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inema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근긍 Jun 25. 2018

<120BPM> 오직 운동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영화가 끝나도 지속되는 울림에 대해서

에이즈 대책 촉구를 요청하는 ‘액트업파리’(ACT UP PARIS)의 시위 중 시위대는 길거리에 눕는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들 위로 지부장인 ‘티보’의 연설이 이어진다. “‘액트업파리’는 에이즈를 도전이라 봅니다. 우리와 함께 싸워주세요” ‘티보’의 외침과 함께 누워있던 시위대는 하나하나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들이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이상한 감동은 분명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영화 ‘120BPM' 속에서 ’액트업파리‘의 시위는 장소와 방법을 달리하여 여러 번 반복된다. 하지만 이 순간처럼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정지한 적은 없었다. 그 정지의 순간은 움직임이 만들어낸 감동, 더불어 모두가 느꼈을 엔딩 크레딧의 여운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개별적으로 만들어진 움직임들 


영화는 좁은 틈을 통해 무대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웅성거림으로 시작한다. 얼마가 지난 뒤 그것이 AFLS(파리에이즈퇴치기구)에 에이즈 대책을 촉구하기 위한 항의였음이 드러난다. 액트업파리 주간 회의에서 소피의 브리핑으로 시작하는 이 장면은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관점을 밝히며 전개된다. 시위가 잘못됐음을 비판하는 소피. 긴장하여 가짜피를 너무 일찍 던진 마르코. 무관심에 저항하기 위해 AFLS의장에게 수갑을 채운 맥스와 션. 회의장에서의 대화와 AFLS를 향한 소동이 마치 동시에 벌어진 양 서로 다른 공간과 서로 다른 의견은 의도적으로 교차하며 연결된다. 


그들은 액트업파리라는 하나의 소속으로 함께 시위에 나선다. 영화의 도입부, 액트업파리를 소개하는 남자의 말처럼 그들이 HIV양성이든 아니든 외부의 사람들은 그들을 AIDS 환자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AFLS를 향한 작은 소동에서 조차 그들 각자는 자신의 입을 가지고 말하며,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액트업파리 일원을 한명씩 바라보는 카메라는 그 하나하나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시위 행렬에서 조차 딥포커스를 활용하여 카메라에 잡힌 인물 하나하나의 얼굴을 놓치지 않는 영화는 그들을 결코 하나의 균질한 덩어리로 규정하지 않는다



인물을 하나하나 바라보는 카메라는 시위가 끝난 뒤 이어지는 파티에서도 계속된다. 제약회사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들의 모습위로 쿵쾅거리는 음악이 뒤덮는다. 뒤이어 그들은 빠른 비트에 춤을 추고 있다. 춤을 추고 있는 그들의 얼굴들 위로 하얀 먼지가 조금씩 비춰진다. 미세한 먼지의 움직임은 그 하나하나가 밝게 빛나며 개별적으로 운동한다. 뒤이어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던 먼지는 효소억제제의 모습을 흉내 내며 액트업파리 주간 회의로 장면을 옮긴다. 미세한 먼지의 개별적 움직임은 서사적으로 불필요함에도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영화 속에 자리하고 있다. 


