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미는 그래미의 길이 있다.
2022년 대중음악의 키워드는 바이럴, 팬덤, 소수자였다. 지난해 첫 히트곡은 틱톡 바이럴을 일으킨 디즈니 '엔칸토'의 'We Don't Talk About Bruno'였고, 그다음이 역주행 곡 글래스 애니멀스의 'Heat Waves'였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거대한 스위프티스의 지지를 바탕으로 'Midnights' 앨범 발매 첫 주 피지컬로 백만 장 판매량을 올렸다.
젠더리스한 패션의 해리 스타일스와 바디 포지티비티의 리조, 샘 스미스와 킴 페트라스의 'Unholy'가 주류 차트를 장악했다. 배드 버니와 아니타 등 라틴 아티스트들이 스페인어 앨범으로 미국 시장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화룡점정은 비욘세였다. 팬데믹 종식과 함께 내놓은 'Renaissance'는 전자음악의 역사를 망라하며 모든 소외된 이들과 젊은 창작자들을 한데 모아 휘황찬란한 미러볼과 스테인드글라스, 벽화와 대리석상을 가져다 놓은 대중음악의 대성당이었다.
제65회 그래미 어워드는 2022년 음악 시장을 충실히 반영하고 공적을 치하했을까. 과거의 그래미라면 어려웠을 결정이 여럿 보였다. 틱톡 바이럴의 힘을 타고 근사한 포스트 펑크 록 앨범을 내놓은 신인 밴드 웻 레그는 비요크, 빅 시프, 예 예 예스, 아케이드 파이어 같은 거물을 제치고 베스트 얼터너티브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베스트 뉴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마라 조이는 1999년생 신예로, 모네스킨, 아니타, 웻 레그, 무니 롱 등 아티스트들에 비하면 화제성에서 밀렸지만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들과 사무국의 선택을 받아 이름을 알렸다.
샘 스미스와 킴 페트라스는 그래미 어워드의 주인공이었다. 해리 스타일스의 젠더리스한 패션은 베스트 팝 듀오 그룹 퍼포먼스 부문을 거머쥔 샘 스미스와 킴 페트라스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샘 스미스는 이미 57회 그래미에서 본상 세 개를 수상하며 모든 걸 이룬 아티스트지만 킴 페트라스는 달랐다. 그는 그래미 트로피를 거머쥔 최초의 트랜스젠더 여성 음악가다. 재키 셰인, 소피, 아르카, 테디 가이거, 허니 디존 등 많은 트랜스젠더 아티스트들이 그래미에 이름을 올린 결과다. 이후 Unholy 퍼포먼스를 소개한 이는 무려 마돈나였다.
해리 스타일스는 모든 면에서 그래미가 가장 사랑하는 아티스트였다. 보이그룹 출신이나 솔로 뮤지션으로 멋진 활약을 펼쳤고 심지어 그 시작은 클래식 록이었다. 1980년대 흑백 싱어송라이터들의 모든 장점을 결합한 ‘Harry’s House’ 앨범은 비평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이제 그의 창작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없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래미는 의외의 선택을 내렸다. 송 오브 더 이어는 2016년 이후 새 정규 앨범을 발표한 보니 레이트였다. 시상대에 오르며 ‘Are You Kidding Me?’라 독백한 보니 레이트는 타의로 인해 올해 그래미상의 결정적 순간을 장식했다. 레코드 오브 더 이어의 주인공은 리조의 ‘About Damn Time’이었다. 무관에 그치나 싶던 해리 스타일스는 최후의 앨범 오브 더 이어를 거머쥐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여러 논란 후 대대적인 개편을 거쳐 진행하는 두번째 그래미 어워드였다. 소외당한 이들을 조명하고 50주년을 맞은 힙합에 근사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등 시대와 호흡하는 모습이 보였다. 본상 수상자도 신예 흑인 재즈 가수, 베테랑 백인 싱어송라이터, 영국 싱어송라이터, 미국 팝스타로 균형을 맞췄다. 과거 그래미였다면 리조와 사마라 조이는 이미 탈락이었다. 심지어 리조는 21세기 레코드 오브 더 이어 부문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 여성이다.
다만 지난해의 음악 흐름을 제대로 훑고 또 가치 평가하였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비욘세는 베스트 알앤비와 일렉트로닉 부문을 동시 석권하며 그래미 최다 수상자 타이기록을 세웠지만 영예는 거기서 그쳤다. 'Renaissance' 앨범의 어마어마한 성취를 생각하면 지난 그래미 때 싱글에 수상할 것이 아니라 이번 앨범에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주었어야 한다. 베스트 랩 앨범 하나로 만족한 켄드릭 라마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보다 몇 개 이상의 그래미 트로피를 안아야 했다. 유독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화제가 된 작품이 그래미상 본상을 받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논란이 많았던 비밀 위원회 철폐 후 그래미 수상자는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 결과로 정해진다. 회원 구성에도 개선 노력을 기울여 현재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은 여성 남성 5:5 비율에 흑인 21%, 히스패닉 8%, 39세 이하 51%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도 레코딩 아카데미가 본상에 허용할 수 있는 관용은 리조가 최대였다.
비욘세의 'Renaissance'와 켄드릭 라마의 'Mr. Morale & the Big Steppers'가 제너럴 필드 수상에 실패한 것은 그 자체로 소수자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들의 음악이 공고한 주류 시상식으로부터 인정받아 역사의 정점에 남는 모습을 상상하면 참 근사하다. 그러나 그들이 본상 수상에 실패하였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꺾이거나 저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레코딩 아카데미 회원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가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 시대라는 점이 유의미하다.
그래미는 그래미의 길이 있다. 대중음악은 기쁜 마음으로 음악계 최대 규모의 축하 무대 레드카펫에 올라 감사를 표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처럼, 바삐 달려가면 된다. 모두가 뒤따라오도록, 그리하여 세상을 먼저 바꿔놓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