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린 온 피트>와 <로데오 카우보이>를 보고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황야에서 비스듬히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권총을 쥔 사내가 다가온다. 머나먼 서부의 평원에서 나타난 그 사내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서부 사나이는 그렇게 카메라 앞에 도착한다. 아마도 그는 마을을 구하고 다시 평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초월적 공간을 향하여. 마치 그것이 서부사나이의 운명이라도 된다는 듯이...... 잠깐!!! 여기서 우리가 놓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항상 사내와 함께했다. 그것은 사라졌다가도 이내 돌아오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내와 함께한다. 그것은 말(馬)이다. 말을 타고 나타난 사내. 카우보이에게는 말이 있어야 한다. 이는 모뉴먼트 밸리가 더는 초월적 거리를 지니지 않는 21세기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코엔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에서 오프닝에서 노래하는 카우보이 ‘버스터 스크럭스’(팀 블레이크 넬슨)에게도, <더 홈즈맨> 속 동부를 향한 ‘커디’(힐러리 스웽크)와 ‘조지’(토미 리 존스)의 여정에도, <몬태나>에서 ‘인디언 추장’(웨스 스투디)과 ‘대위’(크리스찬 베일)의 지난한 동행에도 말은 함께 한다. 종종 어떤 이들은 말에서 내려서 걷기도 하지만, 그들은 다시 말에 오른다. 서부의 초월성과는 무관하게 황야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이라는 듯이.
하지만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말의 양태는 조금 달라진 듯하다. 작년에 개봉한 ‘앤드류 헤이’ 감독의 영화<린 온 피트(Lean on Pete)>에서 아버지를 잃은 소년 ‘찰리’(찰리 플러머)는 경주마 ‘린 온 피트’와 함께 고모를 찾아 떠난다. 평원을 건너는 도중 자동차의 기름이 떨어지고, 먹을 것도 없어 도둑질하기에 이른다. 그런데도 찰리와 피트는 함께 걷는다. 도중에 만난 남자들이 말을 탈 줄 아냐며 가르쳐주겠다고 하지만 찰리는 피트가 사람이 타는 말이 아니라고 답할 뿐이다. 국내에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VOD 서비스를 통해 공개된 ‘클로이 자오’ 감독의 <로데오 카우보이(The Rider)>는 사고로 말을 탈 수 없는 한 남자를 다룬다. 젊은 카우보이 ‘브래디 (브래디 잰드로)’는 로데오 경기 중 낙마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말을 타야만 하는 카우보이에게 더는 말을 탈 수 없다는 사실이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말을 탈 수 없는 카우보이. 또는 탈 것으로 기능을 하지 않는 말. 물론 그것은 동시대에서 더는 교통수단으로서 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원을 배경으로 한 동시대의 두 영화에서 말과 함께한 여정이 보여준 행로는 무의미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서부사나이를 태우고 황야를 통과하던 말이 ‘탈 것’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말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주는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말은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관리된다. 그것은 스포츠의 형태이다. 그것은 말이 길들여졌는가, 길들여지지 않았는가와 무관하다. 더 이상 말은 우리의 일상에 놓여있지 않다. 그리고 말이 등장하는 <린 온 피트>와 <로데오 카우보이>에서 자연스럽게 그 배경은 경마와 로데오라는 스포츠이다. <린 온 피트>에서 찰리가 처음으로 말을 보는 것은 경마장이다. 마구간에 갇혀있던 말들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출발선의 좁은 가림막에 갇혀있다가 총성과 함께 길게 펼쳐진 경기장을 달려가고, 그 시작과 함께 끝이 정해져 있다는 듯 이내 끝나버리는 스포츠. 철저한 통제와 관리하에 진행되는 스포츠는 오로지 말의 육체와 거기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속도를 경연하기 위해 벌어진다. 그리고 황야를 달리던 말은 경연장으로 옮겨져 잠시간 힘껏 달렸다가 이내 멈춘다. 정해진 경기장에서 일순간 끓어올랐다가 이내 종료하고 마는 것은 <로데오 카우보이>의 로데오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승마와는 달리 길들여지지 않은 말은 제멋대로 요동치고, 승마보다 빠르게 휘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길들이지 않은 말이나 소를 타고 버티는 경기인 로데오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들의 솜씨를 겨루는 데서 시작한 대표적인 서부의 놀이이다. 그리고 여전히 경기 도중 사망 사고가 끊이지 않는 죽음의 놀이이다. 그 운동이 만들어내는 육체의 파괴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예견되어있으며 동시에 치명적이다.
