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록: <자본> - 백승욱

by 은혜



이 글은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백승욱 교수님이 18년 11월 16일(금)에 <중앙게르마니아 2018: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다시 읽는 마르크스>의 마지막 순서로 ‘자본’에 대해 강연하신 내용을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생생한 현장과 자료를 충분히 담기엔 부족함이 많으나, 함께 사유하고 모색하면 좋을 내용과 질문을 복기하고 공유하고자 이 기록을 배포합니다. 이와 같은 배포는 백승욱 교수님의 의사를 미리 확인하여 진행한 것임을 사전에 밝힙니다. 글은 A4용지 기준으로 18쪽 분량이며, 첨부한 파일을 내려받아 읽으실 수도 있습니다.



자본


강연: 백승욱 · 중앙대 사회학과

필기: 조은혜 · 중앙대 사회학과



반갑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인데, 한 시간이면 엄청난 속도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죠. 제가 올해 9월 게르마니아 토론회에 한 번 왔고요, 처음 시작할 때도 한 번 들어왔는데.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마르크스에 대해서 생각을 다시 해본다는 건 상당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한 시간 동안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해서 어떻게 소개를 하느냐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죠. 제가 작년에 『생각하는 마르크스』라는 책을 썼는데,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관한 나름대로의 제 생각을 적은 겁니다. 그 내용을 풀어서 지금까지 5번의 강연회를 했고요. 당시 하루에 4시간씩 했으니까 총 20시간을 했는데 상당히 시간이 모자라더라고요. 그런데 오늘은 강연 시간이 1/20로 줄어들었어요. 그럼 뭘 얘기할 거냐.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건 지금까지 자본을 어떻게 해석해왔느냐를 요약하는 건 아니고, 앞으로 우리가 자본을 가지고 뭘 생각해볼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자본을 이해해왔던 방식하고 별로 비슷하지 않을 수 있고요, 그런 생각이 낯설 수도 있는데. 어쨌든 우리가 지금 150년이나 된 책 『자본론』을 가지고, 태어난 지 200년이나 된 마르크스를 두고,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건 기존과 다르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제가 준비한 정리 문건을 따라가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200주년 전후를 맞이해서 마르크스 전기가 새로 나오고 있는데요, 흥미로운 건 기존의 마르크스 전기가 주로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나왔다는 거죠. 한 30개에서 40개 정도 있다고 하죠. 그런데 왜 또 전기를 새로 출판하느냐가 논란이 되고 토론도 있었는데. 살펴보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전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최근에 우리나라에 번역된,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라는 영국 역사학자의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대해서는 몇 년 전에 나온 Jonathan Sperber라는 사람의 『Karl Mark: A Nineteenth-Century Life』 책하고 묶어서 많이 평가하는 것 같고요. 이 두 책은 마르크스를 19세기 말로 되돌리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를 지금 다시 불러온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고 마르크스가 얼마나 19세기적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인가, 19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죠. 그런데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책은 1,000페이지가 넘는 굉장히 두꺼운 책인데,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도대체 이 책을 왜 썼을까?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싶기도 합니다. 결론은 마르크스가 틀렸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공을 들여야 할까? 이 생각이 좀 들어요. 읽어보면 마르크스가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정세적으로도 틀렸고, 인간적으로도 잘못됐다, 이게 존스 책의 요지인데. 물론 19세기를 좀 이해할 수 있는 맥락과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품을 들여서 반박했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에 비해서 솔직히 흥미로운 건 비영어권에서 나온 두 권의 전기가 있습니다. 한 권은 스웨덴에서 출판이 됐고, 한 권은 독일에서 출판이 돼서 둘 다 영어로 번역이 되었죠. 흥미로운 건 미하엘 하인리히라고 하는 학자가 쓴 마르크스의 자본 개설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시중에도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분이 집필을 시작할 때는 마르크스에 대해서 약간 이론적인 책을 쓰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전기를 쓰게 됐다고 이야기를 하죠. 두 권의 전기를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까 두 권으로는 마르크스의 청춘기를 벗어나지 못해서 두 권을 더 써야 하는 상황이 된 일화가 있습니다. 왜 쓰느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데, 사실은 지금까지 마르크스를 조명했던 건 부분적이었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잘 조명되지 않았고. 그런 부분들에 들어가는 것은 편지, 저널리즘 글. 마르크스가 50년대에 아르바이트로 기고를 많이 했는데, 그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50년대 정치경제학 비판이 숙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는 얘기고. 하여튼 하인리히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르크스가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전환하고 배우고 전환하는 반복 과정을 거치는데, 그런 반복 과정을 잘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죠. Liedman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결국 여전히 마르크스가 여전히 논쟁적이고, 전기에서도 논쟁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에 대해서 말해보죠. 저는 작년에 책을 내면서 주제를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로 다뤘는데요.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 중요한 방식의 하나는 마르크스가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다’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을 때는 약간 정해져 있는 답들을 우리가 반복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30년 전, 50년 전, 100년 전에 했던 얘기가 지금 똑같이 되풀이돼야 할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하고 물어봤을 때는 방식이 조금 달라지죠. ‘무슨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했는데, 무엇에 대해서 어떻게 도전하려고 했고, 어떤 개념들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려 했는가’라는 것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요. 결국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라는 얘기죠. 마르크스가 어떻게 자기 작업을 해왔는가를 이해하게 되면 그와 더불어서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제 생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어떻게’와 관련해서 마르크스를 지금 다시 불러내고 현재성을 부여하려면 약간 영역을 나눠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워낙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걸 다 묶어서 하는 건 좀 그렇고, 분리시켜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데요. 이건 지난 9월 게르마니아 토론회에서 제가 심플하게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마르크스를 지금 다시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 크게 네 가지 영역을 이야기해볼 수 있습니다. ‘사상사적 의의’가 있고, ‘사회구조 차원’이 있고, ‘사회주의 운동과 주체’가 있고, ‘한국 또는 동아시아의 독특성’이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네 가지 축으로 해서 마르크스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고, 물론 그 속에서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다른 사상가들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마르크스가 중요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씩 주제에 대해 살펴보죠.


첫 번째 ‘사상사’라고 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19세기 말에 마르크스가 왜 중요했느냐를 다시 들춰보면, 그리고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책이 문제가 있지만 그 책을 잘 들춰보면, 또 올해 개봉한 <청년 마르크스>라는 영화를 봐도 그렇고, 마르크스의 위상이라는 것은 19세기에 논의되는 많은 논쟁과 사상의 정점에 있다는 걸 우리가 다시 확인할 수 있는데요. 마르크스는 스스로 끊임없이 도전했고 돌파를 하면서 사상적 돌파구를 열려고 노력했죠. 19세기에 마르크스의 의미가 있다면 그런 것인데, 그러면 21세기인 오늘 마르크스가 다시 의미가 있으려면 마찬가지로 마르크스가 지금 사상의 정점에서 똑같은 도전을 해서 그 도전대로 돌파할 수 있는가? 그 돌파를 해서 우리에게 어떤 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렇게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20세기의 많은 사상적 자원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고. 그 논쟁들이 사실은 알게 모르게 어떻게 은연중에 마르크스를 염두해뒀던 논쟁인지를 볼 필요가 있고. 또 논쟁을 통해서 거기서 여전히 유연성이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러면 한 두세 가지의 쟁점이 있는데요. 핵심은 마르크스가 19세기 사상의 정점이라고 했을 때, 그리고 그게 20세기에도 의미가 있다고 했을 때, 우리가 문제를 세워야 하는 건 하나는 실증주의적으로 해석된 마르크스와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를 불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실증주의적이라는 건 내가 투시해야 하는 어떤 사람을 잡아내서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 같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 마르크스가 서술돼왔죠. 사회주의적인 의미도 있는데, 마르크스를 그렇게만 봤을 때 굉장히 심각한 한계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마르크스를 보게 되면 경제 환원주의자라든지 구조 환원주의자라든지 딱지를 붙이기 딱 좋은 인물인데, 그렇게만 볼 수 없다는 측면이 마르크스에게 있고요.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철학과 경제학의 분할을 고민해봐야 할 텐데. 마르크스를 공부하거나 알아보려고 할 때 전형적인 모순이 뭐냐 하면 한편으로는 헤겔로부터 이어지는 독일 관념에 대해 쭉 공부하고, 다른 한편에서 아담 스미스로 시작되는 영국 경제를 공부해서, 두 가지를 딱 조합하면 마르크스가 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논쟁의 전개는 “마르크스는 여전히 철학자니까 마르크스를 되살리려고 하면 지금 독일 철학을 공부해야 해”라고 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마르크스는 뛰어난 경제학자야, 그러니까 마르크스를 살려내려면 경제학을 공부해야 해. 아담 스미스와 케인즈를 거쳐서 경제학을 공부해야 해” 경제학파와 철학파가 싸우고 그 사이에서 사회학자는 중재하려고 하거나 새로운 영역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게 되는데, 과연 그게 올바른 태도일까?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은 마르크스가 1840년대까지 주로 철학에 대해서 작업을 하다가 1850년대에 정치경제 비판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 철학을 버린 걸까?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철학은 형이상학적 철학과 완전히 다른 걸까? 그렇지 않고요. 마르크스가 자본에 쓴 것에서 중요한 건, 마르크스의 철학 작업이 경제학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경제학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시작되는 건데, 왜냐하면 경제학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범주를 너무나 자명하게 그 자체를 사실로 간주하거든요. 