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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Aug 04. 2024

 여행이라는 '시'

30. Epilogue

  







삶은 여행입니다.

그러니 이런 의문은 필요 없을지도 몰라요.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서 돌아오는 걸까?

큰 숨 몰아쉬며 연신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내다봅니다.

각각의 사연과 이야기를 갖고 떠나고 돌아오는 공항은 늘 설레게 합니다.

머지않아 다시 저 하늘에 떠 있을 테지요.


전 세계를 기준으로 매일 약 10만 편의 항공편이 이륙하고 착륙합니다.

그중 90,000편의 여객기는 수백만 명의 승객을 데려다 주어요.

전 세계 인구의 약 0.1%인 600만 명이 매일 어딘가를 향해 비행하죠.

그런데 일생동안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사람은 80퍼센트가 넘는다고 합니다.

비행기를 타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비율은 가족 및 친지 방문, 그리고 여행입니다.

비행기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장거리를 편리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의 일상은 하루도 같지 않지만 거의 비슷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큰 이유는 그 현실에서 벗어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삶의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일종의 약이니까요.








2016년 5월 1일, 필자는 브런치에 '아드리아, 그 기억의 기억을 클릭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첫 글이지요.

그 글을 브런치와 론리 플래닛이 콜라보한 작품 공모전에 응모했습니다.

호기롭게도 1등 상품인 유럽 왕복 항공권을 목표로 했지요.

뜻하지 않게 2등 상을 받았습니다.

운이 좋았던 것이죠.  

그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브런치와 함께 하여 303개의 글을 게재했는데요.

13개의 매거진 중 프롬나드는 2016년 ~ 2017년에 여행한 기록들입니다.

<여행이라는 '시'>라는 제목보다는 '여행 서사' 라는 게 더 적절한 대목들을 모았습니다.

흔적을 되짚어본 시간도 나쁘지 않네요.


 







막힘없이 터진 하늘, 돌에 새겨진 천 년의 세월과 이야기, 반들반들한 대리석 길바닥,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푸는 일이다.

낯선 곳이건만 낯설 겨를도 없이, 흘린 생각을 주워 담을 틈도 없이 시간은 익숙하게 지나갔다.

필름처럼 돌아가는 사람들, 수만의 웃음이 피어나고 수천의 눈물이 흘러갔을 광장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바람을 리듬 삼아 춤을 추는 갈매기를 바라보는 일이면 충분했다.

바람에 밀려가듯 그 시간을 놓아주고 싶었다.

가슴이 서늘했다.

자다르의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햇살이 바늘처럼 피부에 박혔다.

아무렇게나 그린 듯한 담벼락의 그라피티, 낡고 바란 나무 간판, 바다를 향해 길게 팔을 뻗은 꽃,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린 청포도, 헐렁하게 늘어진 셔츠를 입고 한 없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할아버지, 꾸미려 하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어울리는 풍경이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하늘과 바다 사이로 금빛 태양이 세상을 끌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평화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충혈된 태양은 오렌지 빛 지붕을 헌신하듯 낱낱이 물들였다.

싱싱한 노을 속에 우리가 익어가고 있었다.

해는 낡은 구름 속으로 점점 가라앉고 내 마음은 해보다 먼저 금빛 바다에 빠졌다.

그렇게 한동안 바다 밑바닥까지 빛의 노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 현재와 미래의 경계, 그 경계에 여물지 않은 달이 하늘을 타고 내려가는 게 보였다.

가끔씩 외로움이 장대비처럼 쏟아질 때면 소리가 사라지고 시간이 멈춰버린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기억이 바람에 묻어오지 않아도 내 곁엔 너무 많은 소리들이 보였다.

그럴 때면 바다에 빠지는 해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건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다.

자신과의 타협이다.

내가 가고자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게 여행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잊었던 나를 종종 찾게 된다.

다 보려고 하지 말고 남겨두어야 한다.

아쉬워하고 그리워야 다시 찾아갈 수 있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변할 때쯤 대부분 그곳을 떠나게 된다.

그게 여행이다.

기억을 되돌릴 수는 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지금은 과거가 될 거다.

언젠가 그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현재의 밑그림 같은 풍경이 행복하다.

온몸을 파고들던 햇빛과 푸른 물빛의 아드리아, 그 기억의 기억을 그리워할 것이다.  







여행은 지울 수 없는 시간이며 다시 쓸 수 있는 꿈입니다.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새처럼 마음의 뼈를 비우면서 시작합니다.

