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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11. 2024

아레초의 댄디 데이즈(Dandy days)

18. 아레초 (Arezzo)






2002년 프랑크푸르트 벼룩시장에서 빈티지 가죽 백팩을 5유로에 샀었다.

그 후 헬싱키, 그단스크, 리스본, 파리 등 셀 수 없이 많은 벼룩시장을 다녀봤다.

아레초는 매월 첫 번째 주말, 이탈리아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골동품 시장이 열리는 곳이다

2013년 1월에, 그리고 이번 2024년 6월, 운 좋게 여행 일정과 맞아 다시 오게 되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 무료 주차장은 만차, 유로 주차장도 무척 넓은데 빈자리가 많지 않다.  

골목과 광장에는 하얀 천막이 무수히 펼쳐져 있고 빈티지 제품을 좋아하는 인근 주민들과 여행자들이 뒤섞여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였다.


광장 한쪽에 소나무숲과 푸른 잔디가 넓게 펼쳐진 일 프라토라는 공원이 있다.

웬일인지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기에 따라가 봤다.

놀랍게도 앙증맞은 빈티지 자동차들이 줄지어 들어오며 잔디 위에 줄지어 세우고 있다.

그러니까 쿠바에서 볼 수 있는 미국식 대형 클래식 카가 아닌 유럽의 빈티지 자동차들이다.

심지어 영화 '로마의 휴일'을 촬영할 때 그레고리 팩과 오드리 햅번이 탔던 스쿠터도 전시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사람들의 옷차림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예사롭지 않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복식을 갖추어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차에서 내렸다.

얼굴보다 더 긴 원통형에 챙이 달린 톱햇, 보라색 블레이저, 레이스로 만든 양산, 영국 왕실 여인들이 쓸법한 납작한 모자 등 일반적인 차림이 아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인지라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마치 그 행사를 취재하러 나온 프레스처럼 과감하게 그들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가족 문제, 학교 문제, 미혼모를 돕기 위한 행사로 모금된 기금은 폭력 피해자 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한 주택 개선에 사용될 것이라고 한다.

이 행사의 이름은 댄디데이즈(Dandydays, 우아한 날들?)로 영국을 본거지로 유럽 및 전 세계에 회원을 갖고 있는 NSC회원들이 중심이다.

이 행사는 다음 날인 일요일까지 패션 쇼, 애견 쇼 등 기금을 모으기 위한 자선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졌다.

그날 우연히 찍었던 사진에 그들의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있었다.

이렇게 뭔지 모르지만 궁금할 때는 일단 찍어두고 나중에 찾아보는 습관이 도움될 때가 많다.





댄디데이즈 포스터




이들 모임은 영국 잡지 'The Chap'에서 시작되었다.

더 챕은 분기별로 발행되는 영국의 유머러스한 남성 라이프스타일을 주제로 한 매거진이다.

이 책은 현대 생활의 저속함에 절망하고 더 우아하고 느긋한 세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이다.

현대의 저속함과 부주의하고 초라하거나 유행에 뒤떨어진 옷차림 감각을 거부하고 20세기 중반(또는 그 이전) 영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습관, 매너, 전통적인 패션 감각을 회복함으로써 보다 신사적인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남성은 전통적인 영국식 정장과 기타 맞춤옷, 특히 트위드로 만든 옷을 입으라고 조언한다.

바지는 깔끔하게 다림질하여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며 고품질의 수제 신발을 깨끗하게 닦고 모자를 일상적으로 착용하라고 조언한다.     

또한 그들만의 10가지 선언문이 있는데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모자를 벗어 예의를 표하고 데님(청바지)을 절대 입지 않고, 콧수염(턱수염은 절대 안 됨)을 기르는 등의 행동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더 챕의 편집자들을 비롯해 이 매거진과 우아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래되고 무너져가는 건물의 위층 방에서 매달 사교 모임이 열기 시작했고 그것을 계기로 만들어진 클럽이 NSC이다.(올해로 8년)









이  클럽의 회원들은 매일 아침 최소 30분은 넥타이 매듭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 바친다.

전기면도기가 아닌 면도날로 면도하고 콧수염을 기르며 지팡이를 좋아한다.

참고로 19세기의 영국을 주도한 남성의 패션은 프록코트, 수염, 모자, 지팡이다.

그들은 대략 빅토리아 시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의 시대 스타일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남자 회원으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여성 회원의 비율이 50%를 차지한다.