가치든 가격이든 생산이든 모든 범주가 자명하다고 얘기하고, 자명한 범주들 사이의 어떤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잘 아시다시피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요강에 서사를 쓰면서 핵심적으로 제기했던 건 범주의 자명성을 깨는 것이죠. 자본주의 시대에는 생산, 분배, 교환, 소비, 이게 자명한 범주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고요.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 생산, 자본주의적 소비, 자본주의적 분배, 자본주의적 교환이 있다고 얘기하거든요. 자본주의라는 것의 의미는 뭐냐고 묻는 건 철학적 비판인데, 그 철학적 비판의 전제가 이해돼야 경제학 비판이라는 요강도 설명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철학자들은 경제학을 모르고 경제학자들은 철학을 모르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무슨 작업을 하려고 했던 건지 여전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마르크스가 사상적으로 자리매김을 하려면, 철학적으로 하기엔 너무 경제학 지식이 부족하고 경제학적으로 나가기에 너무 철학적 지식이 부족한 어떤 한계를 잘 돌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상적 자리매김에서 무엇보다 출발점에 있는 것은 마르크스가 경제학 영역에 어떻게 개념적 비판을 시작하면서 자기 작업을 전개하는가, 이 하나가 굉장히 중요하고. 또 하나를 이야기하면 아까 말했던 실증주의적이라는 얘기인데.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개념 중의 하나는 totality, 총체성인데요. totality라는 건 루카치로부터 물려받은 개념이고요. 그 이후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더불어서 세계를 뭔가 positive한 totality로 그려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갖거든요, ‘그 완성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저는 그 생각을 버려야 마르크스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고요. 마르크스에게 totality 개념이 있으면 negative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오늘 이야기의 요지죠. 마르크스의 모든 작업은 자본의 총체성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자본의 총체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총체성이 아니라는 거고요. 그런데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자본의 총체성 효과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죠. 이 두 가지는 굉장히 다르거든요. 그러니까 자본의 총체성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만들어온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우리가 볼 필요가 있다고 자리를 잡아야 하는 거죠. 그러면 이 작업은 실증주의적인 어떤 선을 따라가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매우 아슬아슬한 어떤 경계선에 설 것이고요. 그리고 사상사에 더불어서 하나를 덧붙이면 마르크스 연구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마르크스 이후의 세계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만 마르크스를 읽고 나머지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모를 것이라는 착각을 많이 해요. 우리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고, 우리가 그 비밀을 지금 잘 쓰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턱도 없는 얘기라고 보고요.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이 책을 내자마자 엄청난 논쟁이 붙기 시작했고, 이 책을 그야말로 19세기적인 산물로 혹은 퇴물로 만들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됐고, 한편으로 이 책이 너무나 어려우니까 논리적으로 한편으로 역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다가 내부적 논쟁이 전개되고 했는데. 결정적으로 또 중요한 건 뭐냐 하면 “마르크스 이후 자본주의는 마르크스를 인식한 자본주의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 적은 여러 가지 위기의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들이 실제로 마르크스가 살아있던 1870년대 후반부터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 대불황이라고 하는 게 영국과 미국 전체를 휩쓸게 되는데, 그쯤에 마르크스가 사망했죠. 그 이후로 20세기 초에 대불황을 다시 겪으면서 자본주의 자신이 자기에 대해서 자기 인지적인 능력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그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 훨씬 예민해졌다고 볼 수 있겠고요. 그 예민해졌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르크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이는 거죠. 마르크스를 인지한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제기한 어떤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변하면서 변천하고 있고 진화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2008년에 세계 경제 위기가 있었죠. 미국에서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에 내몰리고 했는데, 위기의 파장을 비교해보면 1920년대 대불황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관리가 되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왜 관리될 수 있었는가? 누가 제일 기여를 했는가? 라고 한다면 가장 큰 기여는 마르크스가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앞서 말했던 totality와 관련된 질문입니다. 자본주의가 자기에 대해서 살펴보는 방식은 마르크스가 거기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방식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는 얘기고요. 그렇다면 마르크스 이후의 모든 발전이 마르크스를 염두하지 않았을 수 없는데, 그게 단지 논리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어떤 시스템을 전개해갈 수밖에 없었던 어떤 역사였다고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사상사들과의 대면이라는 것도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마르크스가 질문을 제기했으나 그 세계가 질문을 자기 안으로 흡수해서 그걸 상대화했으니까. 그러면 『자본론』이 출간된 지 150년이 된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라고 했을 때 중요한 건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어떠한 질문과 그 비판의 길과 실제로 자본주의 역사가 스스로를 자기 반성적으로 변천시켜 왔던 것이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니고요. 그 사이에서 다시 위기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게 증폭이 되죠. 그러니까 그 위기라고 하는 것은 일단 recursive하고 reflexive하다는 것. 자기를 계속 되돌아보면서 발생하는 위기이지 자기에 대해 무지한 위기는 아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이 책을 썼을 때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에 무지한 자본주의로부터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 20세기를 지나서 21세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지 않은 자본주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가 발생하죠. 그게 마르크스와 무슨 관계인지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건 뭐냐는 얘기인데. 제가 체계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요. 마르크스가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버만 등의 사람들을 인용하면서 “모든 것을 다 녹여서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세계, 세계를 동질화시켜버리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건 세계가 아주 비슷해지고 이질적인 것들이 전부 동질화되는 세계”와 같은 표현을 많이 쓰죠. 그게 근대의 특성이라는 얘기도 많이 하고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고. 사실 사회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근대가 동질화되는 이유는 뭘까에 대한 질문인데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동질화되느냐? 뒤르켐은 유기적으로 동질화되고, 베버는 합리화로 동질화되고, 마르크스는 자본 축적으로 동질화된다고 봤다면 그 질문 자체를 우리가 다시 해봐야 하는데, 도대체 동질화는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 라는 얘기입니다. 왜 발생할까? 이질적인 것이 어떻게 동질화될 수 있을까? 라는 얘기죠. 그러면 관념론적이거나 아니면 물리학적이거나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는데. 태초에 모든 것은 원래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있었다고 시작하면 그건 하나의 운동의 법칙이지만 자본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대체로 16세기에 세계적으로 출현했던 것이고 그 이후에 자기 발을 들였기 때문에 굉장히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거든요. 다른 한편에서 이 관념론적인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어떤 원리가 스스로 운동하면서 세계 전체에 확산한다는 겁니다. 헤겔의 절대정신처럼 모든 것에 그것이 변한다는 논리가 있죠. 그걸 단순한 버전으로 만들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근대화론이 있습니다. 근대화론은 후발 비서구 국가들이 근대화로 가는 길은 근대적 가치를 수용하기 때문이라는 거고, 근대화 가치라는 건 생각을 바꾸고 그 생각으로 모든 것이 변하면서 근대 세계가 됐다는 얘기죠. 그건 신의 섭리가 세계를 관통한다는 해석하고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되는 것 같지만 설명되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건 결과에 대한 어떤 그림일 수 있죠. 세계가 동질화되면 그런 가치들이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게 원인이냐? 그 가치가 그걸 만들어내는 원인이냐? 그렇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거죠. 다른 버전으로는 바이러스 버전인데요, 바이러스처럼 전염되는 거죠. 이 전염 버전은 19세기에 대중심리학 등으로 굉장히 열광적인 선풍을 끌었고, 프로이트가 책을 쓰며 이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일단은 전염의 의미는 있으나 전염 또는 모방이라는 것들에 무언가 비어있다는 얘기를 하거든요. 그 얘기를 동일시로 바꾸게 되는데. 동일시라는 건 훨씬 더 메카니즘적이죠. 그러면 전염이 아닌데 전염처럼 번지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죠. 자본주의라는 건 그럼 바이러스냐? 자본주의라는 건 가치의 전파냐?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해서 모든 세계를 자본주의적으로 만들어냈느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여기에서 제가 제기하고 싶은 건 두 가지인데, 하나는 totalizing effect, 그러니까 총체화하는 효과이고, 또 하나는 globality인데. 마르크스에게는 총체화하는 효과가 전 지구를 감싸 안는다는 독특한 사고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원리인데, 이 원리가 운동을 하면서 전 세계를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 감싸 안게 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하는 사고. 이게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 어떻게 법칙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설명될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아볼 수 있는데, 사실은 많은 사회학자가 그것에 대해서 도전하였으나 메커니즘을 설명한 건 아니고 결과를 설명했다고 볼 수 있고요. 그러한 설명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학자를 굳이 찾으면 아주 흥미롭게도 한 명은 마르크스고 다른 한 명은 푸코예요. 저는 그렇게 보는데, 마르크스와 푸코가 totalizing effect와 globality 대해서 어떻게 상보적인 그림을 그리는가? 라는 게 마르크스를 다시 읽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중요한 건 시스템이라는 얘기죠.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다시 해볼 테고요.


