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게리타 피자와 오레키에테
28. 바리(Bari)
여행자들이 이곳을 오는 이유는 사실 바리를 구경하기보다는 아드리아 해 건너편의 발칸으로 넘어갈 수 있는 항구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페리를 타면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몬테네그로의 바르, 알바니아의 두러스, 그리스 파트라스 항 등으로 갈 수 있다.
사실 이 여행은 트리에스테를 시작으로 몬테네그로의 코토르와 부드바를 거쳐 바르(Bar)에서 페리를 타고 바리로 건너가 풀리아 지방을 여행한 후 토스카나에서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트리에스테에서 픽업하여 몬테네그로의 바르에서 반납할 수 있는 렌터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일정을 변경한 것이다.
풀리아의 주도인 바리는 인근 지역을 여행하기 위한 베이스 캠프지만 이곳에도 베키아(vecchia)라고 불리는 구시가지가 있다.
기차역 부근의 숙소에서 올드 타운이 있는 베키아까지는 도보로 약 1.5km, 해변 도로까지는 약 10분이면 충분하다.
아기자기하고 가슴 떨리는 아름다운 골목을 볼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한 가지 궁금한 건 있었다.
구시가지로 향해 숙소를 나섰다.
여행 중 음악회를 자주 다니는 필자는 극장(오페라나 클래식 콘서트 공연장)에 관심이 많다.
바리에도 제법 큰 오페라 하우스, 페트루첼리 극장(Teatro Petruzzelli)이 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 나폴리의 테아트로 산 카를로(Teatro San Carlo)와 시칠리 팔레르모에 있는 마시모 극장(Teatro Massimo)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네 번째로 큰 오페라 하우스이다.
원래 19세기 중반에 지어졌지만 1991년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공연 후에 발생한 화재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어 2009년에 재개관했다.
붉은색의 화려한 컬러가 언뜻 봐도 관공서 느낌이 아니라 바로 알아보았다.
피트루첼리 극장과 멀지 않은 곳에 마르게리타 극장(Margherita Theatre)이 있다.
이 극장은 바다에 기둥을 세우고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바리 최초의 건물이다.
'마르게리타'하면 연상되는 피자!
왜 피자 이름에 여왕의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다.
1889년, 움베르토 1세와 마르게리타 여왕은 남부 왕국의 수도였던 나폴리를 방문했다.
당시 유럽 왕족에게 매우 인기 있었던 고급 프랑스 음식에 지루함을 느꼈던 마르게리타 여왕은 당시 나폴리에서 가장 유명한 피자 장인 라파엘레 에스포지토를 불러 맛이 다른 세 가지 피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에스피에토는 고심 끝에 세 가지 피자를 만들었는데 오레가노와 마늘을 넣은 피자(현재의 마리나라 피자)와 앤초비를 넣은 (나폴리타나) 피자는 여왕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모차렐라 치즈와 토마토, 바질잎이 들어간 피자는 다행히 여왕의 입맛에 맞았다.
그에 에스포지토는 그 피자에 여왕의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간청했고 승인하였다고 한다.
당시 에스포지토가 일하던 나폴리의 피자집 피제리아 브란디(pizzeria brandi)는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으며 벽에는 그 이름이 붙여진 지 100년을 기념(1999년)하는 명패가 붙어있다.
마르게리타는 이탈리아어로 '데이지'라는 뜻이다.
피자의 도우 위에 그린(바질잎), 화이트(모차렐라 치즈), 레드(토마토)의 3색(이탈리아 국기의 3색)을 데이지 꽃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하여 마르게리타라고 불린다는 말도 있다.
이름이야 어떻든 나의 최애는 마르게리타 피자이다.
그 이유는 기본에 충실한 음식의 실패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시청. 은행 등 큰 건물들이 있는 대로를 지나 야자수가 늘어선 길 옆의 골목으로 들어서니 상점을 오픈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외국에 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태극기를 보면 반갑다.
심지어 예뻐 보인다.
이곳 바리의 구시가지에서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성당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표인 산 니콜라 성당(Basilica di San Nicola)은 12세기말에 지어졌으며 전 세계에서 매년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광장에 산 니콜라 동상이 서 있고 유난히도 많은 제비 떼가 날렵한 날개를 펼치며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성가가 들려오는 쪽으로 따라가니 지하 예배당에서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특이하게도 창살로 가로막힌 안쪽에 제대가 있었는데 처음 보는 모습이라 낯설었다.
출입구가 뒤편이 아니라 옆으로 있어서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바로 나왔다.
이탈리아의 파스타면의 종류는 약 350가지가 있는데 면의 생김새에 따라 크게 4가지로 나눈다.
풀리아 지방의 원조는 뭐니 뭐니 해도 오레키에테(Orecchiette)이다.
