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헌 Apr 05. 2022

빅뱅과 봄여름가을겨울

나는 빅뱅을 싫어하는 소수의 특이한 몇 명 중 한 사람이었다.


2007년 중학교 1학년 때 빅뱅이 '거짓말'과 함께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빅뱅은 당대 90년대 초중반 태어난 아이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빅뱅을 싫어하는 소수의 특이한 몇 명 중 한 사람이었다.


뿌리깊은 나무


2000년대 초중반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팬을 자청했던 나와 친구들은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힙합 '잼민이'였다. 가리온, 소울컴퍼니, 빅딜레코즈, 지기펠라즈의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꿈을 키우며 에픽하이와 리쌍을 슈퍼스타로 모실 때였다. 당시 친구들과 나의 취미 중 하나는 수업 시간 50분 동안 틈틈이 랩 가사를 써서 쉬는 시간 10분 동안 교실 뒤편에 나가 아무렇게나 뱉어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빅뱅 욕하기' 코너가 있었다. 빅뱅의 음악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빅뱅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찾아가 빅뱅 말고 다른 음악을 들으라 강변하는 시간이었다. 어설픈 음악 허세로 중무장한 중학생에게 당대 한국 대중음악은 하나도 성에 차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내가 충성했던 국내 뮤지션은 보아와 윤하밖에 없었다. 그때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빅뱅은 당연히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루펀트 -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졸업식 (Feat. Junggigo aka cubic)


우리는 매 주말 아침마다 연제예식장 앞에 모였다. 수영강 건너 문을 연 한국 최대의 백화점 신세계 센텀시티 영화관에서 조조 영화 한 편을 보고, 다시 동네로 돌아와 노래방에 들러 랩 배틀을 벌이는 것이 주말의 중요한 일과였다. 세 시간에 오천 원을 받던 명성 노래연습장에서 우리는 항상 에픽하이의 'I Remember'를 먼저 골랐고, 이루펀트가 발표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를 마지막에 함께 불렀다. 라디오헤드, 나인 인치 네일스, 림프 비즈킷,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이 유행할 때쯤 마지막 레퍼토리에 타카피의 'Glory Days'도 추가됐다.


나는 친구들보다 공부도 월등하지 않았고 운동도 젬병인 데다 스타크래프트도 못하던 찌질한 중학생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어울리기 위해 무언가 자랑할 거리가 필요했는데 그게 음악이었다. 음악이라도 많이 듣지 않으면 영영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악착같이 음악을 듣고 부모님을 졸라 CD를 샀다. 어디서나 틀어대던 빅뱅 음악에 정을 붙일 시간은 없었다. 하필이면 마룬 파이브와 오아시스를 듣던 시절에 표절 논란이 불거진 것도 컸다.


빅뱅의 음악에 정을 붙여볼까 싶었던 때도 있었다. 2015년 <MADE> 앨범은 매력적이었다. 'Loser'와 함께 연약하고 파괴적인 자아를 숨김없이 내비치던 그들의 공허함이 마음을 끌어당겼다. 'Last Dance'의 절절한 고백은 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언의 시위처럼 들렸고 이듬해 지드래곤이 내놓은 '무제'는 날 것 그대로의 절규처럼 느껴졌다. 빅뱅에 품었던 마지막 기대였다. 이내 그들은 4인조가 됐다. 여러 추악한 일들이 벌어졌고,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BIGBANG - '봄여름가을겨울 (Still Life)' M/V


'봄여름가을겨울'의 위력이 대단하다. 애써 부정했지만 우리의 기억 속 빅뱅이라는 그룹은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고 거대한 존재였다. 강렬한 노스탤지어의 위력 앞에 팬들은 기꺼이 '죄는 미워하되 음악은 미워하지 말라'는 관용을 베풀며 각자의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여행을 떠난다. 역설적이게도 노래는 아름다운 회상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듯 고통스럽고 처연하다. 포장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진 그룹의 오늘날이다.


나의 10대 시절은 비참했다. 닥치는 대로 읽고 들었던 탓에 20대 초 또래들이 겪었을 혼란을 생략하고 인생의 경로를 빠르게 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마냥 의미 없는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열등감만 세고 자존감만 높아 허세만 가득했던 그 시절의 나는 매일 우울하고 괴로웠다. 빅뱅, 동방신기, 소녀시대, 슈퍼주니어의 음악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던 '인싸'들은 너무도 멀리 있었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무시받는 나날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오만한 젊음의 선언일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바리깡을 든 선생이 왼쪽 구레나룻을 날린 다음 오른뺨을 날리던 학창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인기와 영향력 아래 수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안긴 그룹의 음악을 들으며 과거를 애써 반짝이게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가두어 놓아야 하는 시간들이다.


윤하(YOUNHA) - 사건의 지평선 M/V


다행히 빅뱅 말고도 달력을 거꾸로 넘기게 만든 노래가 최근 몇 곡 나왔다. 잿빛의 틴에이지 시절마저도 찬란했노라 착각하게끔 만든 음악이다.


지난주 윤하가 발표한 '사건의 지평선'은 '소원은 하나(願いはひとつ)'를 듣고 이 사람을 영원히 응원하겠노라 다짐하며 인생 최초의 덕질을 시작하던 16년 전의 초등학생 김도헌을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


리믹스와 리마스터로 다시 찾아온 이루펀트의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는 꼭 서울대 가라며 이모가 선물해주신 로고 필통을 손에 꼭 쥐고 서있던 중학교 졸업식 운동장 한가운데의 기억을 펼쳐 놓는다.


올해 봄에는 매년 반복되고 돌아보면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사계절보다, 미지의 우주 공간 속 어느 경계선 어딘가에 위치한 빛바랜 교실에 잠시 머무르고 싶다.


2000년대의 어느날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환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