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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Jul 25. 2019

이렇게 개운한 웃음은 처음이야

너를 위해서라도 웃고 싶어

애인을 만나는 동안 내 신상에는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적엔 드라마 피디를 꿈꾸며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는 대학생이었고 다음으로 기업체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이었다가 일반 기업의 회사원이 되었고 그리고는 퇴사 후 대학원을 준비하는 입시생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드라마 피디가 되었든 재무부라거나 기획부의 신입사원이 되었든 심리학과 대학원생이 되었든 어딘가에 들어가 무엇이 되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 들어가려는 곳에 맞춰 똑같은 사람을 다르게 설명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몇 번씩 고쳐 쓰고 매번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영원히 준비생의 삶을 사는 것만 같았던 그 시절.


다시 드럼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처음으로 지원한 대학원에 떨어진 직후였고 다시 입시 준비를 시작해야 했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드럼 스틱을 잡아 본 지는 5년이나 지나있었다. 서랍 한편에 넣어놓은 스틱을 발견할 때마다 한 번씩 만져보면서도 이미 너무 멀어진 기억이었다. 다시 배우겠다는 굳은 의지 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문득 드럼 수업을 알아보고 10회 치를 한꺼번에 등록하는 과정은 동물이 본능적으로 살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언론사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서 두 번째로 드럼을 배우게 됐다. 드럼 앞에 한 사람이 앉고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서면 꽉 차는 방에서 토요일 아침마다 드럼을 배웠다. 선생님이 오늘치 내용을 가르쳐주고 나가면 그 방에 혼자 앉아 드럼을 치는 시간이 좋았다. 못 쳐도 괜찮았고 이렇게 세게 쳐도 되나 싶게 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친 드럼 소리에 나 혼자 놀라며 한 시간 동안 드럼을 마구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개운해져 있었다.


드럼 연습실을 나오면 그 앞에서 애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인은 내가 그렇게 웃는 걸 처음 본다고 했다. “나랑 있으면서 이런 웃음 보인 적 없잖아요?!” 귀엽게 질투하면서도 그는 덩달아 즐거워했다. 아니, 나는 그냥 애인이 반가워서 웃은 것뿐인데. 약속 장소에 서 있는 그를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나니까 그저 웃은 건데. 정말 평소와 달랐나?



애인은 내가 드럼 치는 걸 좋아했다. 당신을 위해 내가 무얼 할까요, 물으면 내가 스스로 행복하면 된다고 답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도 행복할 수 없고 내가 행복하면 그도 행복하다고 했다. 가끔은 나 자신보다도 더 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라도 스스로 행복하고 싶었지만 그건 자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나를 거칠게 대할 때, 얼마나 나쁜 생각을 하고 얼마나 나쁜 기분이 되든 마냥 나를 방치할 때, 세상에서 나를 가장 미워하고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나 자신일 때, 그는 곁에서 슬퍼했다. 나의 참혹한 기분을 그에게 그대로 전염시키는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게 물어왔다. 드럼은 언제 치는 거냐고, 지금 드럼을 치러 가면 안 되냐고, 그게 안 되면 연습 패드라도 두드리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그럴 때면 나는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늘 마음을 졸이고 괴로워하는 내게 애인은 말했다. “당신은 항상 힘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당신 삶이 그래요.” 말은 고맙지만 나도 문제예요. 아니, 내가 바로 문제예요. 자기 비하와 비관을 약간의 객관적인 사실과 섞어 말하는 나. 나를 할퀴는 나의 말을 누구보다도 깊이 믿는 나. 그런 나를 보는 애인. 힘든 사람 곁을 지키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인 걸 안다. 그래도 애인은 단 한 번도 나를 타박하거나 다그친 적이 없었다. 손을 잡고 언제까지나 등을 쓸어주었다. 마음을 다독여주고 가끔은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또 언제는 모든 걸 잊고 머리에 바람이 통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드럼을 치고 나오는 나의 개운한 웃음에 그가 그리 기뻐했던 것도 그러고 보니 아주 그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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