그들은 만나서 맥주를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트위드 정장을 감상하고, 태엽을 감는 축음기의 음악을 들으며 관심사를 이야기하며 친목을 다진다.


언뜻 보기에는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성 모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연간 회비는 그리 비싸지 않다.

이 클럽은 런던이 중심이므로 Nelson’s Column에서 50마일 이내에 거주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1년 회비는 17.5파운드.

런던이 아닌  곳의 거주자는 자주 모일 수 없으므로 12.5파운드, 그리고 주로 잡지와 소셜 미디어로 소통을 하는 해외 거주자 회원은 7.5파운드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선 행사로 좋은 일을 이어간다.

19세기말, 20세기초의 유럽 예술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간접적으로 마나 그 행사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그들의 복식에서 느낀 게 있다면 이탈리아 댄디즘은 반드시 빈티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담한 색상의 대비와 현란한 패턴을 사랑하고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석이 박힌 가방, 핀, 브로치, 화려한 스카프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착용한다.

공들여 손질한 수염, 바람에 흩날리는 무성하고 긴 남자의 머리카락, 과감한 디자인의 구두를 찰떡같이 소화하는 모습에서 패션은 역시 자신감에서 완성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레초의 멋진 중세 광장은 도시의 주요 명소 중 하나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에 나온 곳이다.

배경은 2차 대전의 아레초, 귀도 역을 맡은 주연 배우 로베르토 베니니의 연기가 코믹하면서도 절절하다.

유대인 수용소에 갇힌 아내 도라와 아들 조슈아를 탈출시키기 위해 벌어지는 내용인데 볼 때마다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도라 역을 맡은 배우 니콜레타 브라스키는 실제로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내이다.


  







성 베드로와 도나토에게 헌정된 아레초 두오모는 건물 양면을 둘러싸는 넓은 계단 꼭대기에 솟아 있는 광장을 지배하고 있다.

아레초 지방에서 가장 큰 이 인상적인 기독교 건물은 조화로운 고딕 양식의 건축물 안에 진정한 예술 보물과 매우 중요한 신앙 간증을 담고 있다.



아레초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라 피에베 성당과 14세기의 종루




메인 광장에는 각종 골동품을  판매하는 천막과 매대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 대부분의 건물들을 가리고 있다.

아레초는 다른 도시와 달리 건물 벽에 귀족들의 문장을 붙여놓았는데 그 컬러풀한 색감이 훨씬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돌 문장으로 부조해 놓은 회색의 건물이 독특하여 눈에 띈다.

현재는 시립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팔라초 프레토리오(Palazzo Pretorio)이다.

입구에 붙어있는 포스터에 바사리(Gorgio Vasari) 이름이 쓰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사리 사후 450주년 기념으로 5월 4일부터 7월 7일까지 고서를 전시하는 행사였다.

그리고 그 옆의 로지아(loggia, 개방된 지붕 달린 갤러리)의 한쪽 벽에  바사리의 부조가 보였다.


'바사리가 아레초에서 태어났나, 왜 계속 보이지?'






팔라초 프레토리오(현재 시립 도서관)
팔라초 프레토리오(현재 시립 도서관)
도서관 입구의 포스터



바사리 사망 450주년 기념전 포스터
조르지오 바사리




그가 우피치 미술관을 디자인했고 피렌체 대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화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가 아레초에서 태어난 것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광장의 가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아치형 열주가 늘어선 아름다운 로지아와 그 옆 시계탑 또한 바사리가 디자인한 것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레초에는 그의 박물관인 카사 바사리가 있는데 후기 르네상스 예술가의 집 중 보기 드문 예로 바사리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프레스코화와 템페라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16세기의 그림 약 50점이 방 전체에 배열되어 있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알았더라면 가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바사리가 디자인한 시계탑
바사리가 디자인한 로지아 건물
Palazzo delle Logge의 평소 모습(출처 구글)



시장 한편 구석에서 아주 화려한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무슨 행사를 하는 사진을 보았다.

언뜻 보면 시에나의 팔리오 같아 보였다.

그것은 바로 아레초에서 매년 열리는 사라센 마상(Saracen Joust) 경기로 매년 6월 두 번째 토요일과 9월 첫 번째 일요일에 이뤄지는 지역의 전통 행사이다.


중세 시대부터 시작된 기사 토너먼트인 이 경기의 이름은 지오스트라 델 사라치노(Giostra del Saracino).

