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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태웅 Apr 03. 2017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를
떼어낼 수 있는가

해외 유명 미니멀리즘 에세이 번역 연재 #4

더욱 풍성한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기 위해, 미니멀리즘에 대한 해외 인기 에세이들을 번역해 싣고 있습니다.

물론 사이사이에 다시 필자 본인의 생각과 이야기도 쓰고 있고요.

※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번역상 작은 오류들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해외 유명 미니멀리즘 에세이 번역 연재 #4

제목: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를 떼어낼 수 있는가

원제: Stuff

출처: http://www.paulgraham.com/stuff.html



    나는 가진 것도 참 많았다. 뭐, 대부분의 미국인 또한 그렇지만... 솔직히, 생활 형편이 좀 더 나쁜 사람일수록 가진 것은 더 많아 보이기도 한다. 낡은 차량들로 가득한 마당을 갖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미국에선 흔치 않으니까.


    물론 역사적으로 늘 이래 왔던 건 아니었다. 소유라는 게 흔치 않고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도 찾아본다면 그 증거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예를 들자면, 케임브리지에 있는 내 집은 1876년에 지어졌는데, 그 집 침실에는 옷장이란 게 없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옷장이 아니라 서랍장을 썼고 그 규모에 맞게 물건들을 소유했던 것이다.


    심지어 고작 수십 년 전의 경우만 하더라도 물건을 많이 갖고들 살지 않았다. 내가 당장 1970년대의 사진들만 봐도 나는 얼마나 그 공간들이 텅텅 비어있는지에 놀란다. 내가 꼬마였던 시절 이야길 해보자. 기억 속의 나는, 커다란 장난감 자동차 세트를 가진 복 받은 아이였다. 하지만 요즘 내 조카들이 갖고 노는 것들을 보면 나는 절로 겸손해진다. 내 매치박스(70년대 유행한 장난감 모형 차 브랜드) 세트는 당시 내 침대의 1/3 가량의 공간을 차지할 정도였다. 자부심? 아주 가득했다. 그런데 오늘날 조카들의 방에는 이제 침대만이 유일하게 장난감이 없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물건이란 건 점점 저렴해져 왔지만, 우리의 태도는 그에 맞게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늘 소유물에 대해서 과도한 가치를 부여한다.


    그게 문제가 되는 타이밍은 바로, 내가 돈이 떨어졌을 때이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에도 물건은 여전히 가치 있어 보이므로, 본능적으로 나는 그것들을 사 제끼기 시작한다. 게다가 친구들이 이사 가고 나면 분명히 가구들을 물려주고 간다. 혹은 쓰레기 버리는 요일 날 밤에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발견하기도 하고. (거기서 “상태 완전 좋음”이라고 쓰인 가구를 발견한다면 늘 주의할 것!) 아니면 창고 대방출이라고 시가의 1/10 가격으로 파는 걸 찾아낼 때도 있다. 집에 물건들이 쌓이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기실, 이런 공짜 - 혹은 공짜나 다름없는 물건들이 특별히 사장이 선심 써서 그 가격인 것은 아니다. 정말로 그 물품들이 그만큼의 가격 수준으로 가치가 떨어진 것이리라. 결국 내가 집에 들인 대부분의 물건도 가치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내가 실제로 필요해서 구입해 놓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 구입한 물건이 당신에게 주는 ‘가치'라는 게, 얼마나 할인받아 샀다는 만족감에 있지 않다는 걸 그땐 몰랐었다. 순수하게, 가치란 얼마나 그 물건으로부터 뽕을 뽑아 먹는지에 달려있었다. 물건이란 건 극도로 비유동적인 자산이다. 그 말인즉슨, 당신이 중간 유통업자처럼 싸게 사서 더 싸게 팔아 차익을 얻을 심산이 아니라면, 그 물건에게 가치란 순수하게 ‘사용’함으로써 얻는 가치를 말한다. 그러므로 즉시 그 물건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 이후로도 쭉 물건을 사놓고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말씀.


    물건 파는 회사들은 우리가 항상 “그 물건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어마어마하게 광고하고 세뇌시킨다. 그러나 열심히 광고할수록 우리는 그 물건이 가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할 수 있다.


    흠. 생각해보면 무가치한 물건은 단순한 무가치함보다 더 안 좋은 결과를 물고 오는 것 같다. 당신이 물건을 집에 쌓는 순간부터 그 물건들이 당신의 주인 노릇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부부는 일에서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이유를 물어보니 고향에 내려가면, 지금 갖고 있는 물건을 둘 공간을 살 여력이 없다고 한다. 그들에게 집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 집 물건들의 소유인 것이지.


    극도로 짜임새 있는 공간 배치를 하지 않는 이상, 물건들로 가득 찬 집은 실제로 그 안에서의 삶을 매우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뭔가로 가득 뭉쳐있는 공간들은 당신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명백한 이유 하나를 알려주겠다. 물건을 위한 공간이 많을수록 사람을 위한 공간은 줄어든다. 그러나 더 안 좋은 사실 하나. 내 생각에 인간이란 지속적으로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살핀다. 그 환경에 맞춘 사고 방식(mental model)을 구축하려는 것인데, 그 공간이 소유물 때문에 어지럽고 부족하면, 면밀한 분석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스스로 삶에 대해 생각하는 에너지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복잡한 방은 문자 그대로, ‘지친다’. (이런 의견은 또한, 왜 복잡한 방이 아동들보다 어른들에게 특히 스트레스인지를 설명해준다. 아이들의 사고는 그렇게 깊지 않다. 아이들은 자신의 환경에 대해 성인들보다 거칠고 조잡한 사고방식을 구축한다. 그러니 그들에겐 에너지 소비가 적을 수밖에.)


