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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도빈 Dec 20. 2022

평론의 즐거움

평론의 즐거움


문예지 ‘절대 문학’이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내게도 청탁을 했다. 

“소설가로서의 선생의 명망은 풍문으로 익히 들었습니다. 언어의 연금술사라고들 하던데. 허나 소설 청탁이 완료된 관계로 시 한 수 부탁합니다. 이래저래 기대가 큽니다.”

나는 소설을 쓰지만 시의 적절한 그들의 주장대로면, 이미 연금술사고,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었기에 일단 수락 하였다.

“그러죠 뭐. 냅킨 같은 데 끄적거린 게 있을 텐데…”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가 뭔가. 그것은 우리를 뭉클하게, 아름답게, 기쁘게, 복잡하게, 참담하게, 울리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고 희망이며 오롯이 자신을 만나는 성찰이자 세상을 밝히는 등불 아니겠는가. 그러니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교훈도 감동도 울림도 여운도 없는 잡문이나 써대는 나 같은 치가 어찌 범접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소설은 잘 쓴다는 건 아니지만.)


허나 작가는 마감을 해야 하는 법. 하여, 홀로 방에 틀어박혀 술을 마셨다. 국화주를 마시며 김춘수를 읽었고, 소주를 들이키며 박노해와 오열했고, 연태고량주를 먹으며 이태백을 읊었고, 포도주를 모시며 이해인도 모셨다. 그럼에도 부족했는지 해창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허난설헌을 불러냈고, 코냑을 홀짝이며 빅토르 위고를 느꼈고, 입가심을 위해 헤르만 헤세와 맥주를 들이 부었고,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마르틴 하이데거와 노가리를 씹다보니, 마침내 시상이 떠올랐다. 비로소 나는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닷새 만이었다.


제목 : 별이 한아우


붉어진 가로등 너의 집 앞에서 

기다릴테야

네가 올 때까지

아니 네 창에 불이 꺼질 때까지 


발신번호 없는 공중전화를 붙잡고

전화할테야

네가 받을 때까지

아니 네 입술이 한 번 더 내 목덜미에 닿을 때까지


카톡 프로필에, 돌아오라고 기다린다고

써 놓을 테야

네가 읽어줄 때까지

아니 네 프로필이 하트로 바뀔 때까지 


잘 생각해!

우리, 이별하려 사랑한 건

아니었잖아


설마 노가리나 뜯다 떠오른 이런 잡문을 시라고 부른 건가, 라고 생각하셨다면 정확히 보셨다. 그렇게 했다. 나는 세간이 말하는 ‘등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발간된 책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시와 함께 편집부의 평론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다.


***

풍문으로 들은 바가 있었기에 작가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런데 역시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 

제목부터 그렇다. ‘우아한 이별’을 거꾸로 써, 얄궂은 시적 재간을 부렸다. 

이별 후, 지질한 우리 시대 자화상을 노래한 것은 충분히 공감할 만 하나, 가로등, 발신번호, 입술, 하트 같은 그저 그런 단어의 남발은 시의 품격을 떨어뜨렸다. 

또한 딱 맞춘 운율은 정말이지 너무 뻔해 잠이 올 지경이다. 

마지막 연을 보자. ‘잘 생각해!’ 이 얼마나 일방적인 폭력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별하려 사랑하지 않았다니,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작가의 가난한 문장력에 감탄했다. 

종합하자면 이 시는 어떤 교훈도 감동도 울림도 여운도 주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 그저 그렇다.

***


나는 그의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처음부터 그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해명을 듣고 싶었을 뿐. 

“그저 그렇다, 무슨 뜻입니까?”

“아, 그거요? 설마 화 난 건가?”

화났냐고? 이 말을 들어서 인지 그런 것도 같았다. 그는 왼팔을 등 뒤로 넘겨 의자에 걸친 뒤, 쥐고 있던 연필을 손가락 사이로 건들건들 흔들며 말했다.

