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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Feb 21. 2024

박수를 쳐라, 희극은 끝났다.

알반베르크 스트링 콰르텟 고별 연주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


베토벤이 마지막 쓴 현악 4중주 op.136 악보에 쓰여 있던 문구입니다.

앙코르곡으로 연주된 3악장 렌토 아사이(매우 느리게)는 그들의 고별 연주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지요.

그건 작곡가나 알반 베르크 스트링 콰르텟에게 죽을 때 딱 한 번 노래한다는 백조의 노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휴식과 평화를 위한 달콤한 노래'라는 부제가 쓰여있는 그 곡은 따뜻한 슬픔이었습니다.

따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행복했지요.

예술은 소멸을 전제로 한다지만 고별연주라는 섭섭함을 동반해서인지 감동이 남다르더군요.

소리가 들어있는 그림, 악보에서 하나씩 사라져 가는 음표들이 절절했습니다.


낮에 관람한 오르세 미술관전에서 본 드가의 '오페라 하우스의 관현악단'을 마음에 두고 좌석에 앉았습니다.

제1 바이올린 귄터 피클러를 선두로 2년 전 타계한 비올리스트 토마스 카쿠스카의 제자 이자벨 카리지우스와 베이스가 더 잘 어울릴법하게 큰 덩치의 바이올리니스트 게르하르트 슐츠, 첼로의 발렌틴 에르벤이 한국에서의 마지막 연주를 위해 무대에 섰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연주자들의 검정 턱시도와 까만 구두를 연결하는 검은색 양말까지의 그 엄격함을 사랑합니다.






하이든의 음악은 순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편안합니다.

그의 첫 곡 '태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op.20-4의 1악장은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가리개를 만드는 옛 여인의 단아함이 그려졌습니다.

2악장에서는 살얼음이 녹아 속살을 드러내는 시냇물의 맑음과 사찰 음식의 정갈함과 담백함이 느껴졌습니다.

네 개 악기의 밸런스와 공명이 차분히 이어짐에 가슴 한쪽이 아릿했는데 두 번째 곡 볼프강 림의 토마스 카쿠스카를 추모하는 '무덤'은 처연하더군요.

현대 음악이라 낯선 느낌이 적지 않았지만 작곡가와 연주자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서툴게나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수녀가 되려고 수녀원에 들어갔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유가 색깔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온통 무채색만 가득한 그곳에서 상자의 뚜껑을 열면 미농지 아래 엷게 색이 드러나는 60색 파스텔의 컬러가 그리웠던 거죠.  

하지만 무채색도 다색에 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현악 4중주는 H, HB, 2B,4B 연필과 닮았습니다.

옅거나 짙은, 혹은 가늘거나 굵은 선이 네 개의 현과 비슷하니까요.


마지막 곡 베토벤 현악 4중주 13번 op.130/op.133(대푸가)은 영화 카핑 베토벤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꽃은 나무에만 피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연주는 분명 스러져가는 베토벤이 아니라 알반 베르크가 피워내는 꽃이었지요.

국악에서 '줄을 가지고 논다'라는 말 '농현' 바로 그 표현이 적절했습니다.


폭풍 후에 고요가 없다면 폭풍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늘이 아름다운 건 시시로 변하는 구름 때문이고, 바다가 늘 같은 높이와 모양의 파도라면 지정된 레일 위를 돌고 도는 장난감 기차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보여줌과 들려줌은 빛과 바람, 해와 비, 그런 자연과 같았지요.

6악장에서는 '왜 대 푸가인가?' 하는 의문에 답을 주듯 거침없는 보잉에 활 털이 여럿 끊어져 나갔고 나의 호흡도 덩달아 불규칙했지요.


음악회나 전시회를 자주 찾는 내게 어떤 이가 부르주아 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있을 때보다 더 짜릿하고 행복한 시간은 없다. 하고 싶음과 할 수 있음을 교차시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여유 있는 삶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그건 비싸고 사치스러운 보석이나 모피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VIP석이나 로열석 같은 최고가의 좌석 티켓을 구매하지 않지만 언제나 최고의 음악을 듣는다'라고요.  


음악회에 가는 길은 늘 마음이 바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한 없이 느긋해지지요.

온몸 가득 달려있을 음표를 떨구고 싶지 않음입니다.

새벽이 올 때까지 알반 베르크의 연주로 발매된 죽음과 소녀 DVD를 보고 들었습니다.

연주자 한 사람씩, 스폿 라이트가 비치며 시작되는 2악장의 장송 행진곡은 비록 영상이지만 참으로 볼만합니다.


"친구들이여 박수를 쳐라, 희극은 끝났다. 천국에서는 들을 수 있으려나?"

베토벤이 임종 시 했던 말입니다.

알반 베르크 스트링 콰르텟이 마지막으로 전하고자 했던 말 또한 그와 같지 않으려나 합니다.(2007년 7월 씀)



*비가 연일 내리니 감정이 가라앉습니다.

필자의 경우 우울한 날엔 밝고 경쾌한 곡보다 슬픈 음악이 위로가 되더군요.

가브리엘 포레의 '파반느 op.50'(Fauré: Pavane, Op. 50 )를 들으며 이 글을 옮겨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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