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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Aug 02. 2024

1시간 기다리고 2분 전에 뛴 사연

29. ovest






오후 1시에 바리를 출발해서 5시 15분 로마 테르미니에 도착 예정인 9952 열차는 1번 플랫폼이라는 안내가 전광판에 일찌감치 떴다.

바리가 시발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랫폼 넘버 옆에 오베스트(ovest)라는 글씨가 있어서 검색을 했더니 '들쭉날쭉한'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그렇다면 플랫폼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인가?

아직 1시간이나 남았으니 수시로 체크하면 되겠지 싶었다.


시발역인 경우 보통 20~30분 전부터 탑승을 시작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기차가 오지 않는다.

4분 전 드디어 기차가 들어왔으나 그것은 레체로 가는 것이었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플랫폼 안쪽으로 들어가 전광판을 확인하니 여전히 '1 ovest'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남자가 보였다.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통은 그런 경우 그 사람이 몰두하고 있는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아 물어보지만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라 그런 걸 따질 틈이 없었다.

그곳은 그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례합니다. 나는 로마로 가는 1시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여기서 탑승하는 게 아닌가요?'

앞에 보이는 전광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는 전광판을 보더니

'저기 첫번 째 줄에 있는 기차를 타려고 하는 거죠?'

'네, 맞아요.'

'저 기차는 여기가 아니고 다른 쪽이에요. 플랫폼을 쭉 따라가면 오른쪽에 다른 선로가  또 하나 있는데 거기서 타야 합니다.'


아마도 그 순간 내 낯빛은 하얗게 변했을 거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지 기억이 없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약 2분쯤 남았을까?


'여기가 아니래, 빨리 저쪽으로 가야 해.'


라는 말을 짧게 던진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물론 23kg 캐리어와 기내 캐리어 두 개를 밀면서 말이다.

일행들이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다.

오직 빨리 가서 기차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뿐이다.

저 멀리 빨간색 이탈로(Italo)가 보였다.

이미 승차를 마친 플랫폼에는 단 한 명의 승객도 없었다.

유니폼을 입은 남녀 승무원 두 명만이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뒤에 따라오던 SY가 가까운 칸으로 일단 타자는 말이 들렸지만 4호차를 향해 열심히 달렸다.

유럽의 기차는 통로가 좁아서 캐리어를 끌고 객차내에서 이동하는 건 무척 힘이 든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무원이 우리를 본 이상 기차를 출발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우리 모두 4호차에 탑승하자 기차가 출발했다.

다행히 좌석은 출입문 근처였고 캐리어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도 넉넉했다.


정리를 하고 의자에 앉으니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물도 잘 넘어가질 않는다.

남은 쌀로 만들어온 주먹밥과 김밥은 당연히 먹을 수가 없었다.

아침 식사를 한 지 4시간이 넘었는데 갑자기 체기가 느껴져 소화제를 먹었다.


로마나 피렌체역 플랫폼에서 간혹 est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다.

그곳은 본 역과는 좀 많이 동떨어진 곳에 있었고 나는 그것이 당연히 영어의 동쪽을 가리키는 est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ovest를 영어로 검색했고 '들쭉날쭉한'이라는 해석을 찾음으로 혼란을 겪은 것이다.

문제의 ovest는 이탈리아어로 '서쪽'이라는 뜻이며 이탈리아어 est는 영어와 똑같은 '동쪽'이라는 뜻이었다.


미리 물어보고 확인을 했어야 했다.

매사에 꼼꼼하게 계획하고 여러 번 확인하는 성격인데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책임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다.

무사히 기차를 타기는 했지만 동행한 친구들과 BB를 힘들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스스로를 괴롭혔다.

BB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틀렸어'라는 생각을 하며 겨우 쫓아오셨다며 우스갯 소리를 하셨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기차가 연착할 예정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테르미니역에서 공항까지 타고 갈 택시회사는 사정이 있을 경우 미리 연락을 해달라고 했기에 메시지를 보냈다.

택시 기사는 마셀라 거리로 나가는 출구 쪽, 약국 앞에서 내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있을 거라 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이며 차량 번호는 벤츠 GR959BD라는 답이 왔다.

약국 앞으로 갔지만 알렉산드로를 찾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차를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헤매다 기사와 만났다.

우리가 약국 앞에서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오고 한참 후에야 기사가 도착한 것이다.

기차가 연착한 데다가 기사를 만나기까지 시간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3시간이나 딜레이 되어 큰 문제는 없었다.



로마공항에서 항공 지연으로 인한 불편함에 대한 보상으로 1인당 15유로짜리 바우처를 받았다.

단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음식점은 단 두 곳으로 지정되어 있다.

자매들에게 주문을 부탁했다.

그곳은 거의 난장판으로 붐비고 있었다.

게다가 음식은 주문한 대로 나오지도 않았고 금액의 오류가 있어 똑똑한 자매들은 영수증을 들고 가서 몇 번을 따진 후에 컵 과일 몇 개를 추가로 얻어냈다.  


삶은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불분명하여 확신이 없기도 하다.

때때로 길을 잃기도 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대한항공을 이용할 때면 특별식 중 해산물식을 신청하곤 한다.

연어구이나 흰살 생선, 새우 등이 신선하고 위에 부담이 덜해서이다.

다른 승객보다 먼저 서빙해 주는 이점도 있다.


'음료는 뭐로 하시겠어요?'

'위스키 더블로 부탁해요. 가능하면 많이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상냥한 승무원은 거의 반 컵의 위스키를 가져다 주었다.


그후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없다.

깨어나보니 무려 7시간이 지났다.

다시 일상으로의 여행이 시작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살아 볼 궁리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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