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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May 04. 2017

마이 메리 줄리아 [2]

Joan Brown Paintings


조안이 도착한 그날 밤 우리는 갤러리에 작품들을 풀었다. 그림들은 아마도 전부 스무 점 정도로써 세로로 긴 화폭에 한 명의 여성상이 여러 가지 포즈로 다양한 의상을 입은 채 있었다. 강렬한 색감에 재빠르게 다룬 그림은 들쭉날쭉한 태평함이 있었다. 마티스는 베이 연안의 구상 학파에 주요한 영향력을 과시했는데, 데이비드 박, 엘머 비쇼프, 그리고 리처드 디에벤코른이 그의 뒤를 따라 사제적 차용을 하였다. 그들보다 몇 살 아래인 조안은 단순히 그녀가 필요한 것을 마티스로부터 음미하였다. 조안의 경우 격의 없는 태도로 그녀의 오리지널리티를 표현한 것이다. 그녀가 들고 온 회화 들은 시리즈로서, 마티스가 벤스에 있었던 시기의 후기작인 ‘이집트풍의 커튼이 있는 실내 (interior with egyptian curtain, 1969)’ 를 공공연히 참고했다. 마티스의 작품에서는 햇볕이 일렁거리는 야자수가 보이는 창문 앞에, 배와 과일 그릇이 좁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반대편 창문에는 장식적인 커튼이 늘어뜰어져 있다. 마티스가 79세로 아팠을 때 그린 강렬한 여름의 야외 풍경은 어두운 방과 커튼의 아랫자락과 대조되어 있었고, 삶을 찬미한 듯이, 닫힌 커튼이 의미하는 것(죽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메리 줄리아 시리즈에서 탁자와 과일 그릇은 사라졌지만 거의 비슷한 배경에서 젊은 여성의 호리호리한 형상으로 대체되었다. 조안이 ‘이집트풍의 커튼이 있는 실내’를 염두에 두고 그렸는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그 생각은 그녀의 작품 속의 힘과 자신감과 꼭 맞아떨어졌다.


우리는 함께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각각의 장면과 계절들은 인물 뒤의 창문으로 변화했고, 방의 색깔들과 커튼의 디자인들과도 함께 변했지만 같은 모티프에 단지 몇 가지의 예외만 제외하면 시리즈 전체가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림들을 주의 깊게 보다가 우아하고 연약한 푸른 드레스를 입고, 그에 맞는 힐을 신고, 네이비색 깃털 목도리가 그녀의 가슴 깨에서 매달리고 있는, 분홍색 벽 앞에 서있는 마리 줄리아가 서 있는 그림에서 멈추었다. 창밖으로 샌프란시스코 스카이라인의 검은 건물들이 무수한 노란 점과 함께 깊은 코발트 하늘과 대조되게 환하게 빛이 났다. 다른 그림에서는 얇은 겨울 나뭇가지가 창밖의 연한 푸른 하늘로 뻗어나갔다. 검은 커튼이 그림 양 쪽에 빨강과 노랑의 지그재그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패턴화 되어 있었다. (같은 그림에서 메리 줄리아는 그녀의 손을 넓고 테두리가 있는 모자의 위로 걸쳐서, 손과 함께 전체적으로 다이아몬드 형상으로 운을 맞추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녹색과 노랑의 꽃무늬 디자인과 대칭적인 밝고 붉은 카펫 위에 서 있는 인물로서 원근감 없이 평면적으로 그려졌다. 구두와 함께 우아한 검은 바디슈트를 입은 그녀는 마치 투우사처럼 회색 망토를 그녀 뒤로 들고 밤을 준비했다. 멀리서 알카트라즈와 베이 브릿지의 실루엣과 함께 고혹적인 황혼의 푸른빛이 배경을 채웠고, 우리는 그 그림의 액자를 넘어서는 커다란 창문을 상상했다.


그림들은 친밀하고 위트가 있었으며 섹시하고 농염했다. 상징적이고 다양한 한 여성의 일생을 환기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사실 나한테 이제까지 있어 가장 믿기 힘든 점은 그림들 속의 인물은 완전히 일레인과 똑같다는 점이었다. 신체적으로 닮은 점들은 놀라울 정도였는데, 일레인의 몸과 얼굴, 그녀의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혼, 모자를 쓰는 방식과 빈티지 옷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각 등 까지도 포함했다. 일레인이 참석한 오프닝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얼마나 그림 속의 여성이 그녀를 닮았는지 말하곤 했다. 내가 그들을 소개했을 때 조안은 “내가 당신을 그려왔어요.”라고 말했다.