여행은 늘 날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행은 늘 새것으로 다가옵니다.

처음의 것들과 만나는 동안 마음의 빗금들은 희미하게 사라지기도 합니다.

꽃 같은 위로가 바람처럼 지나가지요.

그러면 된 겁니다.

여행은 그런 거죠.


글이 잘 써지는 날이면 글 속에 살고 싶고

술에 취하면 그 속에 죽어도 좋겠다 싶다가

음악에 젖으면 그래도 살아있는 게 행복이지 하다가

책에 빠지면 다른 책이 궁금해서 마음이 급하고

비가 내리면 그 속에서 미치고 싶고

영화 보면 시 쓰고 싶고

여행을 떠나면 행복하고

사진 속에 갇힌 시간을 꺼내 여행기를 쓰며 모두가 하나 되는 시간,

행복 합집합!







비는 내리지 않고 다만 깊은 청색 하늘 아래 구름이 무거운 듯 매달려있다.

푸른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나목들이   

구름 속에 빠진 듯,

바다에 서 있듯,

촘촘한 안개 그물 속에 행복한 감금이다.  


보도블록 사이에 둥지를 튼 이끼,

늘어진 전선의 자유로운 휨,

각이 다른 지붕의 각들,


같은 비에 어떤 꽃은 피고 또 어떤 꽃은 진다.

 “꽃이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하는 최영미의 시처럼 지는 꽃에의 아쉬움은 우리네 삶과 닮았다.







낡은 벽을 보면 가슴이 뛴다.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거나 색이 바랬을수록 더 그렇다.

누가 이런 색을 칠해 놓았을까?

멀리든 가까이든 벽은 수시로 내게 말을 건다.

손짓하듯 나를 잡아 끈다.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면 기분이 좋다.

골목을 찾아다니는 이유 중에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건 벽 때문일 것이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비를 맞고 태양을 견디며 우두커니 집을 받치고 있는 벽은 시간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다.

누구에겐 보이지도 않을, 누구에게는 관심도 받지 않을 벽에 나는 마음이 따라간다.

조금 더 왼쪽으로, 아니 오른쪽은 어떨까?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는다.

카우나스, 그곳에도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벽이 있었다.

벽과 문, 그리고 창은 내 여행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흐린 하늘 아래로 길쭉길쭉한 침엽수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세월의 더께를 입은 양, 나무 둥치의 아래쪽으로 갈수록 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그라피티로 치장한 벽돌담들이 간간이 지나갔다.

가는가 하면 서고, 서는가 하면 출발했다.


이름 모르는 시골길을 하릴없이 걷다 보면 하얀 레이스 커튼 사이로 꽃이 핀 화분이 놓여있는 낡은 창이 보일 거다.

리넨 식탁 매트 위에 투박한 빵과 따뜻한 스튜가 따뜻함을 전해줄 시골집, 그런 곳에서 한두 달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언젠가 목적지 없는 기차 여행을 하고 싶다.

여기가 좋겠어하면 내려서, 두어 시간 걷다가 빵 하나, 과일 한쪽 먹고 또 기차를 타는 거다.

인자한 표정의 할머니들이 길가에 나란히 앉아서 햇빛을 쬐고 있는 풍경을 지나 허름한 카페에서 얼 그레이나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 싶다.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이거나 해가 지는 쪽이어도 좋으리라.

머지않아 그런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맑다’

청명한 날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첫인상은 맑음이었다.

‘깨끗하다’

여긴 보도블록도 손 걸레질 하나? 할 정도로 깨끗했다.

‘단아하다’

거창한 건 없다. 오래된 집 몇 채가 단정하게 앉아있었다.

‘고요하다’

텅 비지 않았는데 고요했다. 공기에서 조차 고요라는 맛이 느껴졌다.

아니다.

이 정도로는 모자라다.

뭐라 해야 할까?

평화로운~ 이라든가, 그림 같은~ 이라든가 그런 표현은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

말이 필요 없다.

그냥, ‘작은 파라다이스’     







간혹 이런 질문을 듣는다.

어떻게 해야 여행을 잘할 수 있느냐고….

공부 잘하는 사람, 연애 잘하는 사람, 여행 잘하는 사람….

과연 그 ‘잘’ 하는 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

‘잘’이라는 말은 어렵다.