깃발 던지는 사람들의 공연과 함께 대회가 시작되는데 4개의 지역들이 트로피를 놓고 경쟁한다.

아레초의 지역들을 대표하는 말을 탄 기사들이 사라센 왕의 모습으로 한 나무 인형을 찔러 그 정확도에 따라 높은 점수를 얻은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벼룩시장 한 귀퉁이에 있던 사진






점심을 먹으려고 로지아에 있는 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에센자 다리오 에 안나(Essenza Dario e Anna)는 1964년부터 가업을 이어온 노포였다.

물론 로지아의 통로에도 좌석이 있으나 장이 서 있으니 오가는 사람이 많아 비좁고 안정감이 없어 안으로 들어갔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1573년에 건물을 디자인했으나 이듬해 사망했고 1595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400년이 넘은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다.


70세는 되었을법한 남자는 검정 보타이에 흰 셔츠를 입고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익숙한 말투와 스무스한 몸놀림으로 우리를 맞았다.

전체적으로 노란빛을 띠는 벽에는 희미한 프레스코가 남아있고 군데군데 떨어쟈나간 것을 그대로 둔 게 더 정감이 갔다.

중앙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화려함보다 우아한 앤틱의 장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작 대여섯 개 밖에 안되는 아담한 그곳은 핑크색 테이블보 위에 레스토랑의 이름을 놓아 만냅킨이 놓여있어 정성과 품위가 느껴진다.

벽의 한쪽에는 오래된 무쇠솥과 올리브를 압착하는 도구로 장식했을 뿐 내부는 극히 심플하다.


앙증맞은 뚜껑의 하얀 올리브 오일 그릇과 세 종류의 식전빵 맛은 이미 그곳의 음식이 훌륭할  거라는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카프레제와 시저 샐러드, 트러플 파스타와 라구 파스타, 그리고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셰프가 흐뭇하리만큼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레스토랑 에센자 다리오 에 안나(Essenza Dario e Anna) 앞 노점상





열 손가락 모두 반지를 가득 채우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인 MH는 매의 눈으로 찾고 있었다.

맘에 드는 게 있었지만 300유로를 호가하는 반지는 패스하고 작은 원석이 달린 실버 이어링과 팔찌를 구입했고 B와 SH는 선글라스를, SY는 팔찌를 샀다. 


딱히 뭘 반드시 사겠다는 의지는 없었지만 나 역시 작은 진주와 길쭉한 모양의 실버 체인으로 만들어진 앤티크 한 목걸이를 구입했다.

목걸이지만 팔찌로 사용하려는 의도이다.

그날 내 손목에 채워진 팔찌 역시 실버 목걸이지만 세 번 감아서 팔찌로 착용했다.

진주 목걸이는 네 번 감으니 적당했다.

그렇게 두 개의 실버 목걸이가 레이어드 되어 손목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두 개가 세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잘 어울려 만족했다.
















100년 전 아레초 광장의 시장




'여기서 피렌체 더 몰(The Mall, 피렌체 인근의 명품 아웃렛으로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다)이 멀지 않은 데 가볼까?

사실 나도 가보지 않았다.

명품을 좋아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비싸다는 것이겠지만 그것들을 입거나 들고 다닐 일이 없어서이다.

모두들 같은 마음이지만 가보자는 의견이 모아져서 그곳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꽤 큰 부지에 각각의 브랜드들이 단일 매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차장에서 가장 맨 먼저 보이는 구찌에는 약 30여 명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일단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고 몇 군데를 구경하다가 셀린에 들어갔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쓱 하니 둘러보는데 한 직원이 내게 영어 하느냐고 물었다.

명품 매장 직원답게 모델핏의 늘씬한 청년이었다.

조금 한다고 대답하니 그가 말했다.


'당신 스타일이 참 멋져요.'

'정말 고마워요.'


피렌체에서 구입한 리넨 셋업은 안전벨트로 인해 이미 많이 구겨져 있었다.

베이지색 폴로 버킷햇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브라운 컬러의 워커를 신고 있는 내 모습이 멋지단다.

'진짜?'라는 촌스러운 질문은 하지 않았다.

손님을 기분 좋게 하는 멘트는 판매자들의 기본임을 알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구입하고 싶은 제품은 없었다.

자매들은 쇼핑을 더 하기로 하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앤틱 진주 목걸이, 아니 팔찌가 내겐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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