메리 줄리아 시리즈는 샌프란시스코의 마누엘 네리 스튜디오에서 열린 드로잉 세션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조안과 다른 아티스트들이 정기적으로 모였던 스튜디오의 호평받는 조각가 네리는 십여 년도 더 전의 조안의 전남편으로서, 둘 사이에는 노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경쟁자 및 친한 친구로 남았다. 메리 줄리아 클라이멘코라는 젊은 시인이자 네리의 여자 친구는 그 그룹의 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작고 여린 요정 같은 조안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으나 메리 줄리아 시리즈에서 조안의 얼터 에고의 역할을 보여주었다. 할리우드 여배우처럼 조안은 십대로서 그렸고, 메리 줄리아는 이 그림 저 그림에서 짧은 내러티브 속의 “조안 브라운”의 부분으로 연기했다. 이 합연과 거리두기는 이미지에게 - 적어도 내 생각엔 - 절묘한 자율성을 주었다. 그것은 우연한 유사성을 뽐내는 것보다 자유로웠다.


나는 내 아내의 강렬한 이미지들로 채워진 갤러리 안에서 둘러싸여 그다음 달을 보냈다. 매일 밤 집에 가면 내 아파트는 전시회로 사로잡힌 듯했다. 나는 그 그림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일레인을 사랑했다.




일레인은 열여덟 혹은 열아홉에 캐나다 변두리에서 중산층 가정교육을 받으며 뉴욕시내로 이사를 왔다. 그녀의 삶은 이스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나인스 서클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고 한동안 사진을 공부했다. 결국 그녀는 열두 살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그들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처음부터 일레인은 대부분의 젊은 성들이 그랬던 것보다 뉴욕에 대해 아마도 감정적으로 덜 준비했던 것 같다. 그것은 경험 부족이라거나 캐나다인의 순박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긍정적인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본성은 활기차고 재미있고 의심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아래, 마치 잃어버린 차원처럼, 사람들에게 으레 일어나는 나쁜 것들을 흡수하는 그녀의 메이크업이 거의 없는 대척점이 존재했다. 비위를 거슬리는 법률들이 이 수준에 존재했고, 그녀의 공유는 더했다. 그녀의 아들이 6개월 되었을 때, 남편은 헤로인 중독이 되었고 약물 남용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4년 후에 그녀의 아들은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몇 년간 함께 했고 딸을 낳았다. 몇 달 동안 우리 삶의 그 변화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섹스와 은밀함의 가늘고 고운 로맨스적 억양은 허락을 구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행복의 순간은 최대한 보호되었다. 나는 너무 어렸고, 나밖에 몰라서 우리가 이로부터 회복할 수 없을 거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의 아들이 태어났고, 일 년 반 뒤에 확실히 교체할 수 없는 본질적인 깊이의 제한들이 우리 결혼생활에 부딪혀와 거의 영구적이게 되었다. 아주 작은 고통에도 견딜 수 없어하는 일레인의 불가항력은 매일 가늠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했다. 그녀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역치가 없었다. 해가 드는 곳으로의 추구는 또 다른 수준으로 - 우리 결혼생활의 구원의 희망과 함께 - 순수하게 고통으로부터의 도망이었다. 일레인의 나로부터의 분리들은 아마도 보다 더 진실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혼자됨의 고통은 다만 그녀가 돌아옴으로 해서 피할 수 있는 무엇이었다.


일레인의 아들의 죽음 이후에 샌프란시스코의 친구들은 한동안 그들과 지내보자고 초대해왔다. 어느 날 오후,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단체전에 데리고 갔다. 나는 특별히 두세 점의 캔버스를 기억하는데, 흑백 타일이 플로어에 깔려 있고, 두꺼운 물감과 두려움 없는 에너지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 조안 브라운의 작품을 보았을 때였다.




메리 줄리아 전시회가 있은 지 일여 년이 지난 후, 일레인은 뉴멕시코를 떠나 부모와 살기 위해 캐나다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산타페에 남았다. 이후 일레인과 여름을 보내고, 일레인이 뉴욕으로 돌아갔을 때 아이들은 학창 시절을 일레인과 함께 보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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