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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Apr 17. 2017

마이 메리 줄리아 [1]

Joan Brown Paintings












윌리엄 벤튼은 어린 시절 음악 교육을 받고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하였으나 작가로 전향하였다. 그의 시는 ‘뉴요커’, ‘파리 리뷰’, ‘오픈 시티’, 그리고 다수의 컬렉션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화가 엘리자베스 비숍의 회화 작품에 관한 책인 <모자 교환하기>, 그리고 소설 <미친 듯이 Madly> 등을 집필하였다. 현재 그는 뉴욕시에서 살고 있다.


translated by June









마이 메리 줄리아




일레인은 미간이 넓고 어두운 눈동자와 갈색 긴 머리를 가진 호리호리한 여자였다. 키웨스트에서 살고 있었을 당시에 우리는 별거 중이었다. 일곱 살 난 딸은 눈물을 머금고 출발하는 버스 창가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보다 한 살 반 더 어린 아들은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결혼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떠나기 위해 충분한 돈을 모을 때까지 나는 몇 주간 키웨스트에서 조금 더 머물렀다.


2년 전, 우리는 멕시코에서 새로운 삶의 행복을 좇기 위하여, 내가 미술학교의 학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 있는 집을 팔았다. 처음에 과달라야라를, 다음에 푸에토 발랄타에 갔다. 아이들이 식수문제로 아프자 일레인은 멕시코로 온 결정은 실수였다며 회복차 하와이로 떠났다. 그녀의 나이 많은 남자 친구가 호놀룰루에서 살았다. 그 몇 년 전 그들은 나 팔리 코스트를 함께 등산했었다. 우리는 이것을 별거라 명명하기보다는 서로에게 휴식기를 가지자고 여겼다. 한 달 뒤 돈이 점점 줄어가는 상태로 함께 살 곳을 마련하고자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만났다. 마침내 산타 바바라에 있는 집을 렌트하고 그곳에서 거의 일 년을 머물렀다. 우리 둘 다 어떤 면에서 막연했지만 일레인은 불행했던 것 같다. 그녀는 결혼의 끝에 관해 말했지만 그것이 가져올 상실감의 위안 때문에 나에게 의지했다. 서로에게 무력하게 매달리며 불투명한 복잡함(그녀가 고안했다 하더라도 가장 순수하게 희생된)이 남았다. 결국 일레인은 종결을 선언하며 내게 떠나 달라고 요청했다. 친구를 통해서 나는 신시내티 대학교의 겸임 강사 포지션을 얻었다. 일레인과 아이들은 공항에서 배웅했다.


한 달 뒤 그녀는 마음을 바꾸어 대륙을 가로지르며 아이들과 함께 신시내티까지 운전해왔다. 화해의 기쁜 순간, 일레인은 따뜻한 대양 옆의 키웨스트로 이사 가서 우리의 결혼생활을 다시 함께 제자리로 놓아보자고, 프러포즈를 했다. 나는 학기 중간에 강의를 관두었다. 우리는 겨울과 봄을 키웨스트에서 보냈다. 결혼생활이 소생하기는커녕 햇살과 바다의 단순한 날들은 그 어려움을 더 드러내기만 했다. 유예감과 대체감에 살아가며 술을 많이 마셨다. 그녀가 떠난 날,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늦은 오후 길 위의 아스팔트 위는 맹렬한 열기로 여전히 부드럽기까지 하였다. 그날 밤 보름달이 떴다. 북쪽으로 가는 어느 고속도로에서 그녀도 역시 보았으리라. 이것은 우리의 삶의 작은 우화 같은 것이었다. 그녀를 쫓아가던 것은 머물고, 머물던 것은 그녀를 쫓아가고 말았다.




나는 키웨스트에서 산타페로 갔다. 이는 사회적 부적응자와 실패자의 미국적인 순회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산타페는 아트 커뮤니티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나는 36세의 파산한, 미술 관계의 배경 및 네 권의 책을 출판한 시인이었다. 전설적인 캐년 로드에 수십 개의 갤러리가 산재한 마을에서 나는 지역 신문인 ‘뉴 멕시칸’에 미술 평론 작문에 관해 연락했다. 이미 정기 비평가가 있었지만 내가 느낀 산타페 예술계의 첫인상을 기반으로 단기 채용되었다. 기사가 출고하자, 방문했던 갤러리중 한 관장인 은발의 히피인 이 말쑥한 양반은 벤틀리를 끌고 타운을 돌며 상류층 말투로 짐짓 허세를 부리며 일자리를 권했다.


이별은 마치 짝짓기 같이 고유의 안무가 있다. 산타페에서 정착하자마자 일레인은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그녀와 아이들은 그녀의 부모님들과 캐나다에서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날아왔다. 우리는 한동안 다시 함께 지냈지만 이번엔 일레인이 자기 집을 렌트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등록했다. 이 별거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지난번과 달리 내재화되었다. 거의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단단히 움켜쥐어버린 영속성이 얽혀있었다. 그에 몹시 노한 나는, 우리의 실패에 허울만 그럴듯한 원인에 침묵하는 일레인을 전복시켰다. 고장 난 수레바퀴처럼 서서히 이탈하고 말았던 실패.


그 해 말, 친구와 함께, 일레인이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산타페 시내에 클락-벤튼 갤러리를 열었다. 조안 브라운의 ‘메리 줄리아 시리즈’는 그 갤러리의 초기 전시 중 하나였다. 로이 드 포레스트, 첫 번째 전시회에 왔던 정신없던 떼 중 한 명이 조안과 연결해 주었다. 그녀는 내가 존경하는 아티스트였지만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그녀에게 전화했을 때 그녀는 종이에 그린 아크릴 페인팅들이 여럿 준비되어 있고 고맙게도 오프닝 쇼를 위해 작품과 함께 날아오겠다고 했다. 조안의 자화상 속 그녀는 녹색 눈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장거리 수영선수였다. 그녀의 알카트라즈 수영을 기록한 대형 캔버스 복제품들을 본 적이 있었다.


“어떤 수영법(stroke, 회화에서 붓터치를 가리키기도 한다)을 쓰시나요?”

“자유형만 해요.”

“그 정도 거리를요?”

“요령이 있거든요. 도착하면 가르쳐 줄게요. 내가 지낼 곳에 수영장 있으면.”

우리는 앨버커키 공항에서 만나기로 정했다.

“어떻게 알아보죠?” 그녀가 물었다.

“수영복을 입을게요.”

그녀는 웃지 않았다. 침착하고, 동요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좋아요.”




조안이 도착한 그날 밤 우리는 갤러리에 작품들을 풀었다. 그림들은 아마도 전부 스무 점 정도로써 세로로 긴 화폭에 한 명의 여성상이 여러 가지 포즈로 다양한 의상을 입은 채 있었다. 강렬한 색감에 재빠르게 다룬 그림은 들쭉날쭉한 태평함이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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