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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빠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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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an 31. 2022

(아빠 일기) 아이가 세상을 응시할 때

아이의 눈에는 어떤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까.

생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새벽녘에 잠에서 깬 도영이는 엄마의 품에 안겨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의 시선이 향한 곳에선 암막커튼의 작은 틈 사이로 옅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은 밤이 긴 겨울이라 해가 뜨기에는 조금은 이른 시간이지만, 커튼 틈 사이의 작은 빛은 도영이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나 보다. 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보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일까. 어두운 방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안겨 멍하니 빛을 바라보는 도영이의 모습을 보며 마치 불이 꺼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모습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느덧 생후 두 달이 지난 도영이의 눈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다. 나는 매일 밤 하품을 하는 도영이를 재우기 위해 어두운 침실로 향한다. 어두운 방에서 옅은 빛을 내는 수유등을 켜고 아이에게 분유를 먹일 때면, 도영이는 분유를 먹으면서도 천장에 비친 수유등 불빛의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수유등의 빛을 받은 모빌과 아기침대는 천장의 그림자가 되어 아기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두운 침실에서 분유를 먹는 쪽쪽 소리와 함께 그림자를 바라보는 도영이를 볼 때면, 도영이의 머릿속에선 빛이 만들어낸 환상이 어떤 영화가 되어 펼쳐지고 있을지 괜스레 궁금해진다.




영화를 좋아하던 엄마와 아빠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하는 영화 비평 강의를 수강하며 처음 만났다. 그곳에서 엄마는 황야를 통과하는 어떤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영화에 대해 글을 썼고, 아빠의 글은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서부로의 여정을 다룬 영화에 관한 것이었다. 마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갈등으로 가득한 두 영화 속 인물들과는 달리, 어느새 엄마와 아빠는 가족이라는 배에 함께 올라 순탄히 그 여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년에는 도영이라는 새로운 동료가 함께 하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에 집중하는 것은 도영이와 비슷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보이는 호기심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좋아했던 엄마와 아빠는 그런 도영이의 모습에서 영화를 보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어느 미래에 엄마와 아빠가 좋아했던 영화를 도영이가 보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눈앞에 놓인 사물만 겨우 볼 수 있었던 신생아 때와는 달리 이제 도영이는 보이는 모든 것에 호기심이 넘쳐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빌을 보면서 누워 있을 때면 움직이는 모빌의 인형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기 바쁘고, 반짝반짝 거리는 사운드북에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시선을 떼지 못한다. 제법 멀리서 엄마 아빠가 있어도 정확히 눈을 맞추고, 젖병에 분유가 들었다는 것을 아는지 배고파서 울다가도 멀리서 젖병을 흔들며 다가오면 조금은 진정을 하고 젖병을 바라본다.


호기심이 많아진 만큼 같은 장난감을 오래 가지고 놀 때면 지루해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어깨에 안고 집안을 구경시켜준다. 간밤에 도영이가 사용했던 젖병과 젖꼭지들, 아직은 도영이가 가지고 놀기에 일러 방 한 구석에 모아놓은 알록달록 장난감들. 엄마 아빠의 책이 모여있는 책장의 책들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창밖에 비치는 창릉천의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때로 거울을 보여줄 때면 도영이는 신기한 듯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엄마 아빠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본다. 아직은 거울 속 모습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많이 어리지만, 낯선 아기의 얼굴을 보며 불편함보다는 호기심이 생길 때이기도 하다.



여전히 세상의 규칙이 어렵고 모든 것이 낯선 도영이에게 세상은 어떤 영화일까. 모든 것이 궁금하고 낯선 미스터리 영화일까. 반복되는 매일매일이 즐거운 코미디 시트콤일까. 최소한 아이의 눈에 펼쳐진 세상이 무서운 공포 영화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매일매일 잠에서 눈 뜬 아이를 밝은 목소리로 맞이한다. 그러면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보다가도 이내 밝은 웃음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몇 해 전 아내와 함께 본 영화에서 볼이 붉은 어린아이는 학교를 가다 말고 경로를 바꿔 눈이 쌓인 길을 나섰다. 눈으로 덮인 세상에서 아이는 장갑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기차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어 놓칠뻔하기도 한다. 아내와 나는 혼자서 눈길을 걷는 아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보았다. 그리고 아이는 그런 우리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겁도 없이 씩씩하게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특별한 갈등이나 사건도 없이 눈길을 나선 아이의 하루를 그린 영화였다. 그날 저녁 아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낮 동안의 모험이 피곤했는지 아이는 세상모른 채 잠이 들어있고, 아이의 부모는 학교를 가지 않은 아이를 혼내기보다는 여행을 다녀온 아이의 하루를 조용히 공유했다.


< 영화 :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 >


잠이 든 도영이의 모습을 볼 때면 종종 이 영화가 떠오른다. 온종일 울고 웃는 도영이의 마음은 여전히 의문부호로 가득하다. 하루 내내 도영이와 함께 있을 때조차 나는 도영이가 어떻게 순간순간을 경험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저 도영이가 보여주는 울음과 웃음 사이에서 그 기분을 얼추 파악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자신만의 여행을 다녀온 뒤 따뜻한 집에서 잠이 든 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매일 저녁 힘겹고 즐거운 하루를 보낸 도영이를 바라본다. 아직 도영이에게 세상은 이제 막 오프닝이 시작된 영화이겠지만, 조금씩 그 영화가 선명해질 때면 엄마와 아빠는 너를 대신해 시나리오를 써주기보다는 겁도 없이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아이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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