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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Mar 21. 2024

'덮어놓은 책' 아이리스 머독






영화 제목이 아이리스였다.

맨 먼저 고흐의 그림이 떠올랐다.


아이리스는 그리스어 '이리스(Ἶρις)'에서 유래한 말로 무지개라는 뜻이고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영화 <아이리스, 2001년>는 리처드 이어 감독이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철학자였던 아이리스 머독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멋진 인생'이라는 정의는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어려운 명제다.

살아있을 때의 행복과 죽음으로의 절차가 너무 다른 생이었지만 '아이리스, 그녀는 멋진 인생을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 영화이다.



위대한 자의 인생은 세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리 쉽게 엿볼 수 있도록 오픈되어 있지 않다.

이 영화는 그러한 아이리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실적 요소에 충실하면서도 전기나 픽션으로 딱히 규정지을 수 없는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아이디스 머독(Iris Murdoch 1919.7.15-1999.2.8)과 문학비평가 존 베일리(John bayley 1925.3.27 –2015.1.12)와 40여 년을 해로한 부부이다.


남편인 존 베일리가 아이리스를 그리며 쓴 책 'Elegy for Iris'가 원작인 이 영화에서 존은 그녀를 처음 만난 무렵과 말년의 시간을 주관적 시선으로 서술한다.

극 중 두 사람의 대화나 주변 캐릭터, 사건 등은 책 속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도 있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다소 압축, 과장, 재창조된 요소들도 없지 않다.

저명한 소설가이며 철학자였다는 점, 치매로  고통받았다는 점, 선과 악, 자유, 성, 사랑의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던 그녀의 여러 모습에서 영화는 객관성과 사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Elegy for Iris'




책벌레로서 자기 앞가름도 못하는 존이 아이리스를 그토록 헌신적으로 돌봤던 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관계는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어 갔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아이리스가 치매에 걸리면서 존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처지로 바뀐 것이다.

그녀의 병은 둘의 관계에서 허구를 벗겨내고 본질을 밝혀낸다.

영화 아이리스는 본질적으로 사랑이 어떻게 변해가고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최고의 러브 스토리이며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방과 자신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조율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결혼 생활에서 어떻게 독립적 삶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탐구이기도 하다.




아이리스 머독



1950년대, 영문학 강사였던 존 베일리(휴 보네빌, 짐 브로드벤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아이리스 머독(케이트 윈슬릿, 주디 덴치)을 만나게 된다.

영국에서 가장 똑똑한 여자로 일컬어진 아이리스 머독은 당대 죄고의 찰학자이며 소설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옥스퍼드 대학 시절부터 특유의 자유분방함으로 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존은 그녀의 해박함과 시대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정신에 경외심을 갖고 그녀에게 몰입하지만 그녀의 분방한 사생활 때문에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학문적 동지로, 연인으로 사랑을 키워가던 둘은 결국 결혼 이후 40여 년간 고락을 나누며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 비견되는 영국 최고의 지성인 커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리스에게 알츠하이머 증세가 찾아온다.

자신의 정신세계가 무너져가고 있음을 알고 두려움에 떠는 아이리스, 존은 처음엔 아내가 치매에 걸렸음을 부인하지만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헌신적으로 돌본다.

아이리스의 증세가 최악에 이르러 도저히 집에서 간병할 수 없게 되자 존은 그녀를 특수 요양원으로 보낸다.

아무 데서나 오줌을 쌀 정도로 정신이 무너진 아이리스는 요양원에 간지 3주 후,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러나 존의 마음속에 영원히 각인된 아이리스의 모습은 젊은 시절, 시대를 앞선 정신과 학문적 탐구열로 가득 찼던 보헤미안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아이리스 머독과 존 베일리



영화는 한 여성의 빛나는 지성을 사랑했던 남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의 정신세계가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느끼는 처절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한 작은 마을에 있는 망각의 강, 즉 '레테의 강'이 나온다.

저승 앞에 흐른다는 그 레테의 강은 건너는 즉시 이승의 추억은 모두 잊어버린다는 곳이다.

그런데 강의 원류에는 '망각의 샘' 말고 '기억의 샘'이 있어 이 두 종류의 물이 합쳐져 흐르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강을 '인생'이라고 부른단다.

그렇다.

인생이란 좋은 추억은 남겨두고 나쁜 기억일랑 덜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프로메테우스 증후군' 없이 서로 지켜주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나의 행복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너무 슬퍼서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불행이라 여기고 내몰았다."라고 말했던 아이리스 머독.

비록 알츠하이머로 인해 덮어 놓은 책이 되었지만 그녀는 충분히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던가 싶다.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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