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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r 04. 2023

제발 이거라도 먹어봐 좀

나에게 맞는 '그나마 건강식' 찾기

오늘은 통닭 내일은 치킨, 매일 저녁 이딴 식생활을 이어가다 마침내 위기감을 느꼈다. 이렇게 살다간 골로 가겠다. 물엿 듬뿍 기름 듬뿍 양념치킨에 비하면 오대수의 군만두도 건강식품이나 마찬가지다. 단백질(고기), 탄수화물(밀가루), 지방(기름), 섬유질(야채)이 나름대로 다 갖춰져 있지 않은가? (부디 당면만 들어 있는 군만두는 아니었기를) 짜고 기름지고 비타민이 부족하긴 하겠지만 15년간 군만두만 먹는다고 죽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15년간 치킨만 먹는다면 확실히 치명적일 것 같달까.


얼마 전 나는 지난 20년간의 자취생활을 돌아보며 내가 요리에 흥미도 소질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 갑자기 요리가 좋아진다면 모르지만, 앞으로도 내가 삼시세끼를 일일이 썰고 볶고 끓여 먹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한두 달쯤 절에 들어가 남이 차려주는 절밥만 먹으며 디톡스를 하고 싶다는 둥 허황된 꿈을 꿔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 식습관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즐겨 듣는 <밀림의 왕: 미루는 사람들을 위한 팟캐스트>에 식습관 루틴 얘기가 나왔다. 삼시세끼를 챙겨 먹는 게 루틴의 기본이며, 모든 끼니가 맛있고 즐겁고 새로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국과 반찬 몇 가지를 갖춘 한식은 여자를 갈아서 유지되어 온 힘든 상차림이므로, 간편하게 토마토나 파프리카, 계란, 그래놀라 등을 돌려가며 먹는다고 했다. 고구마와 바나나만 먹고 산다는 코드쿤스트에 이어 한발 더 나아간 인식의 전환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어릴 때부터 하도 ‘골고루 먹어라’고 배워서, 학교 급식처럼 끼니 때마다 밥·국·반찬3종을 챙겨 먹어야만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매끼마다 ‘오늘 반찬 뭐 먹지?’를 고민하고, 장보고, 손질하고, 저장하고, 요리하고, 먹고, 치우려면 너무 많은 수고가 들어간다. 이 힘든 일을 해내시는 분들을 존경하는 만큼,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이런 철없는 글에 인용하기는 죄송스럽지만, 박경리 선생님은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나는 혼자 있기 때문에 쌀과 잡곡 한 줌이면 밥을 지어먹을 수가 있지요. 텃밭에는 겨울을 빼고 푸성귀가 늘 있으니, 기본적인 간장, 된장, 고추장만 있으면 식사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문제는 기본적인 것만으로 생활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멋지지 않은가? 물론 선생님이 요리가 귀찮다 따위의 이유로 이렇게 쓰신 건 아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만으로 생활함으로써 ‘굽히고 살지 않아도 되는 용기’를 얻었고, 현대의 성인병이나 환경 문제를 봐도 청빈한 삶이 더 중요해지지 않았냐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아직 청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는 이 대목에 주목했다. 매끼 식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본인에게 편한 식단으로 단순하게 먹고 살아도 된다는 것, 그렇게 ‘기본적인 것만으로’ 생활한다면 많은 부담이 덜어진다는 것이다.


전제 1: 치킨 통닭만 먹고 살면 안 된다.

전제 2: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

전제 3: 극단적인 원푸드 다이어트가 아니라면, 반드시 매끼 다른 음식, 다양한 반찬을 먹을 필요는 없다.

결론: 최대한 간편한 ‘그나마 건강식을 찾아 입맛을 단순하게 길들여보자.


채식도 아니고 첨가물 프리도 아니고 저탄수 고단백도 아니다. ‘적어도 양념치킨보다는’ 건강에 좋은 초간편 식품을 찾아보기로 했다. 방구석에 처박혀 컵라면만 먹는 딸자식에게 제발 이거라도 먹어보라며 들이밀고 싶어지는 음식 말이다. 입맛에도 어느 정도는 맞아야 하고, 준비하기도 쉬워야 한다. 설거지거리도 많이 나오면 안 된다. 참고할 만한 책을 주문하고, 책이 오는 동안 여러 음식을 시도해봤다.


