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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ul 15. 2018

<서버비콘> 폭력 앞 일상의 안감힘

이웃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폭력


하나의 도시가 있다.

미국 백인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펜실베니아의 살기 좋은 도시 서버비콘. 명백히 Suburb(교외)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을 이 작은 교외 마을은 평화와 여유로운 생활이 흘러넘친다. 그러던 어느 날 서버비콘에 흑인인 마이어스 가족이 이사를 온다. 백인들만의 도시에 낯선 흑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없던 주민들은 마이어스 가족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두 개의 사건이 있다.

하나의 사건은 서버비콘의 주민들이 흑인 가족을 내쫓기 위한 것이다. 매일 밤 그들의 집 앞에 모여 불안감을 조성하던 이들은 점점 괴롭힘의 강도를 더해간다. 집을 고립시키기 위해 장벽을 세우고 소음을 만들어 마이어스 가족의 생활을 방해하던 주민들의 태도는 갈수록 폭력의 강도가 높아져 간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서버비콘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가드너(맷 데이먼)은 아내 로즈(줄리안 무어)를 살해하고 쌍둥이 자매인 마가렛과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여기에 목격자와 청부 살인업자 그리고 보험조사관까지 개입하며 새로운 출발을 꿈꾸던 가드너의 소망은 무너지고, 시체는 하나 둘 늘어난다.


행복을 위장한 아름다운 마을, 서버비콘. 한 가족이 일상을 무너뜨리려는 폭력에 무던히 견뎌낼 때, 다른 한 가족은 일상을 파괴한 뒤 새롭게 시작하려한다. 여기엔 어떠한 미스테리도 추리도 없다. 사건은 그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고, 범인은 너무 늦지 않게 밝혀진다. 그럼에도 영화가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서버비콘이라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벌어진 두 가족의 사건이 자꾸만 겹쳐져 보이기 때문이다.



마이어스의 집과 가드너의 집에서 벌어지는 두 사건은 서로 무관하다. 그것은 각자 일어난 사건이며, 사건만을 본다면 굳이 둘은 이웃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둘을 연결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건을 대하는 주민들의 반응일 것이다.


주민들은 언제나 마이어스의 집 앞에 몰려들어 있어 거리는 고요하다. 그 고요함 속에 가드너의 집에서는 살인과 범죄가 벌어진다. 주민들은 가드너의 집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보지 않은 채 마이어스의 집에만 몰려있다. 그들은 이미 일어난 명백한 범죄에는 고개를 돌리고, 일어날지 모른다고 가정한 가상의 범죄를 처벌하고 있다. “마이어스 가족이 오고 마을에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어요.”, “마이어스 가족에는 안 좋은 소문이 있어요.”라는 주민들의 인터뷰는 그들이 가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망상을 확인시킨다.


그러니 두 사건은 서로 무관하지만 바로 옆에 놓인 집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마이어스가 자신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주민들을 향해 “이놈들은 짐승들이야”라는 말을 뱉을 때, 그 순간 화면에 비춰지는 것은 자신의 아내를 죽인 가드너의 얼굴이다. 동시에 가드너가 자신의 범죄에 대해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무엇이 장애물인지 파악해야한다”는 변명은 마이어스 가족에게 폭력을 가한 주민들이 가졌을 순수한, 그래서 천박한 믿음과 일치한다.



이런 서버비콘에서 우리가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은 오직 마이어스와 가드너 집안의 어린 두 아들들이다. 주민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함께 야구를 하러가는 두 아이. 얇고 약한 실로 연결된 실전화를 통해 나누는 대화. 난간을 넘어 서로에게 던질 수 있는 야구공. 살인과 폭력, 분노와 배제가 가득한, 이 행복을 위장한 마을에서 오직 단순하게 오고가는 그 움직임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화해의 제스처일 것이다. 영화는 당신에게 서버비콘이라는 도시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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