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해남, 등번호 6번
<슬램덩크>를 보고 난 사람들은 마음속에 선수 하나씩을 품는다. 많은 사람들은 정대만, 강백호, 서태웅을 꼽을 것이고, 누군가는 안경선배 권준호를, 또는 채치수를 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램덩크> 속 내 최애 캐릭터는 신준섭이다. 내가 왜 이 캐릭터를 좋아하는 걸까, 하고 생각한 김에 이 시리즈를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풀어놓는 시리즈다.
평범한, 특출 난 것 없는 선수
신준섭은 명문 해남고교에 '센터'로 입학했다. 189센티미터의 장신이었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몸싸움에서 밀렸다. 더군다나 체력도 그리 좋지 않았고, 곧 퇴부할 선수로 취급받았다. 해남은 취미 선수들이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으므로. 엄청난 피지컬을 가진 변덕규처럼 갈고닦으면 좋은 센터가 될 수 있는 원석도 아니었다. 전국 제패를 노리는 '상승(常勝)'의 해남에게 운동 능력도 평범하고 점프력도 평범한 신준섭은, 굳이 키워서 쓸 선수는 아니었던 셈이다.
당연히 해남의 남진모 감독은 그에게 "센터는 아무래도 무리"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너는 쓸모가 없다'는 말을 에둘러서 듣는 경험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특출 난 것 없는 선수, 애매한 선수라는 말은 곧 선수로서의 가치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할 수 있다'는 말을 기다렸던 남진모 감독은, 신준섭이 묵묵히 수긍하자 당황한다. 하지만 신준섭은 차가운 분노를 가지고 자신을 제련하는 사람이었다. 신준섭은 그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500개의 3점 슛을 던지기 시작한다. 하루 500개는, 강백호가 슈팅 특훈을 할 때 쐈던 갯수보다 약간 적은 수준이다.
나는 신준섭의 이 모습에서 용기를 본다.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은커녕 확률이 그리 높지도 않고, 오히려 나의 재능 없음-평범함만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류의 노력은 시간을 들였을 때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준섭은 '센터 무리' 판정을 받자마자 바로 그날부터 500개의 슛을 쏘기 시작했다.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나는 그런 용기와 결단력을 사랑한다.
노력의 천재, 하지만
하루 500개를 쏘려면 쉬지 않고 20초에 한 개씩 쏴서 약 2시간 40분 정도가 걸린다. 저녁 훈련을 마치고 그렇게 쏘고 들어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 일과가 반복된다. 윤태호 작가는 "의자에 앉아서 버티는 것 까지가 재능"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여기에 적용하면, 신준섭은 노력의 천재다. 타고난 끈기와 인내, 그리고 분노를 표출할 줄 아는 능력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신준섭의 노력은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쓸모없어진다'는 위기의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더불어 자신의 날카로운 무기를 갈고닦았다. 팀원을 믿는 만큼, 그는 마음 편하게 3점을 던질 수 있다. 동료들이 뒤흔들어 놓은 외각의 빈자리에는 신준섭이 있다. 작중에서 등장한 그의 오픈 찬스 3점 성공률은 100%다. 딱 한번, 강백호에게 블로킹을 당했을 뿐이다.
결국 이런 노력은 스탯으로 되돌아온다. 도내 최다 평균 득점(평균 30.3), 도내 베스트 5에 선정, 전국대회 준우승. 서태웅-윤대협-김수겸 등 실력자들이 모인 곳에서 최다 평균 득점을 기록했다는 것 자체로 신준섭의 선수로서의 가치는 증명되었다.
개인주의적 팀플레이어
하지만 이런 '노력'이 내가 신준섭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아니다. 피나는 노력을 한 사람들이 내가 왜 신준섭을 좋아하는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그가 "개인주의적 팀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신준섭은 매일 훈련을 다 소화하고도 남아서 500개의 슈팅을 쏘았지만, 2학년 선배가 된 후에도 누군가에게 그걸 강요하지 않는다. 또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돕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문장은 신준섭에겐 없는 말이다. 그냥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 생존을 위한 노력의 일환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신준섭은 동료를 철저하게 믿는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명확한 이유는, 뛰어난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신준섭을 왜 좋아하냐'거나, '3점 때문에 좋아하냐'고 물으면 나는 신준섭이 능남전에서 노룩 패스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장면이야말로 신준섭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다른 선수들이 만들어 준 오픈 찬스는 놓치지 않고, 자신이 필요할 땐 어떻게든 이타적인 플레이로 연결할 줄 아는 선수라니.
'개인주의적 팀플레이어'라는 말이 어폐가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흔히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혼동한다. 이기주의자는 남을 희생시켜 제물로 바친 다음 자신이 살아남는 사람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공간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남의 공간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기주의자는 팀을 망치지만, 개인주의자는 팀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 이기주의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팀워크를 희생시키지만, 개인주의자는 자신을 바탕으로 팀을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개인주의적 팀플레이어란 나와 한 팀인 이들을 믿고, 경쟁에서는 꼼수를 쓰지 않고, 승리를 기뻐하는 만큼 패배를 받아들일 줄 알며, 나의 분노를 승화시킬 줄 아는 성숙함. 실력차가 나는 이들을 무시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존중하는 사람이다. 팀원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등산에 부르는 상사나 타인의 고통에 자기 얘기만 쏟아놓는 사람들은 결코 팀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최애캐는 신준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고, 절망과 분노를 딛고 일어나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준섭은 정대만처럼 뜨겁게 타오르거나 절망하지도, 서태웅처럼 화려하게 빛나거나 무섭게 부딪히지도 않는다. 윤대협이나 이정환처럼 완벽한 재능을 갖추지도 못했다.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훈련장으로 향했던, 눈에 잘 띄지 않던 선수가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그가 개인주의적 팀플레어이기 때문이다.
차갑게 타오르는 불
작중에서 기자로 등장하는 박하진 기자는 신준섭을 두고 "해남의 조용한 강함을 상징하는 선수"라고 말했다. 신준섭은 말 그대로 조용히 강한 선수다. 남진모 감독이 신준섭에게 '준비 되었냐'고 묻자 신준섭은 "기다리다 못해 지칠 정도예요...!!"라고 답한다. 묵묵히 매일 500개의 슛을 쏘고, 자신이 팀을 위해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 매 순간 생각하는 선수지만 그 안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투쟁심이 숨어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비형 스라블은 술이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차가운 불입니다. 거기에 달을 담아 마시지요." 비형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준섭은 술과 같은 선수다. 마시기 전에는 향기를 잘 느낄 수 없지만, 마시고 나면 취하고야 마는 술. 신준섭은 노력으로 빚어진 한잔 술 같은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