공부 잘하는 법?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잘'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그냥 좋아할 뿐이다.

‘잘’이라는 것은 스스로 좋은 쪽으로 가면 되는 게 아닐까?


여행을 하는 순간에도 여행이 고프다.

여행에 대한 허기가 채워지질 않는다.

아마도 제한된 시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다시 아침이다.

며칠의 아침이 남았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떼어 놓는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한동안 낯설다.

그럴 때는 사진을 본다.

그 속의 공기가 느껴진다.


낡음이어서 아름다웠던 골목의 색깔들,  

날짜가 아닌 어떤 시점으로 남아있는 지나감.

거기 새겨진 감정의 기억은 오직 자신의 것이다.

여행은 단순할수록 아름답다.


여행은 어떤 이유나 의미를 찾지 않을 때 빛난다.

그냥 걷고,

하늘을 바라보고,

따뜻한 커피와 빵 한 조각의 사소함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오직 그것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행이 좋은 이유, 비어있음이다.

내 마음의 곳간을 채우는 순간이요, 마음속에 괄호 하나 만드는 시간이다.      







여행은 계절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끝난 것 같지만 다시 시작되고 다시 돌아옴이 그렇다.

굳이 어디가 예쁜 가를 찾을 필요가 없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한숨이 나오게 예쁜 컬러와 무늬, 집의 모양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그런 마을이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최고의 카메라도 우리의 눈으로 보는 그 이상을 담아낼 수는 없다.

오감이 주는 기쁨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래도 으뜸은 보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었다.      


살구 색 벽에 청회색 갤러리 나무 덧창, 연두색 벽에 노란 격자무늬 창, 노란 벽에 하얀 창문, 붉은 벽에 하얀 창, 딸기 초코, 민트 초코, 피스타치오, 레몬, 바닐라 등 세상의 어떤 어둠이나 슬픔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색들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고요한 평화만 자라는 곳이 그곳일 것만 같았다.

비늘처럼 지붕을 덮고 있는 자잘한 기와의 크기와 빛깔도 모두 다르다.

거칠거나 투박해진 나무 창틀에 놓인 작은 초 몇 개, 초록색 병에 담긴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식초병이 나란히 놓인 주방 창턱, 낡은 꽃 리스를 걸어놓은 문, 화려함과 고급스러움 없이 열심히 가꾸고 다듬은 흔적이 아름다웠다.      







책 보는 남자,

컴퓨터 작업을 하는 아가씨,

뜨개질을 하는 아주머니,

빨간 색실만으로 십자수를 놓고 있는 여인,

숫자 맞추기를 하는 할머니,

따뜻하고 평온한 정경이다.


크리스털 같은 햇살이 니스와 칸의 푸른 바다 위로 쏟아졌다.

니스에 오던 날과 떠나는 날 모두 그때 여행 중 가장 밝은 날이었다.

가을걷이를 마친 듯 누런 들판이 펼쳐졌다.

야트막한 언덕이 간간이 지나갔다.

노르망디에서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고 슴슴한 풍경이 지나갔다.

힘든 여행 일정 중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일종의 휴식이다.

마음이 여유롭고 너그러워지며 평화롭다.      

그 분위기를 즐기는 시간이 좋다.

기차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리옹으로 향하는 기차의 승객들은 음 소거 상태처럼 조용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거야.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것인지도 모르는 거야.


사람들 속에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야.


오늘이라는 하루는 또 무슨 색깔로 펼쳐질까?


밀가루 같은 눈발이 날리다가 제네바를 지날 때쯤 해가 반짝했다.

그리고 다시 눈이 내리고 해가 뜨고 눈과 해는 숨바꼭질하듯 론도풍으로 연주를 했다.

초록의 들판과 산이 보였다.

먼 산에 흰 눈이 보였다.

굳이 여기가 어디라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풍경이 차창으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1969년 가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을 등으로 밀어내면서 나는 지중해를 향하여 떠났다.

내 청춘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늙지 않고 잠겨 있는 곳이 될 이 소도시에 나는 이처럼 수줍고 말없이 도착하였다.

병풍 그림이나 외국의 원색판 사진첩이나 화집 같은 곳에 그려진 행복한 풍경 속으로 나 자신도 모르게 들어오게 된 틈입자만 같아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수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나는, 그때의 얄궂은 저항감이나 불안정감은 아마도 내가 최초로 받은 '행복의 충격'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지중해 사람들은 약속하지 않는다. 과거의 추억을 반추하지 않는다. 지중해 사람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지중해는 사람들이 만나는 땅이다.’