서부를 달리던 말은 정해진 트랙을 달려 제 육체의 속도를 뽐내거나, 길들여지지 않은 채 요동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서부라는 공간은 이제 말을 동반한 스포츠의 형태로 재현된다. 서부를 달릴 일 없는 말들은 이제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오직 좁은 경기장에서 짧은 시간뿐만 서부를 흉내 내고는 빠르게 휘발한다. 일시에 끝나버리고 마는 경마와 로데오의 휘발성은 그렇기 때문에 서부의 빈자리를 더욱 여실히 드러낸다. 일정한 규칙으로 반복하며 통제되는 스포츠에서 사람이 말을 타는 행위는 그 시작의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탈 것’으로의 기능을 상실한 말은 더 이상 스포츠일 수 없다. 그러니 말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주는가라는 앞선 질문은 이 세계에서 이렇게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서부를 흉내 낸 스포츠를 떠난 말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주는가.
하지만 영화 속 말의 죽음은 그 질문에 대답을 당혹스럽게 한다. <로데오 카우보이>에서 말타기를 포기할 수 없는 브래디는 몸을 회복하는 동안 의사의 충고를 무릅쓰고 야생의 말을 길들이는 것으로 돈벌이를 하려 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 아폴로를 구입하고 조금씩 훈련해가는 모습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육체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신비로운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은 당연하게도 오래가지 못한다. 어느 날 철조망의 핏자국과 함께 아폴로가 사라진다. 뒤이어 찾은 아폴로의 다리는 철조망에 찢겨 더는 달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다. 아폴로를 안락사시키는 총성에 이어 석양이 지는 평원 위로 브래디와 브래디의 아버지 그리고 쓰러진 아폴로의 육체가 그림자 져 있다. 로데오 경기장의 장면에서 제 몸 위에 올라탄 사람은 필요 없다는 듯이 요동치는 말의 격렬한 움직임에 비해 철조망을 넘은 아폴로의 쓰러진 육체는 너무나 고요하다.
<린 온 피트>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갈 곳을 잃은 찰리는 피트가 있는 마구간을 거처로 삼는다. 비슷한 시기 더는 빠르게 달릴 수 없게 된 피트는 멕시코에 팔릴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내 죽게 된다는 것을 찰리도 알고 있다. 더는 머뭇거릴 수 없는 찰리는 피트를 데리고 고모가 사는 와이오밍으로 떠난다. 아무것도 없이 길을 떠난 찰리는 곧 돈이 떨어져 도둑질하기도 하고, 낯선 이들의 도움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지금이 어딘지 조차 명확히 알 수 없는 그들의 행로는 배고프고 피로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황야에 놓인 찰리와 피트의 이미지는 그럼에도 스스로의 삶을 찾아 떠난 두 생명의 주체성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급작스러운 피트의 죽음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어진다. 저 멀리서 형체 모를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서서히 도시의 소음이 그들을 반길 때, 한껏 가까워진 자동차 소리에 피트는 놀라 발버둥 치고 이내 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자동차와 충돌하여 죽음을 맡는다. 컷을 나누지 않고 찍은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깊은 호흡을 멈추는 육중한 피트의 모습과 놀람을 넘어 공포에 휩싸인 찰리의 모습을 담는다. 호흡을 정지한 말이 쓰러져 바닥에 누워있을 때 거대한 말의 육체만큼이나 커다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말의 죽음이라는 흔적은 브래디와 찰리에게 제각기 새겨진다.
