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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대맡이야기꾼 Dec 29. 2019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질문과 공감의 힘

나는 눈치를 잘 본다. 상대의 기분을 잘 파악하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을 '잘' 캐치한다. 그래서 대인 관계가 원만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또 분위기에 맞게 가벼운 조크나 재치 있는 입담으로 상대방을 기분 좋고 편하게 해 줄 수도 있다. 여러모로 눈치를 잘 보는 것은 세상살이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눈치를 본다'는 말은 안 좋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뭔가 줏대가 없이 상대방을 의식하는 어떤 표정이나 행동, 자세를 일컫는다. '눈치'가 안 좋은 의미로 더 자주 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눈치'를 잘 보아야만 한다. 직장 상사의 눈치, 부모님의 눈치, 친구와 연인의 눈치...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보다 아랫사람(혹은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이 눈치껏 알아서 행동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그 아랫사람은 질문하기보다는 눈치껏 알아서 움직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눈치'라는 게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눈치를 보는 사람'은 자신의 사고가 녹아있는 감정 데이터 처리 장치에 '눈치를 볼 사람'에게서 얻은 감정 데이터를 대입한다. '눈치를 보는 사람은' 상대방의 생각을 내밀하게 온 신경을 곤두 세워 감정 데이터로 읽어 들이지만, 그렇게 받아들인 데이터를 처리하는 곳은 결국 '눈치를 보는 사람'의 데이터의 처리 장치다. 그리고 그 처리 장치의 가운데에는 '선입견', '경험', '편견'과 같은 필터가 설치돼 있어 들어온 데이터를 자신만의 색으로 필터링한다. 그래서 아무리 영민하게 눈을 굴리며 눈치를 봐도 제대로 된 감정 데이터 처리 장치를 갖지 못했다면, 꼭 소시오패스같이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눈치를 잘 본다는 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 대상을 좁히면 의외로 누구나 쉽게 눈치 빠른 사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친구, 오래된 부부 사이 같은 관계에서는 굳이 말이 없어도 소통이 가능하다. 20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한 지인 한 분은 부부 싸움을 하기 전 딱 한 가지 행동으로 싸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건 바로  '헛기침'이라는 신호인데, 상대방이 헛기침을 했을 때는 '이제 기분이 안 좋으니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신호인 걸 알게 돼서 그때부터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화가 났을 때 보이는 상대방의 사소한 습관이지만, 그걸 캐치해서 뜻을 이해할 만큼 서로 신뢰를 쌓고 다듬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지인 부부처럼 오래된 혹은 오래가는 관계는 왜 소통에서 오해의 소지가 적을까? 그건 오랜 시간 서로 부딪히며 상대에 맞는 정확한 감정 데이터 처리 장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겪은 많은 경험과 대화가 훌륭한 감정 데이터 번역 장치인 '공감대'를 만들었고, 이제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정확하게 눈치를 본다.


질문을 하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온전하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은 한정되었고, 기회도 한정돼 있는데 무턱대고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소위 눈칫밥으로 관계를 이어나갈 때는 자주 오류가 생긴다. 기본적으로 살아온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눈치껏 알아서 이해해주고 행동하길 바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특히 연인 관계에서 상대방이 알아서 이벤트를 준비하고, 알아서 데이트 코스를 짜고, 원하는 타이밍에 키스를 해주길 바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을 때 그 방법이 더 궁금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독심술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그런 로맨틱한 일은 일일이 묻지 말고 분위기에 맞춰서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사람과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대방 때문에 실망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내가 보고 느낀 모수가 적어 일반적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흔히들 좋은 연인의 조건으로 '알아서' 잘하는 사람을 이야기하곤 하는 것을 SNS나 미디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눈치껏 행동한다는 것을 반대로 말하면 질문을 하거나 대화가 부족한 상태 즉, 소통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내가 원하는 것, 상대방이 원하는 것, 나의 생각 등 생각을 전달하고 수렴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부재하다는 뜻으로 이는 심각한 소통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생각에 남녀 간에 생기는 젠더 갈등과 연인 간의 갈등은 모두 이러한 소통의 오류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정한울 박사와 천관율 기자의 책 <20대 남자>에서는 20대 남자가 기성세대와 여성 양쪽에서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재밌는 부분은 학업과 취업까지 여성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의 영역에서는 남자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내 주변의 소수의 남자들은 실제로 여자들은 회사에서 편 가르기나 하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기 위해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당사자인 여성과 소통하지 않고 학교나 군대에서 다른 남자들에게서 이어받은 편견과 선입견을 바탕으로 한 이성관계에서 시작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러했는데, 그 사고체계로 여자를 바라보면 여자들은 돈과 외모만을 좇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존재로 비친다. 남자는 그 여성이라는 젠더 권력 아래에서 그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춰주는 '아랫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인식하고 억압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해 당사자와의 소통 없이 선입견과 눈치 만으로 상대를 바라볼 때 벌어지는 비극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방법은 없을까?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질문하기'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이성 또는 친구와 부드러운 관계를 갖게 된 계기는 바로 궁금한 것을 상대방에게 묻는 질문, 그리고  나 스스로 갖는 질문을 시작한 이후였다. 대학교 4학년 때 모자란 교양 점수를 채우기 위해 우연히 여성학 수업을 듣게 됐다. 강의도 강의였지만, 젠더 문제를 남녀가 같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토론 과정에서 나는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여성학 수업 전의 나는 어디선가 읽었던 내용, 아는 형에게 들었던 내용을 교과서 삼아 상대방의 행동을 추측하고 예단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다툼으로 이어지거나 심할 때는 관계의 종말을 불러왔다면, 이후의 나는 이성 친구나 연인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를 즐기면서 상대방의 정확한 감정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이 쌓여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두루 잘 지내는 원만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 내가 눈치가 빠르고 공감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어쩌면 후천적인 노력, 이렇게 질문을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가 느낀 '질문의 힘'은 정말 위대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한다. 오늘 기분은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질문을 하며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눈치를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눈치를 봐서 상대방의 기분을 잘 알아채는 능력은 두 사람 관계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저 눈치로 그냥 넘겨짚지 말고, 질문하며 확인해 보라. 우리의 관계가 한층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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