(김화영, 행복의 충격 중)



여행은 사소함에 감동한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게 여행이다.

낯 선 감정을 둥글리는 게 여행이다.

초라한 여행은 없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과잉 긍정 주의보가 내린다.

힘들어도 즐거운 게 여행이다.

음식이 조금 짜도 차창 한 번 바라보면 금세 잊어버리고 달콤함만 남는다.

여행은 또 다른 삶을 살아보는 일이다.

꿈꾸듯 다른 생을 사는 시간이다.

여행은 예행연습이 없다.

다가오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걸어가야 한다.

미흡했다.

그런데 그 미흡이라는 단어가 맘에 든다.

완벽이란 얼마나 숨 막히는 단어인가?

완벽하다는 건 틈이 없는 것, 틈이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

비어있어야 편하다.

미흡이란 단어가 내 모습을 닮아서 좋다.

유레일 4,507킬로미터의 끄적임(반 고흐에서 샤갈까지)의 사진과 글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줄곧 그곳에 있었다.

미흡하나마 마칠 수 있음이 기쁘다.







'훌쩍 떠났습니다'

라고 하면 이런 생각이 들겠죠?

남아도는 시간과 돈과 여유의 삼박자가 철철 넘치는 사람?


'훌쩍'의 답은 싶음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싶음을 싶음으로 놔두지 않습니다.

나와의 타협을 마치면 떠나는 거죠.


오늘은 언제나 단 한 번뿐,

오늘의 싶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훌쩍

떠났습니다.


왠지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스칸디나비아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푸르름이 느껴집니다.

그리그의 음악과 뭉크의 그림 같은 차가움,

아바와 말괄량이 삐삐, 입센과 안데르센의 온화함,

노벨의 너른 사랑과 배포,

심플하고 미니멀한 가구와 주택이 주는 여백의 미,

그리고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노르웨이 피오르드,  

스칸디나비아는 오래도록 아껴두었고 두고두고 그리워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훌쩍 떠났어요'

라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스칸디나비아에 스미던 시간을 되짚는 이 끄적임이 행복할 것을 믿습니다.








스톡홀름에서는 메트로에서 내릴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곳의 메트로 플랫폼은 플랫폼이 아니라 미술관이요, 거대한 설치 예술 작품입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미지의 세계에 도착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각진 천장은 없었습니다.

동굴처럼 아치 모양에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자연미를 살린 마감 방법을 택했어요.

그 무심한 듯 세련된 색깔에 느낌표 달린 감탄사가 연이어 나옵니다.

광고로 도배를 해놓은 우리나라와는 너무 상반된 분위기였죠.

스톡홀름은 총길이 108km의 100개 역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 66개의 역에 모두 장식 미술로 치장을 해놓았어요.

메트로만 이리저리 타고 다녀도 훌륭한 아트 투어가 될 것 같아요.

실제로 메트로 투어가 있다고 하더군요.







고운 색을 여미던 하루가 또 지나갑니다.

내일은 또 무엇에 젖게 될까요?

사진 속의 책처럼 읽지 않고 그저 바라만 봐도 행복한 시간들이 일렁입니다.


태양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지글거리고, 우리는 바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녁이 오기까지 쉬기로 했지요.

갑자기 소나기가 내립니다.

열어둔 창을 통해 빗소리가 들려왔죠.

벽에 걸린 뭉크 그림을 보다가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심심함도 좋을 넉넉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마음이 더없이 푸근했습니다.







산그늘이 점점 늘어 가는데 불이 켜진 듯 가운데만 환한 곳이 보였어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물 건너 저편 나무 테이블에 노부부가 앉아있습니다.

두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몇 살인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무 상관이 없었지요.

그들이 그대로 풍경이었습니다.  

마치 만 년 전 빙하가 깎아 만든 계곡에 바닷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신의 조각품인 피요르드 옆으로 우뚝 솟은 산처럼 그들도 그 옛날부터 그곳에 있어온 듯 풍경처럼 아득하고 자연스레 앉아있었습니다.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더군요.

플롬~

입에서 상큼한 풀 냄새가 나면서 고소하게 느껴지는 마을입니다.  (노르웨이, 플롬)     








비행기 창으로 볕뉘가 수줍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고도가 낮아지고 있어요.

