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루마니아에 가려고요.'
'그 유명한 체조 선수의 나라?'
'맞아요, 코마네치가 루마니아 사람이죠.'
거의 50여 년 전의 체조선수를 기억해 내는 B는 기억력이 참으로 탁월합니다.
코마네치는 1961년생으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10점 만점의 전무후무한 점수로 금메달을 획득했고(14세) 4년 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도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지요.
발칸반도라 불리는 동유럽의 소박한 나라들에 대한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가 그곳에 속합니다.
그리스는 아직 안 가봤지만 늘 여행자로 북적이는 산토리니가 그다지 마음에 다가오지 않아 미루고 있고요.
4월쯤이면 괜찮지 않을까 재고 있습니다.
세르비아와 알바니아는 왠지 치안이 안전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있으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미 다녀온 곳이니 패스.
남은 곳 중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나의 레이더에 포착되었지요.
구체적으로 검색을 해보니 루마니아가 생각보다 크고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누군가 이렇게 말했어요.
발칸의 모든 나라를 합한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 루마니아라고 말이죠.
이름도 매혹적인 불가리아의 소피아가 아쉽긴 했지만 루마니아만 다녀오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로 가려면 유럽의 어느 도시든 한 번은 거쳐야 합니다.
비행하는 동안 한 도시에 체류하는 시간이 24시간 이상이면 스탑 오버(stopover), 24시간 미만이면 레이 오버(layover)라고 해요.
이 기회에 빈과 암스테르담에서 스탑 오버하기로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덴마크의 루이지애나 미술관을 비롯해 덴 헤이그의 마우리하위스 등 자꾸 생각나는 몇 곳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빈의 미술사 박물관과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도 그렇고요.
다녀온 지 거의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이번이 좋은 기회입니다.
빈과 암스테르담에서 스탑 오버하는 스케줄을 짰습니다.
비엔나로 입국하는 다음 날 바로 빈 미술사 박물관으로 가서 피터 브뤼헐의 그림을 볼 겁니다.
첫 타임으로 티켓을 예매하면 박물관의 둥근 천장이 아름다운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을 수도 있겠지요.
오스트리아는 고전 음악의 본거지입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 슈베르트가 태어났으며 독일에서 태어난 베토벤도 25세부터 죽을 때까지 빈에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말러와 부르크너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말러의 제자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말러와 브루크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았고 말러는 끊임없이 신을 찾고 있다.'
안톤 브루크너의 고향인 린츠와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 슬라바도 다녀올 예정입니다.
기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난 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날아갑니다.
거의 대부분이 난생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라 읽는 것도 버거운 그곳은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독일어를 같이 사용한다고 해요.
루마니아의 중서부에 해당하는 역사적 지역을 트란실바니아라고 합니다.
브라쇼브, 시비우, 시기쇼아는 트란실바니아의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는 중심도시지요.
부쿠레슈티를 떠나 시비우로 가는 길은 트랜스포가라산 하이웨이를 달려보려고 합니다.
약 152km에 해당하는 구불구불한 이 길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해발 2,000미터가 넘는 포가라스 산맥을 넘는 유일한 길입니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호수도 지나가게 되지요.
6월에도 눈이 녹지 않아 7월에서 10월까지만 통행을 허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치 캐나다의 로키 산맥처럼요.
운전이 쉽지는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10월 16일에 그 도로가 차단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루마니아의 카르파티아 산맥에는 협궤 증기 기관차가 아직도 운행하고 있습니다.
모카니타라는 이름의 이 기차는 40km를 달리는데 무려 두 시간이 걸리지요.
벌목한 나무를 실어 나르던 기차는 여전히 빨갛고 노랗게 물든 나무숲을 달리며 모카 포트 같은 증기를 내뿜을 겁니다.
기차에서 내리면 따뜻한 수프와 핫도그를 사 먹고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의 댄스를 보게 되겠지요.
그리고 온통 울긋불긋 한 산속을 달리는 기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화목 타는 냄새, 쉭쉭 대는 증기 소리에 오감을 열어볼 참입니다.
루마니아에서 기대되는 것 중 하나는 '즐거운 묘지'입니다.
그 마을의 주민이던 파트라슈는 1935년부터 고인의 생전 직업과 생활의 특징을 유머러스하게 묘비에 조각하고 색칠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요.
물론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잇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인이 생전에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술을 좋아했는지 갑자기 사고당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그림과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듯한 시가 적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평소에 고인을 잘 아는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죠.
그 그림들은 주로 푸른색을 사용하는데 마을의 이름을 붙여 사푼차 블루라고 부른답니다.
탄생은 축복이고 죽음은 축제라 여기는 그들의 즐거운 생각을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루마니아는 발칸 반도의 흑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동쪽으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가 국경이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 헝가리 , 남서쪽으로 세르비아, 남쪽으로 불가리아가 있습니다.
또한 유로화가 아닌 레우라는 화폐를 사용하지요.
실제로 김일성과도 친분이 두터웠고 동유럽의 김일성이라 불리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체스쿠는 26년을 독재하였습니다.
198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혁명에 차우체스쿠 정권이 무너지고 사형이 선고된 지 몇 시간 만에 총살을 당했지요.
그 후 루마니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여행자가 적고 물가가 저렴하다는 점이 서유럽의 나라들과는 다른 매력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광활한 토지와 산과 강, 드라큘라의 배경이 된 성, 들판을 가로지르는 양 떼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목가적인 풍경을 기대합니다.
루마니아를 떠날 시간에도 역시 아쉬움 한가득하겠지요.
그러나 암스테르담이 남아 있으니 며칠은 좀 낫겠다 싶습니다.
네덜란드 덴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츠하위스(Mauritshuis) 미술관에서 보았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그림, '델프트 풍경'(Gezicht op Delft, 1661)이 자꾸 생각납니다.
그 풍경이 그려진 델프트와 렘브란트의 고향 라이덴에 갈 겁니다.
물론 반 고흐 미술관과 렘브란트 하우스에도 다시 가봐야지요.
아쉽게도 이번 역시 로열 콘서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공연은 여행 일정과 맞지 않더군요.
정명훈이 그들을 이끌고 루체른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지요.
그의 실력은 여전히 유럽에서도 특급입니다.
비록 이번에도 그들의 본가인 로열 콘서트 허바우에서 연주를 접하지는 못하겠지만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랩소디는 원래는 그리스 서사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주로 서사적, 영웅적, 민속적인 성격을 지닌 환상적인 기악곡을 뜻하는 음악 용어로 우리말로는 광시곡이라고 하지요.
루마니아는 왠지 랩소디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녹음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여 일명 '은둔의 연주자'라고 불리는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가 루마니아 사람입니다.
그가 연주한 브람스 랩소디 2번을 들어보면 일정한 형식이 없이 흘러가는 음악의 특징을 느끼게 될 겁니다.
여행은 걸어 다니는 책 읽기요, 누군가의 하루를 살아보는 일입니다.
여행은 스스로 쓰는 소설이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 다큐멘터리 영화이기도 하지요.
조금 긴 외출이다 여기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루마니아 랩소디는 어떤 멜로디를 그리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