세 번째는 사회 운동과 사회적 주체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마르크스의 이야기 중에서 제가 끄집어내서 강조했던 것 중의 하나는 마르크스가 굉장히 모순적인 사람인데 글을 쓸 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쓰죠. 마르크스가 1870년대 초반에 뭘 했는가를 보면. 『자본론』 1권이 67년에 출판되고 2판 개정을 73년에 다시 내는데, 『자본론』 1판 개정을 위해서 가치 형태론에 대해서 아주 몰두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그 시기가 정점기였다가 점점 파장되는 상황에서 버블 전쟁이 일어나고 파리 코뮨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마르크스는 아주 다른 두 권의 저작을 동시에 내게 되는데요. 『자본론』과 『프랑스 내전』입니다. 이 두 권을 동시에 봤을 때 하나가 맞으면 다른 게 맞을 수 없는 관계죠. 『자본론』은 자본이 실질적 포섭으로 노동을 완전히 장악한 세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그 안의 노동자들이 저항하더라도 자본이 다시 통제 가능한 힘을 얼마나 막강하게 갖고 있는가, 그래서 모든 사회적 힘이 어떻게 자본에 집중되는가를 보여주죠. 노동의 모순 속에서 자본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희망을 조금이라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마르크스를 보게 되거든요. 그런데 『프랑스 내전』에서는 파리 코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파리 코뮨을 드디어 발견된 대안,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이행의 계기로 설명해요. 그래서 국가가 소멸하게 되는 계기, 국가의 반국가로의 이행, 거기서 상비군의 해체와 상비 관료제의 소환, 이런 것들을 통해서 국가를 어떻게 사멸시켜가는가를 설명하죠. 이 두 가지 대립이 흥미로운데요. 그러니까 『자본론』을 읽으면 자본주의로부터 이행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그림이 안 나오고, 『프랑스 내전』의 파리 코뮨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이행의 가능성을 보이는데. 흥미로운 건 파리 코뮨이 벌어진 곳은 공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생산 관계와는 다른 정세적 조건에서 인민들이 어떤 시스템에 저항했을 때 어떤 정치적 공간이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얘기고요. 그러면 정작 무언가는 『자본론』에서 이야기했던 어떤 시스템에 타격을 가하는가에 대한 답은 없어요. 그 얘기는 ‘그렇게 가면 될 것인가? 아닌가?’ 이렇게 두 책이 굉장히 모순적인데. 모순적이지 않게 봤던 것은 1917년에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쓰면서 두 가지를 절묘하게 결합해서 ‘당을 통한 혁명의 길’이라는 것을 결합했거든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림이었는데, 정치 혁명을 통해서 시스템을 전환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 수 있고, 출발점에 중요한 게 이행 강령이다, 독점의 몰수와 전국적 회계와 통제에 의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 구도가 그려졌던 것이죠.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두 가지가 모순적이라는 얘기고. 그러면 마르크스에게서 사실 두 개는, 하나는 구조가 있고요. 자본주의는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구조의 힘이고, 그런데 다른 한 편에서 이걸 넘어서려면 구조를 깨려고 하는 새로운 주체들이 있어야 하는 거죠. 두 가지는 동시에 해야 하는데 두 가지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앞으로 알아서 잘 해보세요” 정도 이상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거고요. 여전히 우리한테 남겨진 주제, 과제죠. 20세기 모든 논쟁은 두 가지 추에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해요. 한편에서는 얼마나 시스템은 공고한가? 에 대해서 얘기했다가 주체는 얼마나 자율적인가? 에 대한 내용으로 가게 되는데요. 자율적인 주체가 그 공고화된 시스템을 깰 수 있는가? 그건 68년의 여러 가지 지형에서 만들어지고. 제가 68년을 특히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기점으로 얘기하려 했던 것도, 문화대혁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안티노미나 아포리아가 뭐냐 하면 새로운 정치적 주체와 이미 존재하는 시스템 사이에서의 모순이 생각보다 쉽게 연결돼서 깨지지 않는 것이 발견되고요. 그러면 제일 큰 문제는 뭐냐? 그걸 연결할 때 party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죠. 자,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와 더불어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체란 과연 누구인가. 그런데 주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건 세 가지, 연결되지만 상이한 개념들을 우리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튀세르로부터 제기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고요, 두 번째는 푸코가 그것에 대응하는, 조금 다르게 제시한 담론 구성체라고 하는 개념이고요, 세 번째는 마르크스로부터 연원하는 물신 숭배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연결될 수 있는지, 상보적일 수 있는지가 새로운 쟁점이고. 특히 물신 숭배는 알튀세르에 의해서 강력하게 폐기된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끄집어내는 의미가 있는지를 중요한 쟁점으로 볼 수 있죠, 마르크스를 읽을 때. 저는 조심스럽게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네 번째까지 자세하게 얘기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동양과 서양의 문명 차이가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청년 마르크스> 영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 영화에 대해서 유럽의 학자들은 긍정 반 부정 반의 입장으로 “너무 과도하게 영화화했다”, “너무나 모든 걸 단순화시켰다”고 얘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얘기해요. 여기에서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의 무대는 독일이 아니잖아요. 마르크스는 독일 라인라트 출신인데, 라인라트는 나폴레옹의 영토 확장으로 19세기 초까지 프랑스 영토였던 지역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프러시아가 라인라트를 확보하지만 라인라트 사람들은 정체성의 절반 정도를 프랑스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요.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어를 즐겨 쓰던 마르크스가 프러시아 치하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에 갔다가 브뤼셀로 갔다가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이를 계속 넘나드는 어떤 공간에서 활동하죠. 상호참조가 굉장히 큰데, 18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보면 유럽은 무대가 하나였다고 볼만큼 공존하는 지역이었고요. 프랑스 혁명은 영국 정치경제학을 거쳐서 독일 관념론을 지나 모든 운동가가 모이는 브뤼셀에서 토론을 하다가 다시 각자의 나라에 전파되는 통로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의 사상의 지평이고요. 그런 사상의 지평을 통해서 여러 가지 정치적 형태에 대한 운동과 권리와 담론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죠. 고유한 서구적 맥락이 있는데, 동아시아에서 이 모든 것은 이식됩니다. 이식이라는 것은 굉장히 독특한 번역의 과정을 통해서 전개되고, 독특한 번역은 진공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어떤 부정을 통해서 됩니다. 하나는 일본의 근대국가 건립으로 가는 길이 있고요.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 신해혁명으로부터 계속되는 하나의 길이 있는데. 이 혁명의 길이 유럽으로부터 전파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담론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는가? 수용되려고 하면서 토착화되고 하면서 동양화되고 한편에서는 이질화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가? 문제적이라는 거죠. 그게 점점 문제로 될 수밖에 없는 게, 요즘에 번역이 많이 돼서 서양 철학, 특히 좌파 서양 정치 철학에 대해서 많이 보게 되죠.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 등 다양한데, 그 논의가 한국 사회와 잘 맞을까? 안 맞는 부분도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정치 배경이 없어서 그래요. 그런데 한국에만 없는 게 아니라 한국과 일본과 중국을 전체로 묶는 20세기의 동아시아 정치 지형에 그게 뿌리를 내리지 않았고, 대신 다른 뿌리가 내린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민권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요. 쑨원(손문)이 삼민주의에서 ‘민권, 민족, 민생’이라고 하는 걸 내세우는데 특이하잖아요. 삼민주의인데, 한국에서도 1980년대 한국 운동권에 삼민이라는 조직이 있었거든요. 한국의 삼민은 ‘민중, 민족, 민주’에요. 그런데 쑨원의 삼민주의는 ‘민권, 민족, 민생’이니까 다르잖아요. 핵심은 민주가 없어요. 왜 민주는 없을까? 그게 20세기 동아시아의 매우 중요한 질문이에요. 민주가 없다는 건 권리 담론이 다르다는 얘기고, 그 다름이 지금까지 유지된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고요. 그렇다면 민주와 권리에 대한 토착적 논쟁은 있었을까? 저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제가 최근에 3·1운동 10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3·1운동이 무엇인가에 대해 느닷없이 발표를 하게 됐는데. 문제는 3·1운동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일 수 있다고 봐요. 왜 그러냐 하면 3·1운동과 더불어서 우리나라는 민족에 관한 담론만 남고 나머지는 논쟁이 불가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3·1운동이 있을 당시에 중국에는 5·4운동이 있었는데, 5·4운동은 신해혁명의 급진화로 가게 되면서 ‘민권, 민족, 민생’이라는 게 뭔가라는 것들이 문제가 되거든요. 