸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노력보다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명문대생과 유학생이 가득했던 과거 회사 동기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억척스럽게 프리랜서 일감을 알아볼 때도, 나는 툭하면 ‘겨우겨우 턱걸이했네’란 자조 섞인 말을 늘어놨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고작 ‘턱걸이’ 까지는구나, 이렇게 결론 낸 적 많았다.      


“나 요즘 길을 잃은 기분이야.”     


  대답을 찾지 못한 사이 언니가 고백에 가까운 얘기를 꺼냈다. 통화를 시작할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음성이었다. 피아노 건반으로 비유하면 안부를 물을 때는 ‘솔’, 저 얘기를 할 때는 ‘도’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힘내세요’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그 순간 몇 달 전 한 강연장에서 만난 드라마 작가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왜들 그렇게 놀라죠? ‘글 빚’이란 단어 들어본 적 없어요?”     


  없었다. 생소한 탓에 작가의 장밋빛 인생을 비유하는 ‘글 빛’인 줄 알았다. 잘못짚었다. 작가님이 말한 ‘글 빚’이란 ‘글 때문에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돈’을 의미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제작회사에 계약금을 받고 쓴 작품이 방송국에 편성되지 않으면 계약금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일도 노동인데, 일을 하고도 한 푼도 받지 못한다는 게 놀라웠다. 작가님은 그렇게 7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두 곳에서 글 빚을 지고, 그 후에 방송된 작품으로 그 빚을 거의 갚았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황당하죠? 등단하고 여태껏 글로 돈을 못 벌었다는 게…. 근데 어쩌겠어요. 이 바닥 규칙이 이런 걸.”


  작가님은 힘껏 휘어진 활처럼 눈웃음을 지었지만, 내게는 그녀의 눈 밑에 그간 마음고생으로 드리워진 까만 그늘만 보였다.   



  언니와 할 얘기가 참 많았다. 3시간이나 통화했던 걸 보면 말이다. 중간중간 지난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까르르거렸지만, 대화는 자꾸만  이런 방향으로 흘러갔다. 

   

“근데 내가 가장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뭔데요?”

“내년에도 너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봐. 그게 무서워.”

“언니 사실 저도 무서워요.”

“넌 뭐가?”

“글 쓰는 재미를 느낀 지 몇 년 되지 않았는데, 금방 시들해질까 봐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일’ 그것도 ‘돈이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일’을 해 나가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꿈을 이룬다 한들 그 후에 행복한 결말이 될지 알 수 없음에도, 끝없이 오늘과 미래를 갱신해 나가는 건 내 삶을 정말 성장시키는 시간일까.




  사실 노트북 바탕화면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파일에는 쓰다만 글만 있던  아니다. 자격증 관련 정보를 정리한 파일, 창업 관련 내용을 모아둔 파일 등. 좋아하는 일과 관련 없지만, 불안해서 모아 두고 쌓아둔 것들이 함께 엉켜있었다.     


“우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나가면 만나요.”

“생각보다 꽤 길게 갈 것 같지 않아?”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하더라고요.”

“그럼 우리 몇 달 뒤에나 보겠네.”     


  언니와 난 끝내 만날 날짜를 정하지 못했다. 아마도 외출하는 게 편안해지는 시기가 온다고 한들, 서로에게 바로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일’ 때문에 실패하고 좌절했던 얘기를 또 주고받게 될까 봐. 더욱더 두려워졌으니까.     


  아마 언니는 당분간 더욱 열심히 글을 쓸 것이고, 난 조만간 바탕화면을 정리하며 무언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에게 어떤 확신을 안겨주지 않을 거란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PS> 이 글 쓴 건, 내년엔 언니와 저런 대화를 하지 않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이란 게 꼭 꿈을 이루어야만 느끼는 감정이 아란 걸 압니다. 하지만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고 소소한 행복을 놓치면서까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욕심이 아닌 뚜렷한 목표가 될 때도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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