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동 이야기>
<82년생 김지영>에 이어 서영동 이야기도 극사실주의다.
단편인데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는 구조다. 우리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신다면, 그런 치욕을 받아가면서 쥐꼬리만한 급여를 받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하면 마음이 아려왔다. 나와 같은 또래의 실력 있는 구직자가 해외 학위를 받은 날 때부터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경쟁조차 되지 않는 사실을 목격해야 했다.
너무나 적나라하게 한국의 현실을 묘사해서 보기 괴롭기도 했다. 조남주 작가는 우리가 보고 감내해야 하는 그런 현실을 소설에 담았다.
(아래 각 인물에 대한 설명이자 소제목은 출판사 서평에서 가져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서영동 집값이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가의 매매를 위해 대치동 부동산을 이용하는 인터넷 카페 회원〈봄날아빠(새싹멤버)〉
8월 말의 실거래 정보를 보면 지금 내놓은 가격에도 거래가 될 것 같다. 분명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인데 내 것이었던 것 같고, 빼앗긴 것 같다. 용근은 박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파트 관리비를 운운하며 경비원을 향한 갑질을 합리화하는 주민들의 모습과〈경고맨〉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걸까. 유정은 엄마가 본론부터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시간 있니? 여윳돈 좀 있니? 하고 먼저 사정을 확인해서 거절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서야 용건을 꺼냈다.
아, 맞다. 유정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아, 맞다. 한참 주변만 둘러 둘러 맴돌다가 꺼내놓는 진짜 용건.
분할된 화면 안에 공용 현관, 엘리베이터, 주차장 출입구 등이 보였고 화면마다 제각각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유정은 노블엔 출입구의 보안요원들과 안내데스크 직원이 내내 서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일, 가끔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의자가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몰라삳. 유정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엄마의 세계에서 자신만은 ‘그런 엄마’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도 타인의 실체를 알고 나서 묘하게 달라지는 〈샐리 엄마 은주〉의 태도는 분명 불편하다.
궁금한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사실은 있었다. 하지만 아무 소득도 즐거움도 없는 모임이었다.
케이 엄마는 어깨에 살짝 스치는 길이의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았는데 다 넘긴 것은 아니고 한 움큼 정도 자연스럽게 흘렀다. 은주는 그게 어쩌다 만들어진 스타일이 아니라 섬세하게 손질한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장은 샐리 엄머니는 그런 엄마들하고 안 어울려서 잘 모르시겠지만, 하고 은주와 그런 엄마들 사이에 선을 그었다. 기분이 나쁘기도 좋기도 했다.
샐리 엄마도, 새봄 엄마도, 그런 여자들 중 하나로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생활도, 그런 여자들을 둘러싼 만들도, 오해도, 적의도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대체 그런 여자는 어떤 여자고 그렇지 않은 여자는 또 어떤 여자인데.
검소하고 성실한 아버지가 부동산 투기로 돈을 굴린, 개발과 경기 호황 시대의 수혜자임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던 〈다큐멘터리 감독 보미〉
PD들은 못 찍는 거. 자기 얘기, 내부에서 당사자의 시선으로 생생하게 담아내는 그런 거, 살아 있는 거, 현장, 맨얼굴, 속마음, 진짜 목소리. 그런 콘텐츠에 늘 목말라 있거든.
부끄러웠다. 무례한 아버지가, 속물 같은 아버지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버지가, 그리고 그런 아버지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부족한 것이 없이 자랐다. 넘치도록 지원을 받았고, 결혼하고도 부모님에게 기대어 살았다. 게다가 아버지의 속물근성을 까발리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커리어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어쩌면 보미도 다를 바 없는 속물이었는지 모르겠다.
학원장이자 학부모이면서 서영동 주민으로 자신의 학원 옆 노인복지시설 건설을 반대하는 가운데 치매 환자인 어머니를 요양하게 된 〈백은학원연합회 회장 경화〉
경화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엄마의 경차 조수석에 앉아 알루미늄 포일을 조금씩 벗겨가며 김밥을 먹던 기억뿐이다. 어떤 질문도 의문도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엄마가 세운 목표를 위해 엄마가 짜놓은 계획표에 따라 엄마가 선택한 선생님에게 수업을 들었다.
더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하고 찬이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딸각. 잠금 고리 누르는 소리가 방아쇠 당기는 소리로 들렸다.
(치매 의심이 되는) 엄마가 먹거나 씻거나 잘 떄, 아니 일상의 모든 순간들, 그러니까 서고 앉고 발걸음을 옮기고 옷소매에 팔을 꿰고 바지춤을 올리고 변기에 앉는 순간에도 경화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고생 끝에 마련한 아파트값은 날이 갈수록 불어나지만, 이웃으로 인한 가족의 불행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교양 있는 서울 시민 희진〉
가족들은 열심히 집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희진의 모든 것, 45년 인생 최고의 성취, 네 식구의 안식처, 서영동 동아1차아파트 115동 1102호가 이렇게 끔찍한 악몽의 공간이 될 줄은 몰랐다.
... 모두 화이트톤으로 맞추었다. 이렇게 살고 싶었다. 취향에 맞게 식구들에 맞게 집에 꼭 맞게. 연두색 싱크대도, 나무색 방문도, 체리색 몰딩도, 반짝이는 알루미늄 새시도 싫었다. 희진이라고 미감이 없고 관심이 없어서 그냥 살았던 것이 아니다.
‘2030 영끌족, 수도권 아파트 매수세 심상찮아’라는 기사를 보며 끌어모을 영혼도 집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가 느낄 패배감
현재를 소홀히 하며 막연한 미래만을 꿈꿨다. 아영은 입할할 때부터 편입을 생각했다. 4년제 영문학과로 편입하고 해외 어학연수를 가고 통번역대학원에 다니는 자신을 상상하며 수업을 듣고 당장 필요한 등록금과 생활비도 벌었다.
하루하루 재미있고 만족스럽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모이면 불안이 된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며 오늘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연말이면 아무 성과 없이 또 1년이 갔구나 한심한 것이다.
성실하고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들. 씩씩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사람들. 남들 눈에는 작고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자기 세계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살마들. 작은 기쁨을 알고 큰 슬픔에도 담대한 사람들. 조금만, 아주 조금만, 혼자 설 수 있을 만큼만 기회를 주고 응원해주면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끝까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사람들.
혼자 외로웠을 거라고 사장은 말했다. 혼자이면 외로운가? 슬픈가? 불행한가? 잘 모르겠다. 아영은 가족들과 함께 살 때도, 친구가 많을 때도, 동료들과 매일매일 바쁘게 지낼 때도, 뜨거운 연애를 할 때도 자주 외롭고 슬프고 불행했다. 혼자라서가 아니라 그저 세상이 너무 퍼석할 뿐이다.
아영은 문득 무서웠다. 난이 언니가 지난 시절의 자신처럼 느껴졌다. 계획도 있고 목표도 있고 미래도 있는데 지금, 여기가 없었던 시절.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던 시절.
불안하고 우울한 모습을 들키는 일은 위험하다. 그래서 늘 여유 있고 쾌활한 척 생각하고 행동해왔다. 그 노력이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힘들 때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아영은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서영동이야기 #조남주 #한겨레출판사
독서일: 2024.6.26(수)~27(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