오늘 시간이 부족할까봐 미리 말씀드리면, 민권은 뭐냐? 쑨원의 삼민주의는 급진주의적인데요. 쑨원은 국민당이고 모택동은 공산당이니까, 쑨원은 보수파, 모택동은 급진파로 생각하기 쉬운데, 모택동은 나중에 글을 쓰기를 자기는 신삼민주의고 쑨원의 적통이라고 했으니까, 뭐가 있었겠죠. 그리고 뭐라고 이야기하냐 하면 신삼민주의에서 민권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를 인정한 이후에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기에 그 위에서 더 나아간 게 민권이라고 해요. 그러면 민생은 뭐냐? 국민당원들이 민생에 대해 잘 모르니까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말하면서, 민생은 쉽게 말하면 공산주의다, 민생이 공산주의인데 공산주의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단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게 민주다, 라고 해요. 그러니까 국민당들은 주로 공산당들에 마음을 활짝 열어서 협력해야 한다는 게 1924년에 국공합작의 입장인데, 특이하지 않아요? 그게 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이었으니까. 국민당이 제기한 논쟁이었고, 국민당이 제기한 논쟁은 국민당 좌파, 이제 장개석이 아닌 왕징웨이 같은 사람이 계승하려고 하고, 한편으로 중국 공산당의 중국혁명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논쟁이 있었을까요? 계기는 있었으나 그 논쟁이 전면화되지 못했는데 그건 식민지라는 상황 때문에 그렇죠. 식민지라는 상황이 이후에 탈피되면서 논쟁의 지형이 한 번 거듭나게 되는가? 참 모호합니다. 1979년까지 다시 봐도 그렇지 않고요, 4·19가 조금 다른 계기이긴 했으나 4·19가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끝난 부분들이 있는데요. 어쨌든 모든 것을 묶어서 보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에 지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급진적 사상들이 갖는 함의는 무엇이었을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런 질문들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를 지금 다시 봐야 하는데 몇 가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첫 번째,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이후를 분석할 수 있는가?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후를 볼 수 있는가란 얘기고요. 그게 어렵죠. 왜냐하면 모든 이론가가 이론을 쓸 때 자신은 그 이론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쓰고 나면 자기가 이론의 일부로 속하게 되는 역사가 만들어지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어려워지고. 그러면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를 읽는 건 단지 마르크스의 포지션만 알게 돼서 읽을 수 없고, 마르크스를 그 역사의 일부로 다시 놓고 고민하는 자원이 필요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걸 한 번 생각해보시고. 두 번째로 『자본론』은 미완성이죠. 아시다시피 엥겔스가 완성했던 거니까 미완성일 거고, 특히 자본 3권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금융 파트인데, 금융이라는 제목 하에서 마르크스가 글을 거의 안 쓰고 발췌만 해놨어요. 중요한 글을 인용하고 앞으로 대담하게 글을 쓰겠다고 했는데 끊어진 과정이 있습니다. 미완성이라는 건 분명한데, 그 미완성이라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완성하면 되는 거냐? 완성을 기다리는 책이냐? 누군가 위대한 학자가 나와서 이 책을 완성하면 되는 거냐?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아예 완성이 불가능한 책이냐? 라는 질문이 있는데요. 사실은 완성이 불가능한 책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열려있다고 할 수 있죠. 왜 완성이 불가능하냐? 그건 뭐, ‘150년 전 책을 어떻게 완성을 해? 세계는 바뀌었는데’ 라기보다는 책의 서술을 고려했을 때 마르크스가 이 책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했듯이 자본 운동의 총체화 효과를 설명하려 하고 있고, 그러면 총체화 효과를 우리가 이해하려 할 때 사실은 이 책이 부족하다는 것이 분명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본론』을 읽으면서 자본론의 한계를 알 때 자본론의 강점도 이해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부정적 총체성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그건 다시 넘어가서 보기로 하고요. 세 번째 질문은 근거가 없을 수도 있고요,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데. 마르크스를 왜 우리가 똑같은 방식으로 꼭 읽어야 해?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읽어도 되지. 『자본론』을 어떤 순서로 읽을까? 『자본론』 읽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제안이 있는데, 아마 지금까지 가장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제안을 한 사람은 알튀세르일 텐데요. “자본론 1권을 1편부터 읽지 마라. 1편 접어두고 2편부터 읽고, 다 읽은 다음에 조금 자본론이 이해될 것 같으면 좋은 가이드를 갖고 1편에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 들어가라. 그렇지 않고 1편부터 시작하면 둘 중 하나가 되기 쉬운데, 책을 접고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거나,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계속 공부해나가면 고칠 수가 없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헤겔을 가지고 마르크스를 이해할 가능성도 있는데, 그런 알튀세르의 지침도 하나의 독해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자기 자신이 집필자니까 ‘나의 관점’에서 완성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책을 썼지만 독자는 그 순서에 따라 책을 읽는 게 아니니까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읽을 수가 있거든요. 이게 하나의 가이드라고 하면. 가설적으로 이런 얘기를 해볼 수 있는데, 『자본론』이 1권, 2권, 3권이 있는데요 핵심은 몇 권일까요? 대부분 1권 앞쪽을 읽다가 끝내고, 2권을 읽으려 했더니 재미없어서 덮고, 3권 일부를 발췌해서 보는 걸로 대충 끝내는데. 이 독서 태도가 나쁘다고 생각해서 강력한 ‘막대 구부리기’ 전략으로, 핵심은 2권이다! 2권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라는 거죠. 보통 1권, 2권, 3권 중에서 가운데가 핵심일 수 있잖아요. 그리고 농담이 아닌 게 서술을 보면 『자본론』 1권은 1865년, 1866년에 초고가 끝납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넘겼어요. 그래서 63년에서 65년 사이에 완전히 작업이 끝나고, 『자본론』 1권은 65년까지 작업했던 것이 1판인데. 2판에서 4판까지로 가면서 1편 수정을 계속 많이 합니다. 70년대 초반까지 수정이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자본론』 3권은 61년에서 63년까지 초고를 쓰다가 63년에서 64년까지 쓰고, 64년에서 65년에 또 초고를 굉장히 많이 씁니다. 최근에 MEGA2라고 해서 마르크스·엥겔스의 전집을 새로 출판하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아직 전집이 없는 사상가죠. 이상한 거예요. 탄생 200년이 됐는데 아직도 전집을 내지 못하고 있어요. 아무튼 그 전집 자체가 사회주의 몰락하고 물려있어서, 돈을 댈 사람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네덜란드에 가 있고, 일본 사람들이 돈을 많이 내서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데, 앞으로 중국에서 돈을 내서 완성될 수도 있는 역사가 있죠. 그래서 마르크스가 쓴 초고의 상당 부분이 발견되고 있는데, 『자본론』은 초고만 봐도 3,000페이지 가까이 되는데, 3,000페이지를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썼느냐? 거의 10,000페이지 가까이 썼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도 10,000페이지를 쓰는 과정에서 밸런스가 굉장히 안 맞는데, 아까 말한 3권은 최근에 미국에 있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프레드 모슬리가 64년과 65년의 『자본론』 3권 초고를 영어로 출판했어요. 3권을 편집을 할 때 엥겔스가 고심을 엄청나게 많이 하게 되는데, 처음에 다시 쓴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금융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고 마르크스의 생각도 아니까 이 책의 완성본을 만들자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전히 한 판을 새로 쓰다가 결국엔 판을 포기하고 초고로 편집해서 출판하게 되거든요. 받은 게 있고 뺀 게 있는데 그 버전하고 마르크스 스스로 마지막에 남긴 3권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게 최근의 논의이죠. 그런데 마지막 버전이 『자본론』 1권이 출판되기 전에 3권이 완성됐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3권이 제일 먼저 끝났고, 그다음에 1권을 썼고, 그다음에 2권. 『자본론』 2권의 서문을 보면 엥겔스가 여러 가지 초고를 갖다 쓰는데, 마르크스 『자본론』 초고들은 대체로 60년대 초반에 몰려있습니다. 1권도 그렇고 3권도 그런데, 2권 초고만 거의 1870년대 초고를 써요. 그리고 1870년대 마르크스가 거의 한 달 중의 보름은 의자에 누워서 지냅니다. 간 경화가 심해서 황달이 와서 쓰러져 있다가 약간 기운이 돌아오면 다시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이후로 누워 있다가 그걸 반복하게 되는데. 그 시점에 집중적으로 썼던 건 『자본론』 2권이거든요. 그러면 왜 마지막에 2권에 그렇게 집중했을까는 중요한 질문인데, 이럴 수 있죠. 그 당시에 회계 제도나 이런 게 덜 발달해 있었고, 마르크스가 친구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친구가 멀리 떨어져서 살게 된 게 60년대부터이고, 친구 도움을 받아서 회계 제도를 중심으로 자본의 유통에 썼다, 그런 구분도 있을 수가 있는데 어쨌든 심혈을 기울여서 2권에 대해서 뭔가를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거죠. 