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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도빈 Sep 02. 2022

애주가의 변명

애주가의 변명


 보기와 다르게 나는 애처가다. 그는 (드물지만)실재하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여전히, 각별히,  아내를 사랑한다. 보고 먹고 느끼는 모든 즐거운 순간에 아내를 떠올리는 사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번 새긴 붉은 마음 꿋꿋이 지켜내는 한 떨기 민들레 같다고나 할까. 영원을 지향하는 ‘가’도 붙었으니, 파뿌리 되다 백골이 진토 한 들 시들 수 있으랴. 진정한 군자의 호연지기, 그것이 애처가다.

 한편 또 다른 그는, 아내 치하에 자유를 박탈당하고 고통과 오욕의 날들을 살아간다. 맹목적인 충성과 의무만이 남아 후회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견뎌 내지만, 감히 반항 혹은 독립을 품을 수 있으랴. 순화한 언어로, 사랑의 노예(hogu of love)라 할까. 이것을 공처가라 한다.

 그러면 애공처가는?.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상관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자 그대로 애처가의 근본은 ‘사랑愛’, 공처가는 ‘두려움恐’이니까. 마키아벨리도 주장했지만 사람이 사랑받으면서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남편은 민들레이면서 호구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두려움이 뭐냐 사랑이 뭐냐, 그걸 말하자면 석 달 열흘을  쓰고도 결론 없을 테니 그대 마음에 물어봐 주시길.

 아무튼 다시 정리해 봐도 나는 애처가다. 자꾸 강조하니 강하게 부정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그것도 자랑이라고 쓰고 있는 거냐면, 아니다. 사실 술 얘기를 하고 싶었다. 왜, 술 이라니 미소가 번지고 입안에 침이 도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애주가다. 또한 제목에 적었듯 나도 그렇다.

 입 아프게 상술한 것과 유사한 차원으로 애주가는 ‘애’ 를 기반으로 하기에 맹목적인 사랑을 추구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그냥 생각이 난다. 관심과 좋아함을 넘어서는 그것, 사랑이다.

 그럼 공주가는? 두렵다. 그럼 멀리하면 되겠지만, 웬만한 자유 의지로 그게 되겠는가. 맞다, 중독. 알코올의 생리적 끌림, 그 날의 분위기가 만들어 내는 몽롱한 유혹, 무용한 낭만, 그런 것들에 이끌려 어슬렁대다 보면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세 병 되는 뻔한 괘도를 뻔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명백히 자연스런 현상인데, 스스로 그러함을 행복의 출발이라 주장하는 나 같은 치에게, 그래서 술은 필요조건인가 보다. 우리는 행복해야 하니까.

 그런데 중독을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단군이래 우리의 어머니가, 아내가, 딸이 경고했듯 때론 그 끝이 참담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육체를 보면 알 수 있다. 후... 숨이 찬다.

 아무튼, 나는 애주가다. 그런데 동시에 공주가 이기도 하다. 아니, 앞서 애와 공은 공존할 수 없다 하지 않았는가. 마키아벨리까지 들먹이면서. 그런데 술이 뭔가, 상식을 넘어 우리를 모순의 세계로 인도하는, 그것이 술이다. 분명 그저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내일이 두렵다가, 또 사랑하다가, 다시는 술을 못 마시게 될까 두렵다가, 다시 막 사랑하다가, 아내가 두렵다가, 마지막 한 병 더 외치다가, 아내를 영영 못 보게 될까 두렵다가.

 애로 시작했지만 공을 거쳐 다시 애로, 다시 공으로. 이처럼 뻔한 괘도를 왔다 갔다 한다. 이처럼 애와 공을 무한 반복하는 것, 이것을 ‘술의 진자’라 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주정뱅이가 된다.


 그래서 나는 어제도 술을 마셨다. 오늘도 먹고 사느라 파김치가 되어 버린 주정뱅이는 술 앞에 앉았다. 소주를 들이킨다. 술 한 잔에 사건은 흐려지고, 두 잔에 사실은 멀어져가고, 석 잔에 너를 떠올리다가, 넉 잔에 내 시야도 희미해지고, 다음 잔에 육체는 무거워 진다. 이런 자연스러움, 나도 조금은 행복해 지는 것도 같다. 슬슬 진자의 괘도로 진입한다. 

 그런 김에 2차로 단골집을 찾는다. 나는 꼬막무침을 먹고 싶었지만 재료가 소진되었다는 주인장은 라면을 끓여 오겠다며 힘 빠진 주정뱅이를 주저앉힌다. 몇 잔이나 오갔을까, 그렇게 진자운동이 충분해질 즈음, 두려움도 극한에 달아, 사람은 마침내 정다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은 공주가의 발현이다.


 그리고 오늘. 그 대가로 하루 종일 숙취에 시달리다 이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이렇게 쓴 글이 온전할 리 있으랴, 그래도 술 얘기 나온 김에,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밤을, 역사를, 갑을관계를, 미래를, 사람을 만들었는지 문학적으로 면밀히 살펴봐야 하나, 못 다한 꼬막 먹으러 가야해서 이만 줄여야겠다. 이것은 애주가의 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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