<린 온 피트>에서 ‘말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만들어낸 흔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찰리의 달리기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드리우는 새벽. 한 소년의 움틀거림. 뒤이어 보이는 것은 달리는 소년의 이미지이다. 찰리의 달리는 이미지는 영화의 도입부부터 시작하여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찰리는 운동처럼 달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고아가 되지 않기 위해 달리고, 경찰의 보호를 피하기 위해 달린다. 찰리의 달리기에는 일변 집에서 머물렀을 때 느끼는 불안감의 연장선에 있다. 긴장한 표정과 함께 본인의 집에서 물을 마실 때도 물어보는 찰리의 모습에서 그가 집에서조차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 새로운 안식처를 소개해줄 테니 잠시 기다려보라는 경찰과 의사의 말에도 찰리가 기다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황야에서 잠시 머문 낯선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오며 “계속 가야 해 여긴 우리 집이 아니야”라는 찰리의 말은 그렇기에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다. 어떤 곳도 찰리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혹은 찰리는 그 어느 곳도 자신의 안식처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찰리의 달리기는 위태로운 정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다. 반면 영화 속 여성들은 대부분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거기에 머물러 남자들에게 음식을 해준다. 찰리의 아버지가 말한 ‘웨이트리스’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 여성들 모두를 아우르는 단어일 것이다. 영화 속 여성들은 남성에게 음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웨이트리스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쟁을 얘기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남성들은 항상 그녀들에게 기생한다. 찰리 역시 고모가 자신을 돌봐줄거라 기대하고 있기에, 고모 역시 마찬가지로 웨이트리스의 세계 속 일원이다. 그렇기에 고모가 돌봐줄 안식처도 새로운 곳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달리기를 즐기는 찰리는 우연히 지나친 경마장에서 말에게 매혹된다. 단단한 육체와 거친 숨소리. 달리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말의 존재에 찰리는 단번에 이끌린다. 찰리와 피트가 가지는 이상한 연대 의식은 달리기라는 공통된 움직임에서 생겨났다. 그렇기 때문에 피트가 다시는 달릴 수 없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함께 떠나는 것을 단순히 인간과 동물의 우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위태로운 정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찰리의 여정과 달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한 피트의 이동은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어떠한 보호자도 없이 갈 곳을 잃은 찰리는 그 순간 도망치듯 병원에서 떠나고, 그 무렵 더는 달릴 수 없게 된 피트는 거기에 동행한다. 달린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여기에서 다른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것. 그 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과정에 찰리와 피트의 동행이 있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피트의 죽음을, 그 동행의 종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뒤에 이어지는 시퀀스를 통해서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찰리는 도시에 도착한다. 그곳은 피트가 살 수 없는 공간이다. 피트를 구입하겠다는 찰리에게 델은 “무슨 돈으로? 그리고 어디에 두게?” 라고 반문하며 조롱했다. 돈 만큼이나 피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찰리는 고모의 집을 향하며 피트에게 말한다. “말썽만 안 피우면 고모가 지내게 해줄 거야” 그것은 찰리에게는 해당할지 모르겠지만, 피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자동차가 달리는 도시에 피트를 위한 공간은 없다. 피트는 오직 좁은 마구간이나 쭉 뻗은 경마장에서만 살 수 있다. 죽음을 피하고자 출발한 피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잘못된 도착지와 무관하지 않다.
피트의 죽음에 이어 도착한 도심에서 찰리는 배식소를 배회하며 길거리를 전전하는 도시의 빈민이 된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비슷한 처지의 캠핑카에서 사는 남자다. 그러나 그는 술에 취해 찰리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찰리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갈취한다. 뒤이어 찰리는 돈을 되찾기 위해 스패너를 가져와 캠핑카를 두드리고 남자를 내리친다. 스패너를 휘두르는 찰리의 모습은 어딘지 앞서 그의 집에 침입하여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했던 덩치 큰 남자와 닮았다. 앞서 웨이트리스가 이 영화 속 어른들의 하나의 세계라면 폭력과 전쟁을 말하며 ‘웨이트리스’ 없이는 밥조차 먹지 못하는 남자는 또 다른 어른들의 세계이다.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면서도 자기만 믿으라는 말뿐인 찰리의 아버지와 경마대회를 떠돌아다니며 말을 혹사시키는 델 그리고 황야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전쟁을 얘기하는 남자들 역시 그 세계에 속한다. 그들은 웨이트리스로서의 여성에게 기대어 살면서도 어떠한 존중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찰리가 앞서서 폭력의 목격자였다면, 이번에는 폭력의 행위자가 되어 있다. 뒤이어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오래도록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찰리의 모습은 그 남자들의 세계에 본인이 도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담겨 있다. 찰리는 웨이트리스의 세계와 폭력의 세계를 경유하여 고모의 집에 도착한다. 그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한 소년이 본인의 여정에서 본 것은 자신의 장소를 잃은 한 육중한 육체의 죽음이었다. 달리기 위해 태어난 육체가 제 도착지에 닿지 못하고 끝나버렸다면, 소년 역시 달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세계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다.