    소유의 무상함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내가 1년 정도 이탈리아에서 살 적이었다. 당시 내가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이라곤 커다란 백팩 하나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두 미국의 임대 하우스 다락방에 보관해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장 아쉬웠던 게 뭐였는지 아는가? 고작 두고 온 책 몇 권 정도였다. 그 1년의 여행이 끝날 무렵 나는 내가 그 다락방에 무엇을 쌓아두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깨달아 놓고도 현실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도 나는 그 짐들을 버리지 못했었다. 어떻게 그 멀쩡한 전화기를 버릴 수가 있겠는가? 아마 훗날 필요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 시절을 돌이켜볼 때, 실제로 제일 부끄러운 것은 내가 그 쓸모없는 물건을 쌓아두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다만 내가 평생 쓰지도 않을 물건에 처절하게 돈을 써가며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난 왜 그렇게 살아왔을까? 생각건대 그 이유는 물건 파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말 정말 난 놈들이기 때문이다. 수년간 물건 파는 일로 먹고살았던 회사들에게 25살 무렵의 소비자들은 쨉도 안 된다. 그 회사들은 손쉽게 “쇼핑”을 즐거운 레저 활동 정도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시절 꽤나 쇼핑에 염세적인 사람이었기에, 서른 줄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 장사꾼들의 술수가 먹히기 시작했지만... 이런 장사꾼들에게서 당신을 보호할 방법이 있을까? 생각만 해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럴 때 꽤나 쓸만한 방법이란, 구매 직전에 늘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게 내 인생을 눈에 띄게 바꿔줄 수 있을까?”라고.


    내 친구 중 하나는 옷을 살 때, 습관적으로 되뇌는 말을 통해 충동구매로부터 자길 지켜낸다. “내가 이걸 늘 입을 수 있을까?” 그녀 스스로 그렇다 확신이 안 설 때는 옷을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 다른 종류의 소비에도 잘 먹힐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무언가를 사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내가 이걸 ‘지속적’으로 쓰게 될까? 아니면 단순히 멋져서 사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할인하니까 사고 싶은 걸까?


    이런 관점에 있어서 가장 한심한 물건이란, 너무나 고급 져서 사용할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겠다. 집집마다 갖추고 있는 “굿 차이나 시리즈(동양식 접시 세트)”가 대표적인 예시. 그 접시들의 가치란, 사용할 때 즐거움이 아니라 얼마나 안 깨뜨리고 잘 보관하느냐에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허나 명심해야 할 건, 애초에 깨질 우려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란 없다는 점이다.


    물건 사재기에 저항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전체 비용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걸 소유하는 것에 대한 ‘모든’ 비용 말이다. 사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그로부터 최소 몇 년은 더 비용으로서 고려해야 한다. 가끔은 당신의 남은 수명까지도 고려 대상이다. 그 시간 동안의 관리비, 유지비 등을 계산하는 것이다. 당신이 갖고자 하는 모든 물건은 당신으로부터 에너지를 빨아먹는다. 물론 몇몇은 그 비용보다도 당신에게 많은 걸 내어줄 것이다. 그것만이 소유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나는 이제 물건을 사서 쌓아두기를 멈췄다. 책에 대해서만 빼면 말이다. 책은 다른 사적인 물건들보다 더 유연한 성격을 갖기에 예외로 두겠다. 궤변 같다면 내 설명을 들어보라. 각기 다른 수많은 종류의 책을 갖추는 것은 그닥 불편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책이 아닌 각기 다른 종류의 물건들을 수천 종이나 갖춘다면? 당신은 그 동네 대표 또라이로 여겨질 것이 뻔하다. 그러니 딱 책만을 제외하고서 나는 이제 물건 소유하기를 멈췄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정신적으로 불교적 해탈을 경험해서 이렇다고 일장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더욱더 세속적인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역사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이며, 나는 그걸 알아챘을 뿐이다. 물건들이 가치 있다고 평가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20세기 중반, 산업화된 나라들을 필두로 음식 분야에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식품 가격은 점차 저렴해졌고(상대적으로 우리가 부유해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패스),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는 것이 너무 적게 먹는 현상보다 심각한 사회적 위험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제는 식품 분야를 지나 물건 소유 자체의 지점까지 이 문제가 확산됐다. 대부분의 사람들 - 그들이 가난하든 부자이든, 이제 모두에게 소유물이란 큰 짐 덩어리로 전락했다.


    글쎄, 그 현상에서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소유물이 삶에 있어서 짐이라는 걸 모르고 산다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하다는 거 정도? 하지만 우리는 이제 상상할 수 있다. 수년 동안 5파운드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걸어오다가, 그것들을 갑자기 떼어낼 때의 행복함을 말이다.


- Paul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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