오레키에테는 '작은 귀'라는 뜻의 파스타로 알베로벨로에서 먹었었다.
아주 작은 그릇처럼 오목하게 패인 공간에 맛있는 소스가 쏙 들어가 맛있는 파스타를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재료가 단순하기 때문에 만드는 비용도 저렴하고 원팬으로 조리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어 인기가 있다고 한다.
그 수제 파스타를 길거리에서 만드는 곳이 그곳에 있다.
내가 바리의 구시가지에서 보고 싶었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엘레나, 이사벨라, 카밀라, 소피아...
50대 아주머니부터 70대 할머니들이 길거리 나무 테이블 앞에 앉아 두런두런 이갸기를 나누며 숙련된 손길로 파스타를 만들고 있다.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그들 역시 장인이구나 싶다.
각각의 모습이 마치 '우리 집이 원조', 하는 손칼국수집을 연상시킨다.
호스트 피나가 사다 주었던 풀리아의 전통 간식 수제 타랄리(taralli)를 만드는 모습도 보였다.
오레키에테 반죽의 기본은 세몰리나(semolina) 가루인데 듀럼(Durum wheat)이라는 밀로 만들어진 거친 질감의 가루로 병아리색이다.
이것은 파스타의 쫄깃한 식감을 만들어내므로 일반적인 다용도 밀가루와는 차이가 있다.
세몰리나 가루에 실온의 물을 섞어 반죽한 후 긴 밧줄 모양으로 만든 다음 나이프로 잘게 자른 후 엄지 손가락으로 오목한 모양을 내면 된다.
소스는 주로 브로콜리나 바질, 토마토소스를 이용하지만 다른 재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방금 만든 쫄깃한 수제 파스타를 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식재료들이 있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만 일찍 왔으면 맛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가로등이 보이는 아치문으로 나가면 룽고마레(Lungomare)라는 해안 산책로를 만난다.
이 산책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산책로 중 하나로 시내 중심가로 이어진다.
햇빛을 받은 윤슬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구나 싶다.
그날 점심은 해안가의 시푸드 레스토랑 라 바티야(la battigia)에서 모처럼 다섯 명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물망에 올랐던 두 곳의 다른 레스토랑은 월요일이 휴무라 선택한 곳이다.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갔더니 아직 손님이 없었는데 테이블은 바로 만석이 되었다.
모노톤의 현대식 인테리어는 그곳이 이탈리아가 아닌 뉴욕 한복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번 여행에서 최고가의 비용을 지불했지만 서비스와 음식은 꽤 만족했다.
후식은 평점 4.8의 젤라테리아, 실내 좌석임에도 불구하고 자릿세를 받았지만 역시 맛있었다.
근처에는 바리 최대의 쇼핑가인 비아 스파라노 다 바리(Via Sparano da Bari)에는 프라다 같은 명품 샵과 화려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물인 고급 백화점 민쿠치(Palazzo Mincuzzi)가 있다.
그날 저녁, 대한항공에서 항공 시간 딜레이에 대한 메시지를 받았다.
지연 사유는 공항 사정에 의한 항공기 연결.
원래 로마 피우미치우 공항의 이륙시간은 오후 9시 25분이었는데 오후 11시 50분으로 변경되었다는 내용이다.
바리에서 로마까지 가는 기차는 오후 1시 출발, 5시 15분 도착이니 공항에서 무려 대 여섯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비행기를 타기까지 또 한 번의 긴 여정이 쉽지 않겠구나 싶다.
다음 날, 나와 BB의 숙소 체크아웃은 11시, 자매들 숙소는 10시다.
호스트들에게 기차 시간을 알려주며 레이트 체크 아웃을 부탁하였다.
두 곳 모두 당일 체크인할 손님이 있지만 청소를 빠르게 할 테니 그렇게 하라는 답을 받았다.
그러므로 각각의 체크 아웃은 11시, 12시로 한 시간을 얻게 되었다.
호스트는 첫날, 청소가 제대로 안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쓰레기는 그냥 놔두라고 했다.
하지만 1주일 동안 분리해 놓은 생수 병을 비롯한 재활용 물품과 일반 쓰레기가 꽤 많았다.
완벽하게 정리를 했지만 쓰레기가 남아있는 게 영 찝찝했다.
숙소에서 약 100m 떨어진 도로 건너편의 분리수거 탱크를 찾았다.
BB와 둘이서 양손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쓰레기를 낑낑대며 들고 나섰다.
버리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개운하다.
항공권 스마트 체크인도 했고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공항까지 9인승 밴을 예약해 두었으니 내일 떠날 일만 남았다.
아프거나 다치지 않고, 잃어버린 것 없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여행이다.
낯선 나라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변함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넓고 둥글어졌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