마치 자동차가 계단을 내려가듯 툭툭~

구름층을 내려갑니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지만 햇살의 온기는 같아요.       


얼마나 잤는지 모릅니다.

눈을 떴을 때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열심히 붓질을 하더군요.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어요.

아무리 많이 걸어도 자고 나면 거뜬한 걸 보면 아마도 몸은 기분이 지배하는 것 같아요.

오늘이 며칠이지?

여행을 하면 요일은 물론 날짜도 잊어버려요.

여행의 매력은 삶의 여러 가지를 툭! 끊고,

오직 나를 위해 지낼 수 있는 시간,

오롯이 내가 원하는 대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들어감,

틀에서 벗어나 무한대로 틈을 늘일 수 있는 자유,

바로 그것입니다.


폴 발레리가 말했어요.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에 생겨나는 틈이다.’     

8월이네요.







사진은 기록이라는 의미보다 찍고 싶어서 찍었다는 게 맞을 거예요.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보면 맘에 드는 건 늘 사람이었어요.

편안하고 깨끗하고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가진 사람,

아이든, 걸인이든, 노인이든 관계없이요.

사실 사람 없는 도서관, 오페라 하우스가 무슨 의미겠어요.

사람이 주인공이고 사람만큼 예쁜 꽃은 없지요.   

  

돛을 감아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그 줄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박 중인 보트는 모두 돛을 내리고 쉼의 시간을 즐기고 있어요.

항해할 때는 늘 돛에 가려졌던 줄들이 뼈를 드러내고 일광욕을 하네요.

연필화처럼 매력적이에요.


주택들이 몰려있는 좁은 수로로 들어서니 개인용 작은 보트들이 가지런히 정박되어 있어요.

소득이 높은 나라이니 가정용 요트들을 많이들 즐기나 봐요.

테이블에 나와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모처럼 찾아온 친구와 맥주를 나누는 젊은이들,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전하는 아저씨,

카약을 타는 사람들,

선글라스를 낀 여자 아이가 작은 보트에서 뭔가를 정리하는 모습이 보여요.

마치 자기 방을 치우듯이 능숙해요.

그러니 성인이 되어서도 자연스레 그런 생활 패턴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죠. (코펜하겐)




    



슬픔도 아름다움의 한 갈래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워서 슬프다는 말도 이해될까요?

아름다워서 슬픔을 느꼈던 곳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안다’라는 게 뭘까요?

다분히 주관적인 명제이기 때문에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한 미술관,

그 외의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곳에 갔습니다.     

어제 헬싱게르에 갈 때 탔던 기차를 타고 흄레백 역에서 내렸어요.

소도시라고도 할 수 없는 그냥 작은 마을,

기차역은 오래된 건물답게 붉은 벽돌에 하얀 아치형 창문을 갖고 있어요.

싱싱한 초록의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오르고 빨간 우체통이 문 앞에 있네요.

공공건물 같은 집과 주차된 자동차 몇 대, 그리고 나이 든 나무들, 동네가 참 소박하고 조용해요.   

잔디는 방금 이발소에 다녀온 소년처럼 언제 어디서든 말끔한 자태를 뽐내곤 합니다.

유일하게 눈에 띈 상점이 꽃집,

동네 풍경이 짐작되시죠?

먹거리보다 꽃이 더 중요한 사람들,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예쁜 집 가꾸는 걸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해석했어요.     



부피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골격만 앙상한 다섯의 사람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어요.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자코메티의 작품이 거기 있습니다.

병풍 같은 일곱 쪽의 유리창 너머로 바람을 타고 흔들거리는 버드나무의 부드러운 가지가 호수에 어른어른 비쳐요.

그게 바로 선경(仙境)이 아닐까 합니다.

자코메티 홀입니다.

메인 작품은 <walking man>,

생명이 없는 한낱 조형물일 뿐인데 조각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앙상한 뼈대만 남은 사람이 걷는 형상에서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힘이 느껴졌어요.

밖이 밝으니 상대적으로 조각은 더 어둡고 검게 느껴집니다.     

가냘프지만 절대 넘어지거나 쓰러질 것 같지 않은 것은 그의 작품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큰 발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은 이제 자신이 우연의 산물이고,

정말로 하찮은 존재이며,

이유 없이 게임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무의미한 것인데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자코메티의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깎아내고 덜어낸 형상을 통해 살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고독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지요.