<로데오 카우보이>에서 손상되어 무력해진 육체는 말의 다리가 철조망에 찢겨 피 흘리기 이전부터 이미 브래디의 황야를 채우고 있다. 어쩌면 카우보이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말 없이 보여지는 무력한 육체이다. 브래디가 자신의 말 거스를 보러 갔을 때 브래디 아버지의 친구 프랭크는 손을 잃어 그 대신 갈고리를 낀 상태이다. 브래디의 상처나 발작으로 잘 쥐어지지 않는 손가락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갈고리를 끼고 있는 남자의 손상된 육체가 갑자기 등장했을 때이다. 그 남자의 손이 실제로 카우보이의 삶과 관련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보여지는 이 순간은 그들의 육체에 깃든 상처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 상황임을 보여준다. 깊은 밤 농담과 함께 브래디를 찾아온 그의 친구들은 브래디를 데리고 황야로 나선다. 모닥불을 피우고 함께 달리며 노래를 부르던 그들이 둘러앉아 각자가 겪었던 사고의 경험을 얘기할 때, 조심스럽게 카메라는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담는다. 짙은 어둠과 모닥불의 그림자로 연출한 카우보이들의 얼굴은 각자가 겪었던 사고의 경험과 어우러져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 이미지를 뛰어넘는 충격은 우리가 레인을 봤을 때 느껴진다. 친구들의 대화에서 세계 챔피언이 될 뻔했다던 레인의 이야기와 함께 재활병원에 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가 갈비뼈나 손이 부러졌을 거라 상상하게 되지만, 뒤이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마비가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레인의 육체이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함의 이미지는 카우보이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순간일 것이다.
영화는 로데오 중 느껴지는 어떠한 흥분도 없이 브래디의 사고 이후를 다룬다. 우리가 로데오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핸드폰의 작은 화면을 통해서 뿐이다. 핸드폰 속 그들은 열렬한 환호 속에 길들여지지 않은 성난 짐승에 올라타지만, 정작 그 좁은 액정을 보는 그들의 현재는 말에 올라타는 것조차 버겁다. 무력한 현재의 시간에서 로데오를 대신하는 것은 말타기를 흉내 내는 몸짓이다. 브래디는 친구에게 로데오를 가르쳐주면서 말 모형에 앉아 힘차게 발을 내 뻗는다. 그리고 레인의 재활 치료에 찾아가 카우보이 옷을 입히고 떨리는 손으로 줄을 겨우 잡게 한 채 당기도록 한다. 그들의 제한적인 몸짓과 정반대에 있는 장면은 브래디가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는 순간일 것이다. 혼자 날뛰던 말 아폴로가 브래디의 명령에 따르고, 브래디가 아폴로를 탄 채 평원을 달리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던 너른 평원과 암벽을 뒤로한 채 함께 달리는 브래디와 아폴로의 모습은 우리가 말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이미지인 동시에 영화의 서사 속 브래디의 한계를 초월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아폴로는 철조망에 걸려 다리에 상처를 입고, 앞서 얘기했던 말의 죽음이 찾아온다. 아폴로의 죽음이 잔인한 이유는 그 죽음의 방식보다도 죽음이 도달한 지점의 역설 때문일 것이다. “말은 평원을 달리기 위해 카우보이는 말을 타기 위해 태어나지”라는 브래디의 말은 아폴로가 죽어야 했던 이유와 브래디가 다시 로데오 대회에 나가려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려는 슬픈 정명이다.
하지만 ‘말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브래디를 다시 로데오 대회를 향하게 하려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하다. 휘파람 소리와 충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며 말이 쓰러졌을 때, 카메라는 거기서 한 발짝 물러나 롱숏으로 그들을 보여준다. 평원은 말이 죽은 공간이다. 동시에 앞서 말했듯 브래디와 말이 함께 달렸던 유일하게 자유로운 순간의 공간이다. 말이 달리던 공간에 죽음이 대신 자리한다. 그것은 말에게만은 아닌 것 같다. 카우보이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곳을 뛰어넘을 때, 그리고 각자가 죽을뻔했던 사고들을 회고할 때, 카우보이들의 위치도 죽음과 멀리 있지 않다. 말을 타는 동시에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이곳은 로데오와 닮아있다. 그곳을 벗어나려던 아폴로는 철조망에 찔려 더는 뛰지 못한다. 가장 자유로운 달리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는 그 평원에서 아폴로는 멀리 가지 못한 채 쓰러졌다. 어쩌면 아폴로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철조망에 찔렸기 때문이 아니라 로데오의 공간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것처럼 로데오의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브래디도 마찬가지이다. 더는 멀리 가지 못하고 동시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브래디는 그곳을 배회한다.