샐러드(사진): 웰빙식단의 대표주자지만 양상추와 파프리카의 아삭한 식감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끼니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차갑고 헐겁달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풀떼기만의 허전함과 씁쓸함, 배가 불러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있다.

컵과일: 먹기 편하고 맛도 괜찮았지만 너무 비싸고 양이 적었다.

반숙란&삼각김밥: 편의점 음식 중 그나마 건강해 보여서 사봤다. 반숙란은 원래 좋아하고(노른자 한정), 삼각김밥은 거의 10여 년 만에 먹어보는데 의외로 맛있었다. 반숙란&삼김조합은 간편한 아침식사로 괜찮을 것 같다. 다만 삼김은 유통기한이 짧아 매일 저녁에 미리 사놔야 하는 점이 좀 걸린다.

현미즉석밥&뿌려먹는 가루(사진): 어릴 적 '뿌비또'의 추억이 문득 떠올라 요즘 나오는 밥가루들을 몇 종 사봤다. 영양가는 별로 없겠지만 현미밥에 비벼 먹는다면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맛은? ......이럴 수가 맛있잖아?! 밥 안 먹는 꼬맹이들에게 왜 필수템인지 알 것 같다.

냉동핫도그: 솔직히 건강식은 아니지만 나름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갖춰져 있을 것 같아 사봤다. 전자렌지 돌리면 되니까 먹기 편하고, 냉동식품이라 보관도 편하다. 나름 채소도 함유(......)돼 있고 몇 가지 첨가물이 없다는 제품으로 골라봤다. 맛은? 핫도그니까 당연히 맛있음 ㅎ

단골카페 브런치(사진): 치킨과 통닭을 돌려 먹던 와중에도 매주 한 번은 새싹채소와 멜론과 견과류와 통밀빵을 섭취하게 해준 최애메뉴이다.

알배추: 내가 그나마 제일 좋아하면서도 먹기 편한 생채소다. 걍 한 장씩 뜯어서 아작아작 씹어먹으면 된다. 무르기 전에 해치울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용기를 내서 한 통 사봤다. 치킨 통닭을 먹을 때도 배추 두 잎 정도는 곁들이기로 했다.


...이 정도쯤 탐색이 진척됐을 무렵 책이 도착했다. 「채식은 어렵지만, 채소 습관(홍성란, 휴머니스트)」. 정보를 얻으려고 샀는데 힐링까지 되는 책이었다. 예쁜 음식사진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글도 다정하고 유익했다. 나 같은 초딩입맛을 어떻게든 다독여 채소를 먹여 보려는 진심이 느껴졌다.


샐러드나 나물 식감이 별로라면 채소를 ‘구워서’ 먹어봐라, 우엉이나 마늘종 같은 낯선 채소도 의외로 먹기 편하고 맛있다, 채소 보관이 부담스럽다면 사온 날 통째로 다 먹으면 된다, 외식할 때 나오는 채소를 ‘이때다!’ 하고 많이 먹어라 등 실용적인 노하우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 책에서 힌트를 얻어 알배추 반 통에 대충 기름과 소금을 뿌려 에어프라이어에 구워봤더니, 이럴 수가, 맛있다. 피잣집에서 딸려 온 파마산치즈가루를 뿌리니 금상첨화였다. 구운 야채의 세계라니, 미지의 대륙에 들어선 듯 설레기까지 한다.


이제 규칙적으로 하루 세 끼를 챙겨 먹고, 주3회 이상은 채소가 포함된 메뉴를 먹어보련다. 무릇 결심을 지키려면 주변에 알려야 한다고 했으니, 앞으로 ‘그나마 건강식’ 사진을 매주 브런치 글 마지막에 인증하겠다. 브런치를 이런 용도로 쓰다니ㅋ 주3회는 너무 널널한 기준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점점 주4회, 주5회로 늘려 언젠가는 진심으로 채소를 좋아하는 입맛을 갖게 되기를. 끼니마다 패스트푸드의 유혹과 싸울 필요 없이, 단순하고 건강하게 먹고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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