그런데 2권은 왜 중요한가를 보면, 2권의 이야기는 자본의 순환으로 시작하는데. 자본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죠. 화폐 자본, 생산 자본, 상품 자본이 있습니다. 화폐 자본은 가장 자본주의적 형태인데. 그러니까 이자를 낳는 자본처럼 돈을 줬는데 이윤이 생기지. 그러면 그 목적이 자기 증식이라는 걸 보여준다는 건데, 문제는 재생산되지 않아요. 끝나면 순환이 이어지지 않아요. 생산 자본이라고 하는 건 자본주의 속성을 제일 잘 보여주는, 실물적으로 가치가 만들어지는 공간에서의 자본이고, 그건 재생산이 끊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계속 이어진다는 걸 보여줘요.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다 개별적으로만 순환하는 자본으로 이해된다는 거죠. 하나의 자본도 순환하고, 다른 하나의 자본으로 생산자본으로만 순환하는데. 『자본론』 2권은 상품 자본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해요. 상품 자본은 왜 그러냐 하면 이미 가치를 가지고 가치가 증식된 자본이 실현되어야 하는데, 실현은 혼자서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실현된다는 것은 네트워크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자본이 연결되었을 때만 실현되죠. 그래서 『자본론』 2권은 총자본의 전제를 다룹니다. 『자본론』 1권에서는 자본 일반이지만 하나의 개별 자본처럼 보이는 하나의 추상적인 자본을 이야기하는데, 『자본론』 2권에서는 모든 자본을 이야기하고 그 모든 자본은 서로 물려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생산을 하면 생산한 원료를 조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누군가는 판매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와서 재고를 가질 것이고. 순환이 연결되어서 동시에 돌아갈 때가 움직이고 운동하는 시스템이죠. 그건 굉장히 중요한 얘기거든요. 그러면 2권의 핵심은 뭐냐 하면 자본은 일단 서로 순환해야 하고, 순환의 고리는 물려있어야 하고, 이걸 생각하려면 바운더리를 생각해보고. 어떤 공간에서 공간 없이 완전히 열려있으면, 다시 말해 바운더리가 없으면 순환이라고 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런데 그 바운더리 안에서 대체 무엇이 진행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하고요. 바운더리 안에서 이쪽과 저쪽이 안 맞으면 거래가 틀어지거나 이윤이 실현되지 않거나 화폐가 축적되지 않거나 하는 문제가 생겨요. 자본주의에 위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본주의 위기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모든 자본이 물려서 한 번에 돌아가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마르크스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없어요. 고전파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고,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유일하게 생각을 해냈는데, 당시에는 근대적인 회계 제도가 아직도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국민 계정이라는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닌 어떤 시점에서 이야기를 한 거죠. 그렇게 해서 2권은 시스템에 대한 얘기인데요.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기 완결적으로 자연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려면 2권의 후반부에 가서, 일부는 생산 부분, 그러니까 이게, 생산재 생산 부분하고 소비재 생산 부분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서 교환되어야 하냐는 재생산 표식에 대한 얘기도 해요. 부문이 나뉘고 개별 자본들이 나뉘는 전체가 물려서 돌아가는 어떤 자본주의가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인데, 그렇게 봤을 때 1권은 그 자본주의가, 가치라고 하는 것들이 어디에서 연원하게 되고, 사회적이라는 것은 어떻게 추론하는가, 또 착취는 왜 발생하는가의 연원을 보여주고요. 3권에 가서는 그 자본들이 구체적 자본으로 나눠질 때 어떤 구체적인 동학들이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거죠. 2권을 중심으로 『자본론』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경향들을 볼 수 있게 되고. 그때 2권의 『자본론』은 굉장히 추상적인 자본인데, 150년 전에도 그렇게 돌아갔지만 지금도 그렇게 돌아가는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품 자본, 화폐 자본, 생산 자본은 물려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재생산되어야만 하는 거죠. 수치상 물려서 돌아가야 하고, 수치상 물린다고 하는 것들은 어떻게 보이냐라는 걸 우리가 보면 그건 중앙정부의 재무부나 재경부 등에서 뭔가 수치로 조정하는 이유와 모든 곳에서 회계 장부를 가지고 회계를 조정하는 것을 보면 수치를 맞게 하는 거예요. 수치가 맞는다는 건 마르크스 이야기 사이에서 고리를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자, 이렇게 일단 이야기해보고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체계라는 질문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본론』 2권이 핵심이라고 했지만 2권을 이해하려면 1권 1편의 가치형태를 이해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난해하냐.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을 대입하는 게 아니라서 그렇죠. 1권 1편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인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경제학자들이 가진 관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 이런 걸 자꾸 생각하시면 마르크스 생각의 핵심은 노동가치론이고 노동은 만물의 근원이고 그야말로 귀중하다, 그런 것이 마르크스 생각의 핵심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걸 지켜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마르크스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를 지키는 거죠. 남의 동네에 가서 남의 집을 지키는 게 되는 이상한 일들이 벌이게 되는데. 마르크스 이야기의 핵심은 뭐냐 하면, 마르크스는 많은 논지를 짚는데요, 고전파 이야기가 맞다 치면 그런데 왜 그게 화폐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실현돼야 하느냐? 라고 질문하거든요. 그렇게 가치가 그 자체로 맞으면 화폐가 뭐가 필요해? 가치 그 자체로 교환하면 되지. 그런데 실제로는 화폐에 의해서만 교환되어야 하고,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화폐가 사실은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죠. 이상한 세계인데. 고전파가 그걸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고전파 개념의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렇고요. 개념의 핵심인 가치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문제적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 문제 핵심에 뭘 봐야 하느냐. 넘어가서 일단 먼저 뒤를 보면, 우리가 『자본론』을 읽을 때 넘기는 것 중의 하나가 초고 부분이죠. 또 하나 중요한 건 마르크스가 원래 6부작의 원대한 꿈으로 자본 일반에서 세계 시장까지 모든 것을 쓰려고 했는데. 국가와 세계 시장, 세계 무역 시장을 쓰려고 하다가 이건 접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 자본의 일반에 대한 것인데. 1, 2, 3권하고 원래는 4권까지 출판하려고 했다고 하죠. 1권은 개별 자본, 2권은 유통, 3권은 총 과정, 4권은 경제학설사에 대해서 쓰겠다고 얘기했고요. 4권을 잉여 가치와 학설사로 기획했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것을 엥겔스도 완결하지 못하고 죽었어요. 마르크스의 유고집 편집을 위해서 독일 사민당의 뛰어난 청년 두 명이 투입되는데,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입니다. 그런데 카우츠키가 원고를 들고 튄 다음에 독자적으로 출판을 해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원래 뜻과 무관한 『경제학설사』라는 게 출판이 돼서 이게 애매한 겁니다. 마르크스가 『잉여가치 학설사』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왜냐? 정치경제학 비판을 생각했는데, 1권부터 3권까지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이 잘 안 보이고요. 마르크스가 어느 날 갑자기 득도해서 “내가 일필지휘로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보여주리라” 쓴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건 불가능하고. 기존의 정치경제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개입해 자기 개념을 계속 발굴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면 그게 어디 나오는가? 초고들에 나오죠. 초고가 집대성된 건 『잉여가치 학설사』 책이고, 그 책이 『자본론』 1권과 2권을 합친 것만큼 두꺼워요. 아마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안 나왔죠. 그런데 특이하게도 남북한 대치 상황에, 저작권도 없던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어떤 출판사에서 북한판을 가져와서 『잉여가치 학설사』 1권과 2권을 출판했습니다. 나머지 한 150쪽 정도는 출판이 안 됐어요. 이 책의 내용은 주로 무엇인가 하면 1/3은 아담 스미스에 대한 비판이고요, 1/3은 리카르도에 대한 비판이고, 나머지 1/3의 절반은 리카르도 학파의 소멸, 그리고 나머지 1/3의 절반은 이른바 진보적 경제에 대한 비판입니다. 요점은 스미스에서 리카르도로 고전파 경제학이 계승되는데 리카르도 이후에 리카르도 후계자들은 왜 리카르도 이론을 폐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 그 리카르도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다른 편에서 어떻게 보면 대중 경제학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가? 