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 Mar 18. 2023

뭘로 그리지?

분명 귀여운 아기 사진을 보고 그렸건만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라는 매거진 제목이 무색하게 나날이 딴짓을 일삼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이다’의 홈페이지를 구경하다가 충동적으로 길드로잉 워크숍을 신청했다. 거의 20년 가까이 일기와 그림을 봐 왔던 터라,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꽤나 친근감을 느낀다. 멀리서 각자 방황하고 결심하고 좌절하고 일어나고 하면서 같이 나이 먹어가는 느낌이랄까. 언젠가 한 번은 워크숍을 듣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다 싶었다.


지겨운 회의를 들을 때는 끄적끄적 낙서를 하고, 몇 년에 한 번쯤은 새로운 그림도구를 지르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내 그림실력의 한계에 부딪혀 포기하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꾸준히 연습을 해서 간단한 일상툰 느낌의 그림은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식의 바람이 한둘이 아니라 문제지만-_-


어릴 때는 공책에 칸을 나눠 늘 똑같은 내용의 만화를 그려댔다. 어린 여자애가 동굴에서 혼자 최소한의 잡곡과 풀때기로 연명하다가 갑자기 엄청 성공해서 벼락부자가 되는 내용이었다.ㅋㅋㅋㅋㅋ 노량진에서 임용고사 재수를 하던 시절에는 갑자기 문구점에 달려가 수채물감과 붓을 사서는 연두색 하늘과 보라색 바다를 그리기도 했다(라고 하면 제법 분위기 있는 그림이었을 것 같지만 아님). 언젠가는 갑자기 아크릴물감을 질러서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붓질을 해보기도 했고, 그밖에도 종종 사인펜 세트를 덜컥 지르거나, 심혈을 기울여 색연필 수십 색을 하나하나 골라 사거나, 당근마켓에서 아이패드를 오직 그림용으로 질러버리는 등 다양한 돈지랄을 했더랬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아이패드 드로잉 기술을 익힌다면 다른 그림도구는 아무것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다.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고치기도 쉽고, 다양한 기법과 색과 효과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역시 아날로그형 인간인가보다. 영원히 충전할 필요 없는 하얀 스케치북을 아무 때나 펼쳐, 24색이든 36색이든 여러 색깔 물감 중에 하나를 골라, 숨 죽이며 쓱쓱 색칠을 하고, 망하면 망한 대로 한 장 한 장 스케치북에 쌓아 나가는 맛을 버리지 못한다.




워크숍 신청은 했지만 첫 수업은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책꽂이에서 [끄적끄적 길드로잉(이다, 웅진지식하우스)] 책을 꺼내 ‘뭘로 그리지?’ 편을 펼쳤다. 지금까지 써본 연필, 파스텔, 크레파스, 수채물감, 아크릴물감, 색연필, 사인펜, 아이패드는 다들 뭔가 하나씩이 아쉬웠다. 연필이나 파스텔처럼 손으로 쓱 스치면 번지고 묻어나는 게 아니라 한번 칠하면 딱 고정되는 도구, 색연필이나 수채물감처럼 뭔가 흐릿하고 투명한 느낌이 아니라 선명하고 균일하게 칠해지는 도구, 아크릴물감처럼 거창하게 물통이니 팔레트니 붓이니 잔뜩 펼쳐놓을 필요 없는 간단한 도구는 없을까?


관심이 가는 펜들을 한두 자루씩 사서 직접 써보기로 했다.



직선, 곡선, 색칠을 시험해볼 수 있게 대충 우산과 장화를 각기 다른 펜으로 그려봤다. 어떤 펜은 냄새가 심했고, 어떤 펜은 너무 가늘었고, 어떤 펜은 소리가 시끄러웠고, 어떤 펜은 칠할 때 펜자국이 많이 났고, 어떤 펜은 칠할 때 종이가 일어났다. 그중 신한 브러시 마카가 칠하는 느낌이 좋았다. 오케이. 윤곽선은 (일단) 모나미 드로잉 붓펜을 쓰고, 색칠은 브러시 마카로 하자.


그 선택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번엔 마카의 브랜드를 선택해야 했다. 처음에 꽂힌 신한을 그냥 사도 됐겠지만 브러시 마카는 코픽이 제일 좋고 잉크 충전도 된다는 말에 귀가 팔랑거렸다. 또다시 길고 험난한 검색의 여정이 시작됐다. 신한이냐 코픽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블로그와 유튜브를 한참 넘나들다 결국 대형 문구점에 원정을 나가 시필용 펜들을 써봤다. 결론은 신한. 더 채도가 높고 선명한 느낌이라 내 취향에 맞았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색깔 선택’이라는 엄청난 과제가 남아 있었다. 36색, 72색 세트를 통째로 덥석 지르고 싶진 않았다. 비싸기도 비싸고, 안 쓸 색도 섞여 있게 마련이니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을 일단 고른 뒤 연두색이니 하늘색이니 핑크색이니 갈색이니 하는 다른 기본색들을 골랐다. 빨강만 해도 종류가 한둘이 아니었다. carmine이니 coral red니 geranium이니 하는 색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머리에 쥐가 나고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아 그냥 세트를 살걸 그랬나.


‘색깔 많다고 다가 아니다, 12색으로도 그릴 수 있다’를 가슴에 새기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최종 선택은 24색이었다. 그 고뇌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모니터로 보는 색은 실제와 다름


한 자루 한 자루 비닐포장이 되어 있어서 김장철 마늘 까듯 힘겹게 벗겨냈다. 이렇게 보니 전형적인 24색 크레파스 색깔이다. 미묘한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이 정도면 선방이려니 하고 쓰련다. 과연 이번에는 그림을 내 진짜 취미로 만들 수 있을까? 이번에 고른 그림도구들은 한 자루가 다 닳고 또 살 때까지 꾸준히 쓸 수 있을까? 이렇게 혼자 좌충우돌하다보니 드디어 첫 수업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 왜 떨리고 난리.


무념무상 색칠시간




< 2주간의 '그나마 건강식' >


1. 가지를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파마산치즈를 뿌리니 완전 맛난 요리가 되었다. 하지만 가지 3개는 한꺼번에 못 먹는다고요... 제발 채소를 하나씩만 팔아줬으면.

2. 새로 생긴 샐러드 가게에서 해산물 또띠아 랩을 사 먹어보고 '스리라차마요소스'라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었다니!

3. 주식이나 다름없던 단골집 옛날통닭. 이제는 사장님이 내 얼굴만 보고도 '한 마리, 소스 하나?' 하신다. 끊지는 않아도 반 마리만 먹고 채소를 곁들이기로 했다.


4. 채소는 컵 위에. 그릇을 더 꺼내지 않겠다는 집념이 엿보인다.

5. 그렇게도 건강에 좋다는 '아침 사과 한 알'을 시도해봄. 소감은? 음... 나는 그 정도 갓생러는 아닌 것으로.

6. 하와이식 샐러드라는 포케를 사 먹어봤다. 스리라차마요소스와 함께하니 풀때기도 맛있었다. 밥과 샐러드가 어울릴까 했는데 먹어보니 그냥 회덮밥이었다.


7. 그릇을 더 꺼내지 않겠다는 집념 2탄. 밀가루 듬뿍 달달소스 듬뿍 타코야끼지만 알배추, 샐러리와 함께라면 그나마 괜찮을 거라고 믿어본다.

8. 나는 토마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9. 핫도그를 보고 깜짝 놀란 듯한 샐러리가 왠지 귀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