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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헌 Aug 17. 2022

30대는 왜 음악을 포기하는가

20대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10대 시절 음악 마니아는 고독했습니다. 주변에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고, 정보는 인터넷으로만 찾을 수 있으니 종일 어두운 방 안에서 인터넷을 켜고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아야 했죠.


20대가 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집니다. 세상에 나 말고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에 놀라며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영원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훗날 돌아봤을 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됩니다.


30대는 어떨까요. 음악이라는 공통 주제 아래 울고, 웃고, 싸우다가도 다시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이 현실 속 어른이 되어 연락이 뜸해지지는 않나요. 가디언, 바이스, 밴드캠프, 언컷 등 다양한 매거진에 글을 쓰는 프리랜서 다니엘 딜런 레이(Daniel Dylan Wray)의 칼럼을 번역해 공유합니다.



20대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친구들이 우리가 한때 공유했던 열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너무 성급한 생각인가?


30대가 되면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30대는 엄청나게 중요한 삶의 이정표가 생기는 과도기다. 아이가 생기고, 결혼하고, 집을 구하고, 더 많은 아이를 낳는다. 사람들의 삶에 추가되는 것들은 매우 시끄럽고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떠내려가고 마는 것들은 눈에 덜 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친구들의 삶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음악의 소멸을 느끼고 있다. 음악에 대한 사랑을 공통점으로 하여 오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까지도 음악을 흘려보내거나 배경 음악으로 깊이 묻어두곤 한다. 스포티파이(Spotify)의 2015년 사용자 청취 습관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이 33세에 새로운 음악 듣기를 멈춘다고 한다. 디저(Deezer)의 2018년 보고서는 서른 살이 마지노선이라 말한다. 20대 때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사라진다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게 여겨졌다. 이제 나는 36살이다. 반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음악에 놀라고, 압도당하며 완전히 빠져들고 마는 능력은 여전히 나의 삶에 변함없이 황홀한 기쁨으로 존재하고 있다. 수백만 번 이상 경험한 일이지만 순간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202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음악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지식, 열정을 유지했던 DJ 앤드류 웨더럴(Andrew Weatherall)은 나의 영원한 기준이자 영감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나는 생계를 위해 음악 글을 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나만큼 음악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관심사와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을 잘못이라 볼 수도 없다. 5살 미만의 두 아이를 둔 부모는 작스트랩(Jockstrap)의 신곡을 확인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 아이들이 새벽 다섯 시에 소리를 질러 당신을 깨우는 삶을 살게 되면 음악 공연은 덜 매력적인 옵션이 된다. 진짜 그렇게 된다니까. 물론 BBC 라디오 6 방송국의 성공에서 보듯, 모든 사람이 30대 이후 음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와의 관계 중 근본적인 부분이 악화하는 경험은 기이하고 소외된 경험이다. "무슨 음악을 듣고 있나요?"라는 질문이 "무엇을 보고 있나요?"로 대체됐음을 눈치챘을 때, 미묘한 변화가 생겼음을 깨닫는다. 전하지 못한 콘서트 무료 티켓을 세는 것을 그만둔 지 오래다. 옆 빈자리는 옷 두는 공간이 됐다. 닉 케이브의 단독 공연, 엄청나게 비싼 아레나 공연, 주말의 페스티벌 티켓이 생겨도 같이 갈 사람이 없다.


젊은이들의 광적인 열광과 순진함, 열정이 줄어드는 과정을 단순히 나이가 든다고 치부하는 것은 연령 차별적인 주장이다. 문화적 발견에 다다르는  장애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호기심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새로운 , 영화, 팟캐스트, TV 프로그램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음악은  요소들에 비해 일반적으로 흔하게 사라지는 , 혹은 성장하며 잊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음악은 젊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부분이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이 고정되면  필요가 빠르게 사라지고 만다. 가끔 내가 공연, 축제, 레이브 파티에 간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을 ,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연민의 빛이 감도는 것을 본다.


"아직도 그런  다녀? 세상에."



무언가에 매달리는 행위는 젊음을 놓치기 싫은 유치한 거절처럼 여겨진다. 대머리 모드족이 그들의 깃털 머리 자르기를 단호히 거부하듯 말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나의 독신 친구는 팟캐스트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게 되면서 음악이 더 이상 사교의 중심이 아닌 것들의 조합이 되어버렸다고 이야기했다. 또 다른 친구는 요즘 시대가 어떤 것이든 예전처럼 강한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세대라 설명하고, 한 음악 제작자는 이제 내가 듣는 밴드는 세 팀뿐이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심 부족은 내 또래 친구들 사이의 노스탤지어 흐름을 강하게 부추기고 있다. 2006년부터 2012년 사이 유행했던 '인디 슬레이즈(Indie Sleaze)'가 다시 돌아왔고, 사람들은 장밋빛 틴트 셔터 글라스를 끼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고자 욕망하고 있다. 그 페티시즘이 불쾌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중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음악과 자신의 관계를 조정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노스탤지어에 떨떠름한 사람이지만 이 세계가 추억의 온상이 되어 친숙한 음악이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쭉 들이키는 수밖에 없다.



끝없는 혼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나는 최근 스트리밍 계정을 비활성화하고 시대정신을 끝없이 쫓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한 엠마 갈랜드(Emma Garland)의 최근 칼럼이 좋았다. 새로운 음악을 계속 찾아 듣는 행위가 헛된 것에 가까운, 피곤한 작업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도 가끔 음악을 들으면서 무감각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흡수하지 않고 몸만 까딱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방대한 문화는 우리를 생산 라인을 따라가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돌아가는 콘텐츠 생산 공장에 가둬 놓는다. 그 광기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는 것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내가 계속 관찰하고 글을 쓰고 있는 음악은 다르게 느껴진다. 전술적 후퇴라기보다 무관심의 팽배다. 이 황야의 시대에 음악에 전념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외로운 추구처럼 여겨진다. 한때 동지애, 집단 기억, 경험 공유로 받아들여졌던 음악이 이제는 일방적인 교환이 된다.


물론 음악을 사랑하는 일은 여전히 특별하고, 많은 사람이 그들만의 음악 향유 방식을 갖고 있다. 혹여 현실의 친구들이 사라지더라도 우리에게는 언제나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다. 음악과 사랑에 빠지는 희열이 희미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함께 음악을 들었던 철없던 친구들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성숙하면서 음악을 떠나보내고 같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의기소침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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