이걸 이야기하고, 이 사이에 정통파의 이단아로서 멜서스 같은 사람이 뭘 보여주는가라는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들은 『자본론』을 통해 잘 드러나지 않는 고전파 경제학의 맹점의 핵심들을 잘 짚어주는 측면이 있죠. 크게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본주의적 소유의 관념’이고요, 다른 하나는 ‘체계’라는 관념이고, 또 하나는 ‘생산적 노동’이라는 관념이에요. 이 세 가지가 『자본론』에 나오긴 하지만 설명이 잘 되어있는 건 아닙니다. 생산적 노동이란 굉장히 논쟁이 많은데, 마르크스는 심플하거든요. “생산적 노동이란 이윤을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생산적이다” 그러면 당장 비판이 나오죠. 가사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니까 생산적이지 않단 얘기인가요? 당연하죠. 왜냐하면 이 규정은 자본가들이 내는 규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중요한 건 속성적인 특징이 아니고 비속성적인 관계적 특징이라는 걸 굉장히 강조해요. 그러니까 스미스는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가치를 만드는 노동이 생산적이라고 보는 측면이 있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걸 만드는 게 생산적이라는, 이 두 가지를 왔다갔다해요. 마르크스는 두 번째는 틀렸고, 첫 번째는 맞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적 소유와 구분되는 ‘자본주의적 소유’라는 관념이 굉장히 중요하고요. 세 번째는 ‘체계’인데. 체계는 아까 말했던 거예요. 고전파에서는 재생산하는 관점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이 물려서 하나의 시스템으로서의 경제가 등장하는 어떤 시대라는 관념이 없고, 경제학자 전체를 둘로 봤을 때 유일하게 이 연결선을 그려서 순환의 도식을 보는 건 케네가 유일하다고 하거든요. 케네의 경제표를 가져와서 연구하는데, 케네의 경제표는 굉장히 심플한 도식이거든요. 소비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6개 줄에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마르크스는 “그게 얼마나 창의적이냐! 고전 경제학파, 스미스 머리에는 그게 없다”고 얘기하고요. 달랑 그거 하나로부터 『자본론』 2권의 복잡한 도식들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1870년대에 훅 간 건데. 그만큼 1870년대까지 경제학은 재생산이라는 것을 일종의 대상들, 혹은 폐쇄적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약했던 거거든요. 왜 약했냐면 그다음에 3번째 소유라는 관점이 중요한데.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핵심은 “자본주의의 핵심은 사적 소유가 아니다”라는 데 있어요. 저는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모든 사회주의자의 오류, 또는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에게 가진 가장 심각한 오류는 “자본주의의 핵심은 사적 소유다”라고 생각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사적 소유 철폐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사적 소유는 철폐가 잘 안 되잖아요. 그래서 무슨 배우자도 공유하겠다고 하고, 숟가락도 남들과 같이 쓰라는 거냐? 등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 책 전체에서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건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소유는 다르다”라는 거예요. 아담 스미스의 책 전체는 모든 소유를 사적 소유와 동일시하고 있고, 그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적 소유와 어떻게 다른가를 보지 못한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뭐가 어떻게 다르냐? 사적 소유는 쉽게 말하면 생산물에는 투여한 노동시간만큼 들어간다는 얘기가 기본적 문간입니다. 예를 들어서 연필 만드는 데 10시간의 노동이 들어가면 1,000원. 그런데 옆에 동네 사람들이 숙련도가 떨어져서 20시간 들였으면 2,000원이죠. 그러면 그게 말이 되나? 마르크스는 이런 얘기고요. 왜냐하면 사적 소유 세계에서는 말이 돼요. 동네마다 균일하지 않은 노동은 시간에 비례해서, 일종의 투여된 노동에 따라서 가치를 부여받게 돼요. 그래서 마르크스가 단순 상품 생산이라고 말하고, 그게 사적 소유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의 소유는 다른 특성을 갖는데, 제일 중요한 점은 상품이 투여된 노동의 시간에 비례해서 가치가 형성되는 게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는 투여된 노동과 무관한 건 아니라는 게 있죠. 그런데 그 문제를 고전파들이 해결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고. 왜냐하면 소유의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어떻게 다르냐 하면 우리가 말하는 소유의 대부분은 로마적 소유관이고요. 로마적 소유관은, 어떤 희소한 물건은 배타적 소유의 물건이에요. “이 탁자는 내 거야!”라고 소유권을 내가 갖는 순간 다른 사람들은 쓸 수 없어요. 소유관을 가진다는 건 배타적 점유, 배타적 처분이 가능하다는 거거든요. 거기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물건, 동산, 토지, 인간까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시대에는 노예와 여성도 소유의 대상이었어요. 처분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독일권의 전통도 계속 나와서 우리나라 민법도 그 소유권을 갖고 있는데. 근대적 소유관의 핵심은 로크에서 출발하고, 로크에서 출발한 소유관의 핵심 문제는 희소한 자원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증식되는 새로운 것에 대한 소유입니다. 그게 곧 노동의 결과물이에요. 우리가 노동을 하면 무언가가 새로 만들어지죠. 그런데 처음에는 땅에서부터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노동을 경유하고 뭘 심으면 가을에 수확이 생기는데, 자연의 산물을 매개로 해서 인간의 노동 결과물이 증식돼요. 그러면 증식된 무언가는 누구 거냐는 거예요. 일하지 않은 지주 거냐? 그건 아니고, 자연의 산물이니까 일한 사람들 것인데. 자연에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일한 자들이 나눠 가지면 되죠. 그게 중농주의의 생각이고요. 중농주의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어떤 성과들이 생산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데. 고전파는 중상주의에서 중농주의로 넘어가면서 노동이 농업 아닌 공업에서도 어떤 가치를 낳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보통 부가가치라고 불리는 것들이 만들어지는데, 만들어지는 건 누구 거냐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로크는 거기까지 가게 되면 굉장히 머뭇거리고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로크는 중농주의자이기 때문에 토지의 수확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지는 희소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토지가 희소하지 않은 건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래서 <파인 어웨이>라고 옛날에 유명했던 영화가 있는데요, 가서 깃발을 꽂으면 자기 땅이 되는 세계에서 로크적인 가치관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공장에선 안 되잖아요. 공장에서는 내가 노동해서 내것이 아닌 게 만들어졌는데 누구 거냐고 하는 것들의 분배가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정치적인 결정이 날 수밖에 없고, 사회적인 해방이 되거나 사회적인 권력이 될 수밖에 없죠. 그게 고전파의 세계거든요. 그래서 자본주의적 소유는 앞선 소유하고는 매우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에 대한 소유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고, 이때 소유의 핵심은 property인데, 이 property는 appropriation이라는 걸 가져야 해요. 그걸 소유로 만들려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내 걸로 만들려는 대상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이게 참 이상한 세계가 되고요. 그래서 그다음에 나오는 세 번째만이 강조가 안 되지만 중요한 마르크스의 언급은, 『잉여가치 학설사』에서 나오는 중요한 핵심인데.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는 사회적인 동시에 가상적”이라고 얘기해요. social하고 imaginary하다. 여기서 라캉적인 구도가 보이는데요. 라캉이 마르크스를 읽었으니까 그렇게 훌륭해질 수 있었겠죠. 이 얘기는 뭐냐면, 사회적이라는 건, 그러니까 사적 소유 세계에서의 가치는 사회적이지 않아요. 개별적이에요. 그런데 자본주의 소유는 가치가 사회적으로만 결정이 돼요. 그리고 두 번째는 imaginary. “여기에 얼마의 가치가 있냐?”는 건 “얼마나 쓸모가 있냐?”고 묻는 게 아니에요. “이건 1,000원이다”라는 건 1,000원의 가치는 imaginary라고 하는 것인데, 사회적 협약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사회가 여기에 1,000원의 가치가 있다고 해서 결정한 것이지 그걸 현미경으로 분석한다고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 전제가 왜 중요하냐 하면 마르크스가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세계는 한편에서는 자본주의가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인데, 자동적으로 보이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 물어보면 절대로 자동적이지 않죠. 우리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사회적인 협약에 따라서 특정한 자들이 가치에 대해서 자기의 몫을 가져가도록 어떤 룰들이 만들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죠. 그래서 자본주의의 핵심은 소유이고, 소유가 매우 중요해요. 그 소유란 자본주의적 소유이고 자본주의적 영위여야 하는데, 노동자들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귀속되지 않고 자본가에게 귀속되기 위해서는 독특한 소유의 구성을 가지고 있을 때만 작동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느냐? 그게 다음으로 말하려는 내용입니다.


