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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e Deadly Venom Apr 19. 2021

멍청한 AE는 좀 떠나라

대행사 마케터들에게 고한다

"그 선배 대행사 갔어? 와... 어쩌다?"


한때 에디터 업계에서는 "대행사"가 마치 유배지처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광고주에게도 '을'이 되어야 하고, 매체 기자들에게도 '을'이 되어야 하는, 그런 을 오브 을이 바로 대행사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맨날 대접만 받다가 어느 순간부터 같은 직종이었던, 혹은 한참 까마득한 모 잡지 후배 에디터에게 "기자님~"하고 아양을 떨어야 하는, 그런 나락의 길이었다.


하지만 잡지 시장이 사양가도를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대행사의 위상이 조금 달라졌다. 대행사 직원들은 광고 대행사, 광고 마케팅을 전문적으로 하는 '홍보 솔루션'을 제공하는 인력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쉽게 말해 광고주가 돈 천만 원을 주면, 그 천만원 안에서 300만 원을 받아먹고, 나머지 700만 원으로 다른 잡지사에 광고를 넣든, TV 광고를 넣든(700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네이버 메인 배너 광고를 넣든(이 또한 어림도 없지만) 홍보 전략을 짜는 일을 한다. 슬픈 일이지만 유튜브와 SNS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자연스레 파급력을 잃은 잡지사는 대행사에게도 '깍두기'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예산을 손에 쥔 순간, 잡지사 기자에게 '돈'으로 갑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참 "기사 좀 써주세요(공짜로요)" 하며 질을 하던 대행사 직원들이 잡지사에 '돈'을 지불하는 순간 갑을이 뒤바뀐다는 얘기다. 대행사 직원(이하 AE라고 칭한다)들은 "나는 너희 회사에 돈을 지불했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콘텐츠를 제작해 줘"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일단 (하기 싫지만 회사 일이니까) 에디터가 광고 기획을 전달해 주면, AE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1. "기자님, 잘 지내셨어요? 오호호! 마침 기자님이 이번 저희 광고 담당하신다고 들었어요. 기획안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다만 고객사가 조금 올드하다 보니, 일부 텍스트에 대한 이해도가 좀 부족해요. 해당 부분만 수정 좀 부탁드려요!"

2. "안녕하세요. OOO커뮤니케이션즈의 OOO입니다. 고객사에서 이번에 수정 요청하신 내용을 저희 쪽에서 정리하여 전달드립니다. 기획안에 써 주신 텍스트는 다소 가벼운 감이 있어, 톤 앤 매너 맞춰서 다시 작업 부탁드립니다"


둘 다 '요청'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다르다. 과거의 에디터들이 '되기 싫었던' AE는 전자였지만, 지금의 에디터들이 절대 되고 싶지 않은 AE는 후자다. 빌빌거리느냐, 당당하느냐의 차이냐고? 절대 아니다. 후자가 진상이고 아니고의 여부를 떠나, 후자처럼 감 떨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례로 이런 사례가 있었다. 내가 몸담은 조직은 10대-20대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는 매체를 보유 중인 광고대행사였는데, 이 채널에 홍보를 넣는 기업들은 꽤 돈도 있고, 이름도 있는 기업들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그런 기업들. 그리고 해당 기업들의 마케터 내지는 대행사 직원들이 광고 콘텐츠 제작자인 우리 팀과 자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구조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로 광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이 우리 채널에 광고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젊은애들이 많이 보잖아" 그래서 우리 에디터들은 열심히 기획한다. "무야호" "제모옥은 일단 OOO로 하겠습니다 근데..." "어, 이쁘다(최준)" 등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온갖 드립과 유행어를 활용하며.


그리고 야심 차게 메일을 보내면, 약 이틀 뒤에 연락이 온다.


"무야호"가 무엇인가요?"

"아, 네.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무한도전의..."

"무한도전 그거 아직도 하나요? 끝난 걸로 아는데"

"네. 근데 이제 다시 유행을 타는 장면이..."

"고객사에서 이 텍스트는 사람들이 잘 모를 것 같아서 기획을 바꿔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아... 네"


처음엔 설득하려고도 했었다. 근데 설득을 하면 할수록 내가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용어에 대한 설명을 하면, "어디 나오는 용어인가요" "OO커뮤니티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OO커뮤니티가 뭔가요?"


이딴 식이니 말이 통할 리 없다. 예전 모 잡지사에서 에디터 일을 할 때, 내가 인터뷰를 진행했던 모 영화감독은 "대화가 통하는 것은 사전 지식 공유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내가 사전 지식이 없어서 멍청한 질문을 계속 하다 존나 털렸기 때문이다. 이러니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적인 문제는 설득이 아닌 한쪽의 멍청함에 있다.


그리고 결국 나는 해당 AE의 요구대로 "OOO 강추! OOO한 사람들 헤쳐 모여! #대외활동은 #OOO가짱 #지원하자" 같은 엿같은 광고를 만들어서 디자이너에게 제작을 요청한다. 쪽팔리는 순간도 잠시, 광고가 집행되고 일주일 뒤에는 AE에게 불만 섞인 토로를 들어야 한다. "우리 광고 효율이 왜 이렇게 떨어지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 때문이지 이 감 떨어지는 새끼야.


광고는 트렌드와 떨어질 수 없는 업종이다. AE는 스스로 광고를 기획하지 않더라도 하청을 주는 업체의 제안이 옳은지 아닌지 트렌드를 기반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책 펴고 필기하는 공부가 아닌, 콘텐츠와 트렌드를 끊임없이 습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소규모의 대행사일 경우 이런 경향이 심하다. 대기업쯤 되는 큰 규모의 조직에서는 자사의 직원들에게 뭐라도 더 시키기 위해 트렌드 그룹을 운영하기도 한다.(그리고 작은 조직에서도 잘하는 AE들은 오래 걸리지 않아 이름 있는 대행사 혹은 업체 마케터로 이직한다)


혹시나 기획서를 보고 생소한 단어나 유행어, 혹은 '트렌드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뭣도 모르면서 퇴짜 놓지 말고 콘텐츠 제작자에게 물어보기라도 하자. 그저 앵무새처럼 광고주의 입이 되어 광고주와 제작자를 연결해주는 것이 본인 소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빨리 이 업계를 떠나는 것이 본인에게도 회사에게도 행복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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