버스 정류장에 앉아계신 백발의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루이지애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에요. 나는 1주일에 서너 번은 간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이 생각이 들었어요.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할머니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분이세요.’     


루이지애나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많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루이지애나는 사랑이다.’ 라고요. (덴마크 루이지애나 미술관 )








전혜린의 뮌헨, 내가 한겨울 독일 여행을 원했던 가장 큰 이유였을 겁니다.

마치 그녀가 쓴 '먼 곳에의 그리움' 그 비슷한 것이에요.

함부르크의 공기는 아침부터 밤까지 변함없이 블루, '짧은 글, 긴 침묵'이라는 책 제목 같은 그런 날이었어요.

나무는 겨울 동안 제 이름을 잃어버려요.

그냥 겨울나무일 뿐이지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실 가지 모세 혈관으로, 미미한 수액이 느릿느릿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함부르크)








드디어 찾았습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위의 방랑자>,

뒷모습은 앞모습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더 많이 보여줍니다.

미셸 투르니에의  <뒷모습>이라는 책이 있어요.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글을 붙였는데요.

여기저기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지요.

'뒷모습'이라는 독특한 소재에 삶, 사랑, 우정, 신앙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여운이 있는 문체가 무척 매력 있는 책입니다.

그때부터 누군가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게 됐어요.


'뒷모습은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마주한 이를 속이지도 않는다.

진실은 이 사이, 밝히지 않는 것과 속이지 않는 것 사이에 있다.

뒷모습이 요령부득으로 느껴진다면 이는 진실이 요령부득이기 때문이다.'

-  미셸 투르니에, 『뒷모습』 중에서







인공으로 만들어진 알스터 호수의 얼음 위에 오리들이 있어요.

호수의 얼음과 물 사이로 스며든 불빛이 보석 같이 아름다워요

추운지도 모르고 한참을 바라보았어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지 싶습니다.





여행은 무언가를 담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 담고

그림과 집, 자연, 사람을 눈에 담고

웃음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또는 수 백 년 된 오페라 하우스에서 음악을 귀에 담고

낡은 벽과 흐드러진 꽃, 노인의 주름살과 소녀의 미소, 하늘의 구름과 오래된 돌길을 카메라에 담고

그 모든 생각과 느낌을 버무려 가슴과 마음에 담는 시간입니다.


나무, 비, 우리, 모래, 아기, 레이스, 하루, 바다…,

받침이 없는 단어들은 모두 순하고 부드럽습니다.

프라하라는 이름도 그렇지요.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가는 기차의 이름은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드레스덴 인근에서 태어난 베버는 프라하와 드레스덴에서 주로 활동을 했어요.

그런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기차가 그의 이름을 달고 있는 건 이색적이면서 낭만적이죠?   


여행은 옛날로 찾아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어요.

그림, 성당, 음악, 문학이 결국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여행은 사람의 역사를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요?

나는 그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 하나,

곁에 있나 생각해 보세요.







흔히 말한다.

그림같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연이나 풍경, 사람은 그림으로 똑 같이 표현할 수 없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게 아니다.

그림보다 아름다운 거다.


모든 어린것은 예쁘다.

그러나 오래되고 낡은 것에는 아름다움의 깊이가 있다.

아기의 해맑은 미소가 예쁘고 노인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살은 아름답다.

그게 시간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혼자 걷는 시간은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시간이다.

돌아봄, 그리고 지금이 모두 그 속에 들어있다.

함께 걸어 좋은 시간이 있듯 혼자 걸어 좋은 시간이 있다.

여행지에서의 산책은 더더욱 그렇다.

모든 건 지나간다.

그래서 다행이고, 그래서 아쉽다.

가끔 내게 고마운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어느 새벽, 안개.

그 촘촘한 밀도의 하얀 벽에서 푸른 피 같은 시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토록 무서운 갈증과 묵직한 슬픔을 껴안고도 사랑을 소유하지 않았던 릴케…,

그의 생각에 빠져 어느새 햇살이 지천에 못을 박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고요 속에 앉아 있었다.


유럽 어딜 가나 여행자의 급한 발걸음에 쉼표와 느낌표가 될 수 있는 것은 많다.

햇살 가득한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내가 정물화의 한 폭처럼 느껴지는 즐거운 착각,

길거리 화가의 스케치를 흘낏 스쳐보는 소소함은 명화를 바라보는 진중함이 없어 좋고,

잠시 발을 멈추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듣는 버스커들의 가벼운 노래는 탄탄한 심포니와는 또 다른 쌉쌀함이 있어 흐뭇하다.