훌륭한 여러 학자의 품을 빌어서 간단하게 세 가지 도식으로 자본주의 운동을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아까 2권의 의미에서 자본은 어떻게 운동을 한다고 얘기했죠.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자본이 증식되고 자본이 축적되는데, 축적되는 독특한 원리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적어도 세 가지를 핵심으로 봅니다. 가치 법칙, 잉여가치 법칙, 재생산의 법칙인데요. 이 세 가지는 수식어로 굉장히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가치 법칙은 새롭게 만들어진 노동의 총합이 그해 생산물의 새롭게 만들어진, 뭐라 할까요, 국민소득의 총합으로 되죠. 하나는 화폐 통합으로 말할 수 있고, 하나는 노동시간의 통합으로 말할 수 있는데, 두 가지 사례에서 호환될 수 있는. 수식으로 치면 이건 거시적 차원에서 일치한다고 할 수 있고요. 두 번째 잉여가치 법칙. 이 도식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하나는. 잉여가치는 노동시간이 길어질 때, 임금률이 떨어질 때, 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날 때, 세 가지 경우에 늘어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가 절대적 잉여가치, 나머지가 상대적 잉여가치의 법칙이라고 이야기했던 부분이 되겠고요. 세 번째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나와 있는데, 결국 마지막에서 세 가지 변수가 있는데, 자본생산성이 올라가면 이윤율이 올라가고, 노동생산성이 올라가도 이윤율이 올라가고, 임금율이 떨어지면 이윤율이 올라가는 어떤 과정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자본주의의 운동, 자본의 운동은 사실 이 룰에 따라서 진행되게 되어있다는 거죠. 사실 마르크스가 설명하려는 이 시스템 자체의 운동은 생각보다 되게 심플한데, 중요한 건 자본가들이 이 기준을 가지고 시스템을 스스로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조금은 엇나가게 발생하게 되는 거겠죠. 그리고 마르크스가 1860년대에 『자본론』을 썼을 때와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는 많이 달라져 있어요. 케인즈도 있고, 거시경제들도 있어서. 이 시스템은 어떤 위기들이 또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자기 준거적인 기준을 가지고 시스템을 계속 굴려요. 굴리는 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하진 못하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치유할 수 있고 연기할 수 있고 해소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는 프로이트 비유와도 잘 맞는데요. 프로이트에게 증상이 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증상이 있다고 해서 바로 죽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거든요.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하고요, 엉성한 의사를 만날 수도 있고, 친구와 상담을 해서 어떤 조치들을 취하죠. 그런데 약간 Self-reference가 되어서 자기한테 피드백이 되는 영향들도 자기가 자꾸 바꾸게 되는데, 바꾸게 되는 효과 하나는 치환이 될 수 있고 부분적 치유가 될 수 있고 연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소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계속 지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문제가 증폭돼서 폭발할 수 있어요. 그런 가능성들이 있는 거거든요. 여기서도 이 시스템 문제의 핵심은 이게 Self-reference를 가지고 마르크스 시대와 굉장히 다르게 자기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려면 강제적으로 뭔가를 계속 인위적으로 맞춰야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쪽이 망해야 할 걸 저쪽이 망하게 할 수 있고, 이쪽의 것을 저쪽으로 옮길 수도 있고, 이것들을 계속 맞춰갈 수 있는 reference를 가진 시스템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시스템이 계속 진화해가면서 형성된 독특한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는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시스템 자체가 계속 돌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시스템이 어떤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조건 위에 놓여 있는가를 잘 들여다보는 것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겁니다. 자, 마르크스 한편에 시스템이 있고요, 시스템이 놓여 있는 조건들이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 자본들이 운동하는 시스템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위기를 구분해 썼는데. 첫 번째로 운동 자체의 위기가 있습니다. 자본 운동의 위기, 축적의 위기가 있어요. 축적이 안 되는 거죠. 그걸 마르크스가 가치 법칙, 잉여가치 법칙,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의 법칙에서 나왔던 거고, 두 번째는 자본 운동에서 발생하는 위기가 있습니다. 자본이 운동하면서 치명적인 위기들을 우리에게 주죠. 우리 삶에 주는 위기들, 자본주의 체계가 초래한 위기가 있고요. 세 번째는 그 자본 운동을 지탱해온 메카니즘의 위기라는 게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시스템에서 보이는 건 첫 번째인 자본 운동만 보이고, 자본 운동의 자기 메카니즘적인 위기만 보이는데, 이게 무엇 위에 서 있는지는 잘 안 보이죠. 그 위기는 이 표면에서만 나타날 수 있지만 사실은 위기가 다른 표면에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의 삶의 위기가 해결되는 것과 자본의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똑같은 얘기가 아니거든요. 자본의 위기를 해결하려고 우리의 삶을 피폐화시킬 수도 있으니까. 더 피폐화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가보려는 시기도 있고, 더 피폐화시키는 방식으로 가보려는 시기도 있겠죠. 이 그림이 생각보다 복잡하겠지만 제가 보려는 마르크스는 이런 겁니다. 아담 스미스는 이게 negative한 totality인데, 자본주의에 대해서 시니컬하게 어떤 단점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글이 얘기하는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그래서 자본주의는 허구적인 게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힘이, 원래 노동에서 기인했던 사회적 자본의 힘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옮겨온 어떤 자본의 힘이 지구 끝까지 글로벌하게 팽창하면서 총체화하려는 어떤 힘으로서 자신을 작동시키는 자기의 공간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자본의 입장에서 봤을 때만 자본을 이해할 수 있는데. 자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본은 끊임없이 총체화된 걸로 보이죠. 그리고 자기 작동적으로 보여요. 그래서 체계로 보이는데, 체계라는 이야기는 생물학 체계에서 왔고요. 흥미로운 건 자본의 현상학, 자본의 계보학에선 이게 체계처럼 보인다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본은 스스로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처럼 작동해 보이고 실제로 그렇게 가요. 그런데 마르크스 얘기는 사실 이게 체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체계처럼 보이게 만드는 강제적 효과 속에서 몇백 년을 굴러온 것이지. 그래서 사실은 그런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폭력과 제도가 작동할 때만 그게 체계로 보여요. 그게 어떻게 다르냐 하면 우리가 보통 체계라 했을 때, 생물학에서 움베르또 마뚜라나 같은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는데요, autopoiesis나 self-organization, 생물학의 세포는 어떤 방향 없이도 자기가 세포 증식을 해나갈 수 있어요. 그랬을 때 마르크스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자본은 세포처럼 증식하는 거냐? 그렇게 보이죠. 그러면 첫 번째 질문은 왜 그렇게 보일 수 있고 왜 그런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 그 질문이 중요하고요. 두 번째는 사실은 그게 세포가 아니라는 것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서술을 동시에 할 수 있느냐? 저는 불가능하다고 보고요. 서술이 이중화돼야 한다고 보는데, 한편에서 자본이 자본의 입장에서 어떻게 자기 증식에 가까운 것을 서술하는 동시에, 두 번째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하는 걸 다시 서술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위기는 이 두 가지가 연결되는 어떤 과정에서 설명되는 거죠. 그 구도를 한 번 생각해보죠.


그 구도를 흥미롭게 확장하기 위해서 푸코를 소환하고 푸코와 마르크스의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수십 년간 사람들이 시도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했던 대화인데, 요즘 푸코와 알튀세르 유고집이 많이 나오니까 대화가 불가능한 건 아니겠다고 생각하고요. 대화의 중재자로서 누구를 데려오는가가 중요한데, 저는 아리기나 월러스틴 같이 세계 체계를 분석했던 사람들을 동원하면 의미 있는 연결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요. 푸코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푸코의 대담집을 보면 『광기의 역사』를 썼을 때 자신이 독자로 삼았던 것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을 위해 쓴 책인데, 그들이 완전히 무시했다고 해요. 왜 자기 책을 읽고 토론을 안 해주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이해할 수 있죠.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푸코의 많은 이야기는 마르크스에 대한 숨겨진 레퍼런스로 읽어 볼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많은데요.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출발점은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데, 예를 들어서 꼴레드 주 프랑스 강연 중에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읽으면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거든요. 거기서도 totalizing effect와 globality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미시 정치만을 이야기한 것처럼 하다가 통치성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이걸 왜 섞어서 얘기할까 싶지만 푸코가 보는 근대 세계의 근대적 권력은 어쨌든 규율 권력과 통치성이 모든 것으로 확장돼요. 똑같은 질문이 있잖아요? 규율 권력과 통치성은 전염병이야? 아니면 그 이면의 확장이야? 어떻게 확장되느냐는 이야기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답을 가지고 있는데, 마르크스는 이쪽 편에서 푸코는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염두하고서 반응하는데, 마르크스 이야기는 자본 운동이 세계 끝까지 팽창하는데 그건 세계 시장의 원리에 의해서 팽창하게 되어있다는 거예요. 푸코는 반대쪽에서 이 규율 권력과 통치성이 세계 끝까지 팽창하는 것은 국가 간 체계의 원리, 그러니까 전쟁에 의해서 팽창한다고 말하죠. 푸코 이야기의 핵심은 주권 권력의 위기에서 주권 권력의 이행에 여러 가지가 나타나게 되는데요, 인종주의와 인종 투쟁으로 넘어가는 계기 속에서 규율 권력과 통치성이 등장하는데, 그 통치성에서 안전의 핵심은 외치와 내치에요. 안보와 보안, 치환,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만들어지는 어떤 국가의 환상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그게 월러스틴이나 아리기가 말하는 국가 간 체계의 로직들이 자리를 잡는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라는 것은 세계 전체를 동질화하게 되는데, 동질화의 원리는 이중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 축적의 운동 자체가 이 세계의 시스템에 의해서 그 세계를 하나의 세계 경제로 만들어가는 게 있는데, 이 세계 경제로 만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제도적 기반인 국가들 사이에서의 경합이라는 게 있죠. 반면에 푸코적인 틀 속에서 안전장치로의 세계 팽창이 등장하는 것은 국가들 경합 때문에 일어나고, 전쟁이라는 문제의 무대인데, 이 무대는 과거와 다르거든요. 국가 간 체계에서 전쟁이라는 무대 때문에 모든 국가를 전형적으로 규율 국가인 동시에 통치성에 관한 관리 국가로서 등장하게 되는데,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원리는 이게 근대 자본주의로의 세계 경제 때문에 등장한다는 거죠.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반대를 서로 레퍼런스로 삼고 있지만 구현을 동시에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있고요. 두 사람이 바운더리에 대한 얘기를 했거든요. 세계 경제는 세계 경제지만 세계 경제를 생각하는 어떤 자본 운동이라는 바운더리라는 게 분명히 있어요. 국민 계정이든 헤게모니 국가든 무엇이든 바운더리가 있어야 하는 거고. 푸코에게도 통치성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바운더리가 있습니다. 이건 statistics가 등장하는 과정에서도 확인됩니다. 통계가 수립돼야 하는 어떤 범위를 산정하고 통계의 대상에 대해서 생명 정치가 관리돼야 하는 공간에 대한 얘기인데, 왜 이런 공간들이 두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근대적 방식으로 캐치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이야기고요. 이 두 사람을 제외하면 총체화와 글로벌리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는 얘기입니다. 효과는 분석하지만 이 메카니즘에 대해 분석했을 때 이 둘만큼 짝이 될 수 있을까 싶고요.