<린 온 피트>의 여정의 끝에 찰리는 마침내 고모의 집에 도착하고, 고모는 언제든 함께 지내자며 따뜻하게 맞아준다. 이렇게 찰리는 자신을 위한 편안한 안식처에 도착한 것일까. 혹은 이것은 찰리의 안락한 미래를 보장하는 해피엔딩일까. 영화의 엔딩 속 찰리의 달리기는 거기에 의구심을 남긴다. 여전히 찰리는 달린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럭비를 계속할 찰리의 체력단련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연 멈춰서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의 표정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 순간 찰리가 떠올린 것은 무엇일까. 웨이트리스의 세계와 폭력의 세계를 경유하여 도착한 찰리에게 이곳이 목적지가 아님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소년은 어른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아직 자신의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 말의 죽음이 알려준 것이 있다면, 목적지를 잃은 이를 향한 냉혹함쯤이 될 것이다. 그곳은 찰리가 아버지와 살던 집에도, 고모의 집에도 심지어 황야에서 비디오 게임을 하던 남자의 집에도 있다는 점에서 어디에나 있지만, 동시에 소년 찰리는 여전히 찾지 못한 채 달리고 있기에 아직은 저 멀리 있는 공간이다. 달리는 소년 찰리에게 ‘어른의 세계’는 그렇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황야에서 고모의 집까지 이어지는 ‘불안의 공간’이다.
<로데오 카우보이>의 끝에 브래디는 로데오 대회에 출전신청을 했지만 포기하고 돌아온다. 브래디는 분명 출전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로데오 대회를 떠나지 못한 채 그 주변을 계속 맴돌 것이다. 영화의 엔딩은 그 맴돎의 연장이자 슬픈 정명을 이은 질문일 것이다. “말은 평원을 달리기 위해, 카우보이는 말을 타기 위해 태어나지.” 그렇다면 달릴 수 없는 말이 죽었을 때, 말을 탈 수 없는 카우보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죽을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화의 엔딩에서 브래디와 레인이 손을 맞잡고 말타기를 흉내를 낼 때, 육체의 한계 앞에 무력한 두 인간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이어지는 말을 타는 브래디의 이미지는 브래디의 상상이자 레인의 상상이다. 동시에 그것은 평원을 달리는 말의 꿈이기도 하다. 평원을 가르는 달음질의 꿈만이 영원히 반복되듯 “우리는 연결돼 있다”고 말하는 평원의 카우보이 친구들은 영원히 카우보이의 세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그 꿈은 결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슬프다. 로데오 카우보이 브래디에게 로데오라는 ‘꿈의 환영’은 그렇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가락만큼이나 ‘무력한 공간’이다.
<린 온 피트>에서 웨이트리스의 세계와 폭력의 세계를 경유한 찰리는 말의 죽음을 통해 ‘어른의 세계’를 향한 불안한 발걸음을 계속할 것이다. <로데오 카우보이>에서 더는 말을 타고 달릴 수 없게 된 브래디는 말의 죽음을 통해 무력한 ‘꿈의 환영’을 반복한다. 영화의 끝에 당도한 그들의 도착지가 서글픈 이유는 그곳이 ‘계속’과 ‘반복’이라는 이름의 끝나지 않을 여정이기 때문이다. 서부를 떠난 말은 그들을 어디로 데려다 주었는가. 그 도착지는 찰리와 브래디의 삶에서 언제나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들에게 가까이 있다. 동시에 그 곳은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부사나이가 돌아가야만 하는 모뉴먼트 밸리만큼이나 아득하다. 육중한 육체의 정지가 안내해 준 찰리와 브래디의 여정은 그렇게 가깝지만 먼 곳에서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