더디 흐르길 바라지만 여행자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게 마련, 1년 만에 다시 찾아간 파리의 생제르맹 데 프레 거리를 거닐던 지난겨울의 그 어떤 날도 빠르게 흘러갔다.  








루도비코가 무대로 나왔어요.

블랙의 라운드 티셔츠에 얇은 재킷을 걸친 피아니스트는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입니다.

객석의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은 편안한 박수로 그를 반겼죠.     

그는 인사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시를 쓰듯 흰건반과 검은건반이 차례로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반복적으로 움직였죠.

그때서 알았습니다.

곡의 제목이 뭐가 중요한가?

나는 왜 그토록 프로그램을 궁금해했던가?

그의 음악 알맹이들이 노출 콘크리트처럼 날 것 그대로 소리 내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음악회가 가지는 짜임이나 순서, 그런 건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저 음악이 저 혼자 날아서 여기와 거기에 머무르거나 숨어들었어요.

갑자기, 그날 그 시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진하게 전해집니다.


곡이 끝났지만 피아노에서 일어서지 않았어요.

박수에도 인사하지 않았지요.

그저 다소곳이 침묵하다 이내 건반에 손을 얹곤 했지요.

어느새 그의 몸짓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눈치 빠르게 박수를 치지 않게 되었어요.

그렇게 그와 함께 하는 법을 안 거죠.


멋 부리지 않아도 멋있는 사람 있듯

은은하지만 한없이 깊은 울림을 주는 연주가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이미 제목을 알고 있는 곡,

처음 들어보는 곡,

들어봤어도 제목은 모르는 곡,

여러 종류가 있었지요.

하지만 들꽃의 이름을 안다고 더 예쁜 것은 아니듯

음악은 그저 물처럼 흘러가고

나는 그 물에 발 담그고 하늘바라기 하듯 편안했습니다.


음악에 있어 반복은 지루합니다.

반대로 멜로디와 리듬이 계속 바뀌면 어떨까요?

그 또한 통일감이 없고 어수선하며 집중력이 떨어지게 되지요.

하지만 그의 음악은 반복이지만 우아해요.

그게 그의 매력이고 그가 만든 음악의 힘이에요.

반복되지만 지루할 틈 없이 슬쩍 비켜가지요.

그의 음악은 언제나 문을 열어놓은 성당 같습니다.     


그가 말했어요.


'나는 정의하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우아하고 개방적인 음악을 지칭하는 단어라면,

나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미니멀리스트로 불리고 싶다.'


모든 예술이 그렇습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물건의 공통점은 심플입니다.

클래식(Classis)이 ‘유행을 타지 않는 최고의’라는 뜻을 가진 것처럼 ‘고급스럽다’라는 것은 절제의 미학을 기본으로 하지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음악은 그 미니멀리즘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요.







다소 낮은 음색에 말수가 적은 사람에게 좀 더 믿음이 갑니다.

경박한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일 테지요.

내가 좋아하는 여행도 그와 비슷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이나 낡은 벽을 바라보는 일, 다른 하늘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의 대화를 엿듣는 일, 그 사소하고 소박한 시간과 공간 속에 놓임을 좋아합니다.

거창한 역사나 인물들을 머릿속에 입력하는 건 중요치 않지요.

나의 여행은 후회 없을 선택이며 나를 찾아가는 길일 뿐입니다.

발길 닿는 곳이 곧 나만의 주소이며, 그 어떤 생각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오직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 그게 홀로 여행의 좋은 점이 아닐까요?

I, my, me, mine을 이룰 수 있는 계절, 그 하나 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기쁨은 얻고 싶어 하면 얻어지는 것이다.

만사를 까다롭게 만들어, 우리 앞에서 행복을 밀어내는 것은 억측뿐이다.

행복해지는 건 행복한 체하기보다는 백 배나 더 쉬운 일이다.

안목이 있어 진짜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재산이 소용이 없다.

자유롭게 자신의 지배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건강을 누리고 의식에 궁하지 않은 자라면,

억측에서 오는 행복을 자기 마음에서 뽑아내기만 하면 다 충분한 부자이다. <칸트의 에밀 중>



꿈의 나이는 늙지 않는 법,

나는 다시

또 다른 지도 속을 거닐고 있다.    

여행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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