“최선생! 평론이란 것이 그래요. 말은 해야겠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뭐라도 잡아서 까야 하는 거. 그래야 나 같은 사람도 먹고 살지”

나도 안다. 그렇다는 것을. 교훈도 감동도 울림도, 또 뭐, 여운? 그런 거 없다는 걸. 또한 독자는 이런 것들이 풍성한 작품을 원한다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애초에 칭찬이나 찬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긍정 혹은 부정이 아닌, 그저 그런 것, 그것은 작가로서 최악의 평가다.

“당신은 쓰지 않습니까?”

“최 선생, 목소리가 커진 걸 보니 정말로 화 나셨나봐. 나는 창작은 안 해요. 평론이 좋아요. 사실 이건 영업 비밀인데. 나는 확실히 보여요. 이 작가에게 부족한 것이 어떤 점인지, 어떤 식으로 까야 하는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도 잘 알아요. 자기 글이 뭐가 문제인지”

나는 정말 화가 난 것만 같은 얼굴로 물었다.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합니까?”

“나는 즐겁습니다. 작가가 상심하거나 낙담, 혹은 분노하면 평론이 매우 시의 적절했단 뜻이겠죠? 탁월한 평론인 셈이죠. 말하자면 그들이 불행할수록 나는 행복해진다, 랄까?”

그때 내 기분을 설명할 필요 있을까. 그는 양쪽 눈썹을 갈매기처럼 만든 후 이내 실룩거리며 내 귀에 속삭였다.

“다시 한 번 말해 드려요? 선생 시는요. 그냥… 그저 그랬어요. 뭐… 평론할 가치조차 없다 랄까? 최선생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나는 그의 책상 위에, 그가 받은 상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크리스털 트로피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나는 그의 정수리를 내리칠 것이다. 그는 검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쓰러질 것이다. 나는 응징할 것이다. 

그때였다. 그는 갈매기 눈썹을 더욱 격하게 실룩거리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최선생, 혹시 소설도 쓰시나? 다음 호가 신진 소설가 특집이라, 단편 하나 올리고 싶은데. 이거 선생한테 제일 먼저 청탁 하는 겁니다”

나는 여전히 크리스털을 쳐든 채 외쳤다.

“귀 문예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절대문학이여 영원 하라!”

나는 크리스털을 옷소매로 닦으며 여쭈었다.

“마감은 언제죠? 이면지 같은 데 끄적거린 게 있을 텐데… 원고료는 얼마나… 평론은 없죠?”


끝.


***

이 소설이 평론을 소재로 삼았기에 평론하기 불편하나, 이런 것도 평론가의 일이니 평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작가는 충분히 주제를 드러낸 걸로 보여 진다. 

쓰레기 같은 원고로 등단한 작가와 그럼에도 진심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어느 평론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 내린 평론에 대한 비이성적 불신과 편견, 그리고 주인공의 잠재적 폭력성을 비판하고 있다.

구성적인 면에서는 개연성 없는 발단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나름대로 영민하게 배열했다 할 수 있다. 허나 이야기를 이끄는 작가의 필력이 부족한 탓인지, 너무도 짧은 분량은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서사를 비교적 시의 적절히 조립하려 노력했기에, 메시지는 대충 전달 된 걸로 보여 진다.

전체적으로, 신인新人의 패기랄까, 스타일, 소재, 문체 등 곳곳에서 기성 작가와는 다르게 쓰려 노력한 점은 가상하다. 

작가에 대한 소문에 굳이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의 소설을 읽은 독자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금이라 했던 밴저민 프랭클린이 생각나는 밤이다. 

끝으로, 이러한 작가의 대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무엇보다 중요한, 30년 넘게 평론을 업으로 해온 필자가 늘 강조하는 그것, 핍진성이 없다. 핍진성이. 


<상대문학 2022 가을호>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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