서사적으로 무관한 작은 움직임은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도 이어진다. 에이즈 치료제에 관한 그들의 회의는 주간 회의를 거쳐 집으로 장소를 바꿔 계속된다. 이 시퀀스는 흩날리는 작은 물방울로 시작된다. 푸른 잎사귀 사이로 퍼져나가는 작은 물방울의 운동은 낯선 경쾌함을 남긴다. 대화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야 그 물은 그들의 뒤에서 베란다의 화초에 물을 주는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회의-시위-춤을 반복하며 진행하는 영화 중에서, 서사적으로 무관한 작은 움직임을 카메라는 이토록 가까이에서 바라본다. 아름답게 찍힌 이 몇 개의 장면은 액트업파리의 저항을 다루는 ‘120BPM'에서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오직 운동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액트업파리가 주간 회의에서 얘기하는 모든 주제는 ‘어떤 운동(ACT)을 할 것인가'이며, 그들의 단체명 역시 액트업파리(ACT UP PARIS)이다. 때문에 운동(성)은 이 영화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은 대체로 이 운동성을 응시하고 있다. 창밖을 바라로는 학생의 시선을 경유하여, 답답한 교실에 액트업파리 회원들이 난입한다. 학교는 에이즈 방지법을 홍보하는 그들을 통제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한다. 뒤이어 수업 종료를 알리는 교실 밖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순간을 카메라는 부감으로 바라본다. 강의실을 나오는 액트업파리 회원들과 학생들. 그리고 교사와 비둘기까지. 액트업파리의 방문과 함께 벌어진 한 순간의 움직임은 교실 안 학생의 시선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활력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서 운동성의 활력을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액트업파리의 시위 장면이며, 그 중 가장 강렬한 순간은 단연 게이 퍼레이드 장면일 것이다. 핑크빛으로 펄럭이는 옷자락. 사방으로 힘껏 뻗는 응원 수술.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꽃가루.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치어리딩. 여기에 폭죽까지 더해지며 그들의 운동성은 끝까지 치솟는다. 갑자기 쓰러진 ‘나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네가 살길 원해’라는 홍보지의 문구보다는 게이 퍼레이드 장면이 만들어낸 운동성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의 후반부. 션의 병세가 악화되고, 가장 먼저 그는 음악이 흐르는 파티에서 더 이상 춤을 추지 않는다. 음악이 넘쳐흐르는 시위의 행렬에서 역시 이제는 운동성을 잃은 채 조용히 걷기만 한다. 티보가 병실에 누워있는 션을 찾은 장면에서 들리는 게임기의 전자음은 역동적인 시위 행렬의 난장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기만 하다. 션에게 죽음이 다가온 순간부터 영화에 가득하던 운동성은 그 자취를 잃어간다. 그 글의 도입부에서도 얘기했던, 션의 병세가 악화된 이후의 시위행렬은 거의 정지한 채 어둠 속에서 느리게 움직인다. 심지어 부감으로 비춰진 시위행렬은 시체처럼 누워 있다. 그들의 피켓에 붙어 있는 문구 [ACTION = VIE(삶), SILENCE = MORT(죽음)] 역시 고요한 그들의 행진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시위에서 저항하지 않기 위해 누워있던 그들의 육체가 가짜 피를 붉게 칠하고 있으면서도 생의 기운이 넘실대던 것에 비해 지금 누워있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어떠한 힘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감동은 다음 장면에 발생한다. 음악이 들리고, 티보 연설과 함께 누워있던 시위행렬은 하나 둘 몸을 일으킨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지며 노래는 커지고 그들은 춤을 춘다. 그 장면을 전후로 세상에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 영화에서 잠시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것은 오직 운동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ACTION' 그 자체임을 이 짧은 장면은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침대에 누워 있는 션에게 돌아간다. 션의 깊고 거친 숨소리. 고요한 적막과 미동도 없는 정지 속에 죽음을 앞둔 션의 호흡만이 남아 있다. 붉게 물든 센 강의 적막처럼 션에게 죽음같은 ‘SILENCE'만이 가득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션은 침묵 속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를 대신해 불태워진 유골이 시위를 대신한다. 액트업파리 회원들은 보험업자들의 연회장에서 션의 유골을 뿌리며 연회를 망친다. 연회장은 어두워지고 시위를 하던 움직임은 자연스레 파티에서 춤을 추는 움직임과 공명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침묵



침묵이 만들어낸 강력한 외침 


엔딩크레딧과 함께 마주한 긴 침묵은 아마도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큰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이는 가장 격렬한 운동의 끝에 이어진 침묵이며, 가장 격렬할 운동을 머금은 침묵이다. 'SILENCE'는 죽음이라는 영화의 명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영화가 끝에서 션의 죽음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ACTION'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밖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이다. 그러니 영화의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지는 현실의 우리에게 달려있다. 영화의 감독은 실제 액트업파리의 일원이기도 했으며, 1980-90년대 액트업파리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의 엔딩은 그 실패가 끝이 아님을, 이제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무엇보다 강렬한 침묵으로 외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33 <침묵> 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