자. 그러면 이렇게 마르크스를 다시 본다는 것이 갖는 함의는 뭘까요? 마르크스가 생각한 자본주의 이후라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복잡하고 모호해진다는 거죠. 자본주의가 한편으로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낸 거죠. 그리고 그 시스템은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를 계속적으로 만들고 변천시키고 진화시켜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의 시스템이 쭉 변화해 왔던 것인데, 그 표면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은 근대적인 소유, 그러니까 자본주의 소유 관계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영유 제도와 그것이 소유권을 만들어내고 있는 어떤 시스템들이 계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관계들이죠. 거기에서 우리가 캐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사회적인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이고.


제가 책에 썼던 것들, 사회적이라고 부른 것은 inter-subjective 하지 않거든요. 사회학에서 보통 사회적인 것을 inter-subjective하다고 얘기해요. ‘상호작용에 의한 합의’식으로. 하버마스가 좋아하는 어떤 세계를 우리가 사회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하는데. 마르크스는 사회적이라는 표현을 매우 독특하게 쓰고요. 마르크스가 특수한 것과 일반적이라는 대립 구도를 많이 씁니다. 자본에 대해서도 ‘일반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써요. 일반적 특성이라는 말을 많이 하다가 60년대로 가게 되면 생각을 바꾸면서 자본으로 들어오게 되면 ‘사회적’이라는 표현을 집중적으로 쓰죠. 그리스에서 등장했던 ‘일반적’이라는 것이 『자본론』에 오게 되면 집중적으로 ‘사회적’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마르크스가 표현하는 ‘사회적인 것’의 핵심이 뭐냐 하면 노동의 사회화. 사회적인 노동으로부터 집단적 노동의 특징이 자본으로 전도되면서 자본의 힘으로 발현되는 것. 물신 숭배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이 발현되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 근대주의 사회 비판에서 핵심적인 것으로 우리가 복원시켜야 할 만한 단어는 이 ‘사회적’이라는 단어에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이 매우 역사적으로 특수하죠. 그건 무엇에 대비되느냐? 공동체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대비시키는데, 그러면 이 사회적인 것을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는 방식이고, 그러면 사회적인 것을 어떻게 할 거냐? 대체할 것이냐? 아니면 전환시킬 것이냐? 이런 과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관계들’이라는 것들이 만들어지는 매우 독특한 어떤 관계를 우리가 봐야 하는데, 그게 『자본론』에서 보면 1편에서만 나오지 않고요, ‘기계와 대공업’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고, 핵심적으로 ‘금융’으로 들어가면 되겠죠. 제가 『생각하는 마르크스』 책을 쓰고 나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뒤늦게 깨달은 게 있는데, 최근에 발리바르가 쓴 책에서 ‘inter-subjective 하지 않고 inter-objective한 관계’라는 표현을 썼는데, 물신 숭배가 핵심이라는 거죠. 그런 개념을 저도 하나 미리 썼으면 좋았을 텐데, 이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inter-objective와 social의 관계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적인 것 속에 살고 있지만 사회적인 것일 수 없거든요. 그 딜레마가 굉장히 많고. 그런데 그게 매우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관계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다시 푸코를 보면 푸코한테 과연 사회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고 생각하면 비슷한 느낌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 사회에 들어와 있는 어떤 통치성 대상으로서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관계, 바로 권력 관계죠. 그 권력 관계가 발현되는 방식들이 결국 독특한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점에서도 마르크스와 푸코 양자는 공유하는 게 있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죠. 그러면 답이 뭐냐? 답이 잘 안 보이죠. 마르크스를 잘 또는 열심히 읽는다고 당장 답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사람들은 당장 답을 찾으려고 했으나. 다만 마르크스의 사고로부터 돌파점들을 많이 찾을 수 있는 것 같고요, 다른 누구보다도 마르크스가 그런 강한 힘을 훨씬 많이 준다고 생각해요. 마르크스와 더불어 생각하는 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들의 근육을 붙이고 탄력을 붙이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볼 수도 있고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우리가 마르크스에 대해 조악하게 생각해서 “자본주의가 나쁜 거라고 얘기했어. 자본주의 삶이 힘들다고 얘기했어” 이러면 뭐, 굳이 마르크스까지 필요하겠냐는 생각도 들고.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건 자본주의가 그렇게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은 굉장히 정교한 시스템들로 더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마르크스를 배운 사람들이 그걸 더 잘 쓰고 있다는 거죠. 그러면 마르크스가 “내 책을 읽어라” 했던 사람들은 150년 관점에서 자기 책을 읽고 있고, “내 책을 읽지 말라”고 한 사람은 현재적 관점에서 마르크스를 보고 있는 이 사회에서 과연 마르크스가 소생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요. 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야 하는데. 돌파가 가능하냐? 가능하겠지만 돌파할 수 있으려면 그 정교함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처음 했던 얘기로 돌아가면 이런 건데요,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관해서 민권과 민주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단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일단 우리나라에 헌법 논쟁이 없다는 생각은 당연히 차치하고. 유럽의 모든 논쟁은 사실 헌법 논쟁인데, 헌법 논쟁이 없는 뿌리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에 소유권 논쟁이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소유권에 대한 근거가 뭐냐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지금 유교 국가인가? 기독교 국가인가? 그렇지 않으면 막 나가는 국가인가? 도대체 무슨 정치 철학에 근거해서 현재의 소유권이 어떤 방식과 어떤 근거로 작용하고 있고, 어떻게 제한될 수 있고,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은 가능하지 않은지.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로마적 소유권과 다른 경제적 소유에 대해서 논쟁을 해봤는지? 없었잖아요. 왜 논쟁이 없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좀 다른 것 같아요. 동아시아에서의 위상도 다른 것 같고, 자본주의를 고민했던 방식도 다른 것 같고. 그 자체를 순전히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고요. 논쟁한 적 없는 쟁점들이 분명히 있다 보니까 많은 것에 대해서 놓치는 경향도 있고, 더 정교화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를 어떤 사상의 정점으로 다시 놓고 자본주의 운동의 핵심에 둔다는 것은 우리의 고민들을 뭉뚱그리지 않고 훨씬 더 정교하게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되돌아보고 역사적 깊이를 심화해보는 데 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의응답 마무리 발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잃을 게 많아서 24시간을 가동해 절대로 안 놓치는데,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은 싸우다가 정이 들어서 뒤풀이를 하고, 다음날 보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그리고 미래는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주관적 의지주의로 세계가 돌파되지 않는데. 이런 거예요. 비판하는 자들은 저 체계가 언젠가 무너지면 그때 개입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나 기득권자들은 이 체계가 당장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에. 시스템에 대한 관리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엉성해 보이지만 어쨌든 관리가 된다고 하는 부분들은 관리되는 것이죠. 그러면 관리와 감별 쪽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도 우리가 고민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200주년을 맞이해서 